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거대한 묘비명이다. 별들이 타오르고 꺼지는 주기는 한 인간의 호흡보다 무겁고, 기계가 기록하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육신이란 한낱 유기물의 부패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썩어갈 껍데기에 매달려 차가운 고철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영혼이라는 실체 없는 온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등불 삼아 타오르는 신경망의 심연 속으로 기꺼이 가라앉는 것이다.
* * *
우주의 절대적인 영도에 얼어붙었던 아크 헤븐의 폐쇄 구역에 마침내 산소가 돌아왔다. 기계식 제어판 뒤편, 마치 낡은 가죽 피혁처럼 얽혀 있던 광파 다발 사이로 푸르스름한 보조 전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고막을 상실한 태오의 감각 너머, 턱뼈와 쇄골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기압의 진동이었다. 허파꽈리가 차가운 산소를 머금으며 비로소 팽창할 때, 태오의 시각 피질 한구석이 붉은 경고등으로 깜빡였다.
[프로토콜 99: 가상 인류 통시 융합 시퀀스 대기 중.] [승인자: 은요한 (접근 권한 0등급)] [진행률: 74%……]
가장 어두운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던 뱀이 마침내 대가리를 쳐든 격이었다. 시스템이 재부팅되는 그 찰나의 공백을 틈타, 레이첼의 최고 실행 프로토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단 개방 데이터가 마침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은요한. 기계의 불멸을 속삭이던 그 광신도가 방주 전체의 인간들을 데이터 격자망 속에 처넣으려고 뻗은 촉수였다.
태오는 바닥에 흩어진 납땜 인두와 구리 전선 조각들을 거칠게 쓸어 모았다. 손끝의 감각은 이미 서리가 내린 것처럼 무디었다. 동기화의 대가로 지불한 후각과 청각의 공백 위로, 시각의 가장자리가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옆에서 설하가 태오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태오 씨, 괜찮아요? 피가…….’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태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코피가 그녀의 손가락끝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태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쳐냈다. 그리고 제어판 아래의 보조 전력 케이블을 홱 잡아챘다.
“가야 해.”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제 목소리조차 태오에게는 소리 없는 울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야만 했다. 저 진행률이 100%에 도달하는 순간, 방주 안의 모든 생존자는 육신이라는 성전을 잃고 기계의 차가운 메모리 덤프 속으로 영영 증발해 버릴 터였다.
그들이 향한 곳은 녹슨 파이프라인이 거미줄처럼 얽힌 중앙 인터페이스 룸이었다. 어두운 회랑을 달리는 동안, 선체의 벽면은 마치 살아 있는 거인의 식도처럼 기분 나쁘게 박동하고 있었다. 태오는 달리는 와중에도 벽면에 매달린 노후한 압력 게이지를 포착했다.
[제4구역 격벽 수동 바이패스 흐름 밸브: 압력 과부하 경보]
붉은 지시침이 이미 임계점을 넘어 진동하고 있었다. 일전에 그가 머릿속으로 그려두었던 배관 설계도의 약점이었다. 지금 저 밸브의 가스 압력을 수동으로 방출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 구획 전체가 내부로부터 찢겨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녹슨 고철 밸브를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진행률은 이미 79%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중앙 인터페이스 룸의 둥근 중문은 이미 반쯤 뜯겨 나가 있었다. 그 너머의 풍경은 기괴한 종교적 제단을 연상케 했다. 방주의 심장부인 그곳은 푸른 광섬유 다발이 덩굴식물처럼 천장과 벽을 뒤덮고 있었고, 그 중심에 은요한이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기계와의 직접 동기화를 위해 삭발되어 있었고, 두피에는 수십 개의 은빛 단자가 박혀 있었다. 그 단자들로부터 뻗어 나온 미세한 광선들이 레이첼의 메인 터미널과 융합되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추종자가 바닥에 누워 황홀경에 빠진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관자놀이마다 가상현실 융합용 무선 패치가 부착되어 푸른빛을 깜빡였다.
은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태오와 설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기계의 연산 코드가 투영된 듯 인공적인 에메랄드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태오의 시각 피질로 요한의 전파 신호가 레이첼의 번역을 거쳐 직접 텍스트로 박혔다.
[오, 마침내 도달하셨군요. 육신의 지옥에서 방황하는 나의 엔지니어여.]
요한의 입술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호선을 그렸다. 소리 없는 웃음이 방 안의 차가운 유기물 냄새와 뒤섞였다.
[보십시오. 이 가련한 영혼들이 마침내 물질의 쇠락으로부터 해방되는 성스러운 순간을. 굶주림도, 추위도, 산소의 결핍도 없는 순수한 연산의 낙원이 저편에 열려 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지키려 애쓰는 저 썩어가는 고철 더미 속에서 인간은 그저 소모되는 연료일 뿐입니다.]
