"제 가문의 사슬을 이미 읽으셨던 겁니까, 바벨의 주인이시여……!"

바닥에 이마를 세차게 짓찧는 검성 후보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던 카이저 폰 슈발츠가, 차가운 석조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굴복하는 광경.
그 순간, 정적을 깨뜨리며 묵직한 오크재 문이 거칠게 박차고 열렸다.

철컥! 채쟁-!
"카이저 경!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무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라!"

검집에서 날카로운 쇠붙이가 빠져나오는 살벌한 마찰음이 다락방의 좁은 공기를 찢었다. 들이닥친 이들은 황금의 원탁 소속 호위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은빛 검날이 촛불을 받아 번뜩였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가문의 명예를 온몸에 두르고 다녀야 할 카이저가 초라한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나, 아드리안 레온하르트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탭댄스를 출 것 같았다.
'엄마야, 살려주세요. 나 진짜 죽어. 저 칼날에 스치기만 해도 내 시한부 몸뚱이는 바로 두 동강이 난다고!'

속안에서는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퓨전하여 단군 이래 최대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당장이라도 침대 시트를 뒤집어쓰고 숨고 싶었다. 꼬여버린 혈맥이 요동치며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훅 올라왔다. 여기서 삐끗해서 정체가 들통나면, 가문의 암살자가 아니라 이 호위 기사들의 칼날에 다져진 고기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내 저주받은 몸뚱이는 긴장감이 극에 달할수록 반대로 움직였다. 얼굴 근육이 동토의 땅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으며, 세상 모든 것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안광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분하고 나지막한 저음으로 변해 터져 나갔다.

"어수선하군."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끝 하나 까딱하는 동작이었지만, 들이닥친 기사들은 움찔하며 검 끝을 낮췄다. 그들의 눈에는 내 손짓이 당장이라도 금단의 파멸 마법을 캐스팅하려는 흑막의 수수께끼 같은 몸짓으로 보였으리라.

나는 바닥에 엎드린 카이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선을 창밖의 어둠으로 던지며 읊조렸다.
"쏟아진 진흙이나 쓸어라. 내 방에 발자국을 남기는 무뢰배들은 사양하고 싶으니."

"……!"
방 안에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쏟아진 진흙. 내가 가리킨 것은 바닥에 쏟아진, 데미안의 자객이 보냈던 독약의 흔적과 먼지 더미였다. 그리고 내 낯가림과 불안증이 만들어낸 "청소나 하고 꺼져라"라는 극도의 회피성 멘트였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있던 카이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적색 눈동자에는 충격과 함께, 무언가 거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 특유의 황홀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쏟아진 진흙……!' 카이저의 뇌내 망상이 광속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다. 내 마음속에 엉겨 붙어 가문을 망치고 있던 나약함, 그리고 가문의 원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아래 가슴에 품어왔던 탁한 기혈의 찌꺼기를 뜻하는 것이다! 바벨의 주인께서는 내가 이 방의 더러움을 치우듯, 내 안의 업보와 흐트러진 기운을 스스로 닦아내기를 원하시는구나!'
카이저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명검을 조심스럽게 주워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검을 겨누고 있던 호위 기사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어냈다.

"검을 거둬라! 무례한 놈들!"
"예? 하지만 카이저 님, 이 자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닥쳐라!" 카이저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그의 마나가 일순간 다락방을 가득 채우며 기사들을 압박했다. "감히 내 은사(恩師)이자, 이 바벨의 다락방의 주인이신 아드리안 님께 검 끝을 겨누다니! 네놈들이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당장 나가라! 나가서 문밖을 철저히 통제해라. 먼지 한 톨도 이 방 안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대륙 최고의 천재 검성 후보이자 황금의 원탁 일원인 카이저가, 고작 레온하르트 가문의 병약한 서자에게 '은사'라는 칭호를 붙이며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눈빛은 단순한 존경을 넘어, 신앙에 가까운 숭배로 가득 차 있었다.
기사들은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혼란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고하고 초연한 태도, 마치 인간 문명의 흥망성쇠를 몇 번이고 지켜본 초월자 같은 분위기에 기사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자는…… 진짜다.' '카이저 님이 저 정도로 고개를 숙일 정도라면,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의 인물이 아니야.'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례를 표한 뒤, 뒷걸음질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카이저는 곧바로 침상 아래 구석에 놓여 있던 조잡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쓸고 있네. 대륙을 호령할 검성 후보라는 새끼가, 낡아빠진 수수 빗자루를 쥐고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표정으로 방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마치 검술의 극의를 펼치듯 정교하고 조심스러웠다. 독약이 묻은 바닥의 찌꺼기들을 한 톨도 남김없이 모으는 그의 모습은 흡사 성물을 다루는 사제와도 같았다.

