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컥, 으흑……!"
목구멍을 찢고 넘어오는 비린 맛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시야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걸쭉한 선혈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허연 시트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보며 나는 뇌정지를 일으켰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어젯밤까지는 내 방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판타지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사방이 온통 음산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낯선 방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정체 모를 약초 탄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그와 동시에 낯선 기억들이 홍수처럼 뇌리를 스쳤다. 벨하르트 아카데미, 북동쪽 탑 꼭대기에 위치한 '바벨의 다락방'. 그리고 내 이름은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미친, 진짜 빙의라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그 이름은 내가 하던 게임 속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는 시한부 조연의 것이었다. 가문의 저주라 불리는 혈맥 협착증에 걸려 마법은커녕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겨운 최약체 엑스트라. 가문을 독차지하려는 이복형 데미안의 음모로 아카데미라는 치열한 파벌 전쟁터에 강제로 던져진 버림패였다.

심지어 지금 내 몸에 남은 수명은 고작 열흘 남짓. 몸을 조금만 가누려 해도 가슴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기혈이 이리저리 뒤엉켜 심장을 조여오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달컥.

그때, 다락방의 낡은 목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헐렁한 시종복을 입은 사내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정체 모를 검붉은 액체가 담긴 대접이 들려 있었다. 사내의 눈빛이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쟁반을 든 손끝을 미세하게 떨며 내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젊은 도련님,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사내의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가주님…… 아니, 데미안 소공자님께서 특별히 도련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보내신 비약입니다. 기혈을 보하는 데 이만한 것이 없으니, 어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지요."
비약이라고? 상식적으로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데미안이 이런 외진 탑까지 약을 보내줄 리가 없었다. 쟁반 위에서 일렁이는 검은 액체는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큰일 났다. 이거 백퍼센트 독약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극심한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낯선 이와의 대치, 그리고 죽음의 위협이 닥쳐오자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려줘! 나 마법도 못 쓴단 말이야! 여기서 이걸 마시면 바로 즉사라고!*

밀려드는 공포에 숨을 들이켜는 순간, 귓가에 이명과 함께 머릿속이 번쩍하는 통증이 일었다.
지잉-!

눈앞에 반투명한 암흑의 양장본 책 한 권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고색창연한 금빛 사슬들이 책 표지를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초월적 이능, '심측의 기록서(深測의 記錄書)'가 개방됩니다.] [사용자의 현재 남은 수명: 10일] [관측 대상의 깊은 진실과 인과를 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단, 대상의 격과 정보의 가치에 따라 잔여 수명이 실시간으로 차감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기괴한 시스템 창에 나는 침을 삼켰다. 수명을 대가로 진실을 보는 눈이라니.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수명이 깎이는 게 대수냐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곧바로 내 앞에 선 시종을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저 시종의 정보와 저 약탕의 정체를 읽어라!'

스스스슥! 머릿속의 책장이 미친 듯이 넘어가며, 시종의 머리 위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대상: 삼류 자객 한스 (데미안 레온하르트의 사주를 받음)] [진실: 약탕 내부에는 황실 전용 제한 독물인 '비소-9'가 극소량 희석되어 있음. 복용 즉시 자연사로 위장된 장기 부전으로 사망함.] [소모 수명: 0.5일]

진짜 독약이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런데 그 순간, 다락방 창문 너머, 어두운 지붕 기와 틈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단순한 시종의 기척이 아니었다. 살죽을 저미는 듯한 날카로운 검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데미안이 보낸 자객이 한 명 더 있는 건가?*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며 그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향해 다시 한 번 능력을 발휘했다.



'저 밖에 숨어 있는 놈은 도대체 누구야!'


[대상: 카이저 폰 슈발츠 (벨하르트 아카데미 '황금의 원탁' 소속, 천재 검성)] [진실: 슈발츠 가문의 몰락 원흉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품고 있음. 현재 심각한 기혈 폐색증(심장 부근 마력 통로의 왜곡)으로 인해 매일 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무너지기 직전임. 아드리안의 거동을 감시하기 위해 잠입 중.] [경고: 대상의 무력과 인과적 격이 매우 높습니다. 정보 획득을 위해 막대한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소모 수명: 2.5일]

[현재 남은 수명: 7일]
"컥……!"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극심한 압박감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수명이 실시간으로 3일이나 날아갔다. 몸 안의 피가 통째로 말라붙는 듯한 탈력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검성 카이저라니. 아카데미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괴물이 왜 나 같은 약골을 감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7일은커녕 7분 뒤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어서 약을……."
시종 한스가 독촉하며 약탕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 서린 초조함이 고스란히 읽혔다.
내 극심한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극점에 달했다. 긴장감이 한계를 돌파하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면 근육이 서늘하게 내려앉으며, 눈매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떨리는 호흡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내뱉은 목소리는,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극도로 오만하고 차가운 저음으로 변해 흘러나왔다.
"참 달구나."

"예, 예?"
한스가 흠칫하며 뒤걸음질 쳤다. 나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피 묻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턱을 괴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등 뒤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겉모습은 그 누구보다 여유롭고 고고한 지배자의 형상이었다.
"데미안의 성의가…… 참으로 달아."
나는 시종이 내민 약탕 그릇을 느릿하게 소리 내어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 쟁반 위로 떨어졌다.

"도, 도련님.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그저 소공자님의 명을 받아 보약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보약이라."
나는 픽 웃었다. 피가 섞여 붉게 물든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기괴할 정도로 서늘한 위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실제로는 무서워서 이가 부딪치는 것을 막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이었지만, 상대의 눈에는 완벽한 조소로 보였으리라.

스르륵.
나는 약탕 그릇을 천천히 기울였다. 검붉은 액체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돌바닥에 닿은 독약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거품을 일으켰다. 푸르스름한 연기와 함께 돌 표면이 검게 부식되어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히, 익……!"
한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네놈들이 말한 기혈을 보하는 명약의 효능인가?"
내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불안감에 목이 메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오히려 상대를 압도하는 가증스러운 조소처럼 변해 방 안을 두드렸다.
"데미안에게 전해라. 쥐새끼를 보내 내 목숨을 탐하려거든, 최소한 성의는 보이라고. 황실 금고에서 훔쳐낸 '비소-9' 따위의 싸구려 독물로는 내 잠을 깨우기조차 부족하니까."
"어, 어떻게…… 그걸……!"

한스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독약의 정확한 이름과 출처까지 꿰뚫어 보는 내 안광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공포에 질린 사내가 기어이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휴, 한 놈은 해결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창밖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척이 요동쳤다. 검성 카이저. 그가 움직이고 있었다.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조용히 내려앉은 그림자가 있었다. 은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 있는 소년.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이자, 훗날 대륙을 뒤흔들 검성이라 불리는 카이저 폰 슈발츠였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찬 검자루에 가 닿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네놈은 누구지?"

카이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레온하르트 가문의 쓸모없는 서자 따위가 이런 안광을 가졌을 리 없다. 방금 그 독약의 정체는 물론, 데미안의 음모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 대체 정체가 뭐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검성의 살기가 피부를 찌르자 기혈이 뒤틀려 다시금 목구멍으로 피가 울컥 치밀었다. "컥, 쿨럭!"

나는 이불 위에 다시 한 번 붉은 피를 토해냈다. 전신이 덜덜 떨렸고, 당장이라도 쓰러져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목이 날아간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피를 흘리면서도 오만하게 웃는, 전형적인 광오한 강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쥐새끼 한 마리가 꼬였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덩치가 큰 사냥개가 숨어 있었군."

내 목소리는 피 냄새와 섞여 기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카이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내 무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나의 태연자약한 태도와 서늘한 눈빛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피 묻은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심측의 기록서'가 알려준 그의 가장 아픈 비밀을 향해 칼날을 겨눴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나?"
나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카이저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그 썩어빠진 심장을 움켜쥐고 이 탑을 기어오를 때부터다. 카이저."
"……뭐라?"

카이저의 신형이 굳어졌다.
"슈발츠의 거창한 이름을 잇는 천재 검성이라 불리는 자가, 고작 가문의 사슬 하나 끊어내지 못해 매일 밤 가슴을 쥐어짜며 울부짖는 꼴이라니. 참으로 가소롭군."

내 목소리가 고요한 다락방에 울려 퍼질 때마다, 카이저의 안색이 기괴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슈발츠 가문의 비극적인 몰락 사정, 그리고 매일 밤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심장 부근의 치명적인 기혈 폐색증. 그 극비 중의 극비를, 이 방구석에 처박혀 죽어가던 병약한 서자가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카이저의 검을 쥔 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폭풍 같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 자는 단순히 병에 걸려 요양하는 엑스트라가 아니다. 황실과 가문의 모든 비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심연의 지배자다. 아카데미라는 좁은 판도 뒤에서 모든 것을 조율하는 거대한 흑막이 바로 이 '바벨의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카이저의 눈동자 속에 서린 깊은 공포와 경외감을 놓치지 않았다. 몸이 아파서 당장 뒤질 것 같았기에, 나는 이 귀찮은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오만하고 싸늘한 어조로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돌아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라. 아니, 네놈 스스로에게 묻는 게 빠르겠군."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까딱였다.
"검을 쥐는 법만 배웠지, 무릎을 꿇는 법은 배우지 못했나?"

그 순간, 카이저의 마음속에 있던 마지막 자존심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압도적인 정보의 비대칭, 그리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자신을 하찮은 피조물 바라보듯 하는 그 고고하고 절대적인 태도. 그것은 일국의 강자가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뒤에서 조율하는 신적인 조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안광이었다.
툭.

카이저의 손에서 대륙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던 명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힘차게 무릎을 꿇었다.
쿵!

카이저가 바닥에 이마를 세차게 부딪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 가문의 사슬을 이미 읽으셨던 겁니까, 바벨의 주인이시여……!"

그의 외침이 방 안을 강타한 바로 그 순간.
철컥! 채쟁-!

"카이저 경!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무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라!"
다락방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금의 원탁 소속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