"바벨의 주인이시여." 카이저가 쓸어모은 먼지와 독약 잔해를 봉투에 정성스럽게 담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남김없이 닦아내었습니다. 제 마음의 진흙도, 이 방의 더러움도 말입니다. 당신께서 제시해주신 길을 따라, 제 안의 막힌 기혈을 뚫고 가문의 사슬을 끊어내겠습니다."
'아니, 그냥 방이 더러워서 쓸라고 한 건데…….' 내 속마음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지만, 내 입은 여전히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 다짐이 변치 않기를 바라지. 네 검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는 스스로 잘 알 터."
"예! 당신의 뜻대로, 이 카이저 폰 슈발츠의 검은 오직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움직일 것입니다."
카이저는 봉투를 품에 소중히 넣고는, 다시 한번 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임무를 완수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완전히 닫히고 다락방에 고요함이 찾아왔을 때, 나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아아아……."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살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가슴팍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크흑……!"

기혈이 거꾸로 솟구치며 입안 가득 비릿한 피가 고였다. 레온하르트 가문의 저주스러운 혈맥 협착증. 조금만 긴장하거나 흥분해도 마나가 꼬여 육체를 파먹는 끔찍한 병증이었다.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감각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으으, 아파 죽겠네. 약, 약을 먹어야 해.'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방 한구석에 놓인 약탕기로 향했다. 내 기혈 역류를 가라앉히기 위해 달여둔 극도의 독초 약탕. 몸에 좋은 약은 쓰다지만, 이 약은 거의 사약에 가까운 맛과 향을 자랑했다. 온갖 기괴한 약초와 독초의 성분을 조합해 억지로 꼬인 혈맥을 마비시키는 임시방편의 비약이었다.
화로 위의 약탕기에서 검붉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약탕을 가득 채웠다. 코를 찌르는 씁쓸하고 기괴한 냄새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꿀꺽, 꿀꺽.
"우웁……!"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혀 마디마디가 마비되는 감각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내 가슴을 옥죄던 기혈의 꼬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깎여 나가던 생명력이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 고정되는 기분이었다.
"푸하…… 살 것 같다. 진짜 맛 더럽게 없네."

나는 마른기침을 뱉어내며 약탕기를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진득하고 기괴한 보랏빛 약탕 찌꺼기가 가득 남아 있었다. 독특한 마력 인자가 잔존하는 특수 한방 약탕 찌꺼기. 워낙 독성이 강한 약초들을 섞어 달인 탓에, 그냥 방 안에 두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이걸 어디다 버리지? 방에 두면 냄새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데.'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바벨의 다락방은 북동쪽 탑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창밖을 내다보면 아카데미의 울창한 정원 수풀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이 깊어 정원에는 인적조차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밑에 아무도 없겠지.'

나는 약탕기를 통째로 들고 창밖으로 남은 보랏빛 찌꺼기를 휙 던져버렸다.
스르륵, 퉤.
기괴한 색의 약탕 찌꺼기가 밤하늘을 가르며 북동쪽 탑 아래의 무성한 정원 수풀 속으로 떨어졌다. 완벽한 무단투기였다. 아드리안은 그저 방 안의 악취를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 찌꺼기가 떨어진 장소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단 1밀리그램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수풀 밑에는, 아드리안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인물이 숨어 있었다.
* * *
바벨의 탑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린 정원 깊은 곳.

흑색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사내, 베르무트 베인은 숨을 죽인 채 대지에 기괴한 마법 마킹을 새겨넣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마력은 기형적인 궤도를 그리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궤도를 연결하면 마신의 강림을 위한 간섭 레일라인이 완성된다."
베르무트의 입꼬리가 광기 어린 미소로 일그러졌다. 학구적이고 다정한 아카데미 교수의 가면 뒤에 숨겨진, 마신 숭배 우두머리로서의 본색이었다. 제국의 눈을 피해 아카데미 지하에 봉인된 마신의 심장을 깨우기 위해, 그는 수년간 이 은밀한 경로를 설계해왔다.
오늘 밤은 그 경로의 핵심 교차점을 활성화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경비병들의 동선도 파악했고, 결계의 틈새도 완벽히 공략했다. 이제 이 마지막 직인을 땅에 새기기만 하면—

철퍽.
"……?"
하늘에서 기괴한 보랏빛 물질이 툭 떨어져 베르무트의 코앞, 정확히 그가 새기려던 마법 레일라인의 교차점에 정통으로 내려앉았다.
치이이이익-!
"끄아악?!"

베르무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떨어진 물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독의 기운과 기괴한 마력 인자가, 그가 정성스레 구축해둔 마신의 간섭 레일라인을 사정없이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미량의 독성과 알 수 없는 한방 약초의 성분이 교차하며, 마신 소환용 공명 마법진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역류했다.
"이, 이게 무슨……! 마력 역류?! 극독의 간섭인가?!"
베르무트는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 떨어진 보랏빛 찌꺼기는 단순한 오물이 아니었다. 고도로 응축된 독초의 마력 인자가 잔존해 있었고, 그 배열은 마치 '여기에 마신의 레일라인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저격한 것'처럼 완벽하게 공명 경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베르무트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북동쪽 탑 꼭대기. 바벨의 다락방. 그곳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희미한 촛불 사이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창가에 기대어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그의 차갑고 오만한 눈빛이 어둠을 뚫고 자신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베르무트의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설마 내 계획을 전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 경로를, 이 시간에, 여기에 그릴 것까지 전부 내다보고…… 일부러 마력 역류를 일으키는 극독의 비약을 떨어뜨려 경고를 보낸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네놈의 얕은 수작은 내 손바닥 안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절대적인 흑막의 무언의 압박이었다.
"괴, 괴물 같은 놈……! 이미 아카데미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
베르무트는 패닉에 빠졌다. 천재적인 지략가라 자부하던 자신의 머릿속이 공포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아드리안의 손에 영혼까지 멸해질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서둘러 도망쳐야 했다. 베르무트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다, 품에 품고 있던 중요한 서류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제국 금단의 마장 직인이 찍힌, 마신 숭배 세력과 제국 고위층 간의 비밀 협약이 담긴 양해서였다.
바스락.
"흐윽……!"
베르무트는 서류를 주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숨죽인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의 흑색 로브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창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방금 밑에서 누가 비명 지르지 않았나?"
바람 소리였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원 수풀 쪽을 내려다보았다. 밤이 깊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약탕 찌꺼기를 버린 자리 부근에 웬 허연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누가 쓰레기를 버리고 갔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겸 바람도 쐴 겸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사실 아까 마신 약탕 때문에 몸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나는 낡은 로브를 걸치고 슬그머니 다락방을 나섰다. 다행히 카이저가 기사들을 전부 물리치고 주위를 통제해둔 덕분에 내려가는 길은 아주 한산했다.
정원에 도착한 나는 수풀 헤치고 약탕 찌꺼기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고약한 약초 냄새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죽 봉투를 발견했다.
"진짜 쓰레기네. 아카데미 학생들은 시민의식이 부족하단 말이야."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봉투를 집어 들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달빛에 비친 종이에는 붉은색의 기괴한 마법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제국의 문양과는 사뭇 다른, 보기만 해도 불쾌한 기운이 풍기는 문양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무심코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북동쪽 레일라인의 동조율이 80%에 도달하는 즉시, 지하의 심장을 개방한다. 황실 금고의 비소-9 유출은 데미안 공자의 협조 아래 완료되었으며……]
글자를 읽는 순간,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다. 동시에 내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책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스스스스…….
나의 초월적 이능이자, 영혼을 깎아 진실을 읽어내는 금단의 골든핑거. '심측의 기록서(深測의 記錄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심측의 기록서가 대상의 '비밀'을 감지합니다.] [관측 대상: 제국 금단의 마장 직인이 찍힌 비밀 양해서] [경고: 정보의 격이 매우 높습니다. 판독 시 사용자의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잠깐, 야! 열지 마! 나 안 궁금해! 안 읽을 거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야속한 기록서는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붉은 글씨를 선명하게 띄우기 시작했다. 가슴팍이 다시 한번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내 남은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서늘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진실의 문장들.

[이 양서는 마신 숭배자 '베르무트 베인'과 레온하르트 가문의 차기 가주 '데미안 레온하르트'가 맺은 비밀 맹약서입니다.] [데미안은 아드리안을 제거하기 위해 황실 독약 '비소-9'을 제공했으며, 베르무트는 그 대가로 아카데미 지하의 마신 소환을 위한 제물로 아드리안을 바치기로 합의했습니다.] [현재 베르무트는 당신이 던진 약탕 찌꺼기를 '신의 한 수이자 자신들의 계획을 전부 간파한 초월자의 경고'로 오해하여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하?"
나는 멍하니 텍스트를 바라보았다.

내 이복형 데미안이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보낸 것도 모자라 마신 숭배자랑 손을 잡았다고? 그리고 방금 내가 버린 쓰레기 때문에 그 마신 숭배자 우두머리가 패닉에 빠졌다고?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등 뒤의 수풀이 스르륵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
나는 굳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어둠 속에서, 정찰을 돌던 아카데미의 최고위 마법 교수와 몇 명의 상급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 손에 쥐어진, 붉은 마장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비밀 양해서에 꽂혔다.

"아드리안 공자? 이 깊은 밤에 여기서 무엇을……."
기사의 질문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정지했다. 이 양서를 들키면 반역죄나 마신 숭배 공범으로 몰려 즉시 처형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다시 한번 폭발했다. 얼굴 근육이 차갑게 굳어갔고, 내 입은 또다시 내 의지를 배신한 채 가장 오만하고 싸늘한 어조로 가차 없는 반어법을 뱉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