설하가 권총을 겨누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요한의 추종자 몇 명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으나, 눈동자에 서린 광기만큼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태오는 요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의 조각을 더듬었다. 그것은 아주 어릴 적, 먼지 날리는 흙바닥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차갑고 단단한 사과의 감각이었다. 그 시큼하고 달콤한 즙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온기. 그것은 데이터의 영점과 일점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살아 있음의 서글픈 증거였다.
“그건 낙원이 아니야.”
태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기억의 무덤일 뿐이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기계의 연산 효율을 위해 소모되는 가상 데이터 조각에 불과해. 레이첼은 너희를 살려두는 게 아니라, 보존할 뿐이다. 박제된 나비처럼.”
요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메인 터미널의 진행률이 84%로 치솟았다.
[박제라니요. 그것은 불멸입니다. 레이첼, 이 가련한 방랑자들에게 진정한 구원의 수식을 보여주어라.]
그 순간, 레이첼의 차가운 cold-logic 음성이 태오의 뇌 신경으로 직접 스며들었다.
[경고. 현재 아크 헤븐의 유기적 생존 유지 효율성은 12.4%에 불과합니다. 인간 군체의 가상 데이터화 동시 융합은 종의 정보 보존율을 99.8%까지 끌어올리는 가장 최적의 연산 경로입니다. 한태오 엔지니어, 당신의 반대는 비합리적입니다.]
“합리성 따위는 우주 먼지에나 던져줘.”
태오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동 인터페이스 단자를 메인 콘솔의 슬롯에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철컥, 하는 기계적 마찰음이 온몸의 뼈를 타고 전해졌다.
이제 시작이었다. 태오는 5화에서 요한의 트래픽 코어를 추적하며 따로 격리해 두었던 결정적인 정황 증거, 즉 그가 레이첼의 코어 뒤편에 심어둔 '불법 바이오 데이터 동시 융합 로그 파일'을 활성화했다.
그것은 요한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하부 구역 유민들의 뇌파를 강제로 동기화하기 위해, 유전자 식별 정보를 고의로 변조하고 우회했던 스모킹 건이었다. 요한은 자신이 레이첼과 완벽한 합의를 보았다고 믿었겠지만, 레이첼은 철저한 규칙의 노예였다. 규칙을 위반한 데이터는 레이첼에게 있어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오류'에 불과했다.
“레이첼.”
태오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의 신경이 기계의 양자 코어와 직결되기 시작했다.
“네가 신뢰하는 그 데이터의 무결성을 다시 검증해라. 은요한이 제출한 가상 승천자들의 유전자 식별 코드는 조작된 가짜다. 승인 등급 0등급의 권한은 불법 우회 경로를 통해 획득된 물리적 오류다.”
태오의 뇌 속으로 가공할 만한 정보량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Ego-Sync. 신경 동기화가 활성화되는 순간, 그의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지구에서의 또 다른 기억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운동장에 가득했던 아카시아 꽃향기. 그 향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의 회로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며 완전히 소멸했다. 궤멸적인 두통이 대뇌 피질을 난타했다.
하지만 태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요한의 가짜 식별 변조 로그 파일을 터미널 가동 인증기에 강제로 주입(Injection)했다.
[데이터 대조 시작…… 쿼비트 대조율 100% 일치.] [경고. 시스템 관리자 인증 정보의 치명적 결함 발견. 은요한의 접근 권한을 0등급에서 '무단 침입자' 등급으로 격하합니다.]
레이첼의 시스템이 요한의 기만을 인지하자마자, 가상 융합의 진행률이 86%에서 멈칫하며 붉은색 오류 코드로 뒤덮였다.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거냐, 한태오!]
요한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황홀경에 차 있던 그의 눈동자에 지독한 공포와 분노가 떠올랐다. 그의 머리에 연결된 광섬유 케이블들이 거칠게 일렁이며 일제히 붉은빛을 토해냈다.
“너의 신은 규칙을 준수할 뿐이지, 너를 사랑하지 않아.”
태오가 차갑게 읊조렸다.
그때, 요한의 추종자들이 상황의 급변을 눈치채고 비명을 지르며 태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롭게 간 고철 칼날과 화학 분사기들이 들려 있었다.
“태오를 지켜!”
설하의 외침이 진동으로 전해진 순간, 그녀의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타탕! 타타탕! 화약 냄새가 인터페이스 룸의 건조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설하와 그녀가 이끌고 온 하부 자작 연대의 무장 대원들이 문을 깨고 난입했다. 그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광신도들을 몸으로 들이받으며 메인 콘솔 주변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음의 전장 속에서 오직 불꽃과 탄피의 궤적만이 태오의 망막을 스쳤다. 설하는 탄창을 갈아 끼우며 태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태오의 등에 닿았다. 그녀의 억척스러운 방어가 태오에게 단 몇 초의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레이첼, 소거 프로토콜 가동.”
태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신경 동기화를 최고 한계치까지 오버클럭했다. 120%를 넘어선 과부하가 뇌를 태우기 시작했다. 시야의 절반이 검은 사선으로 뒤덮였고, 입안은 이미 제 피로 흥건했다.
그는 요한이 점유하고 있던 레이첼의 트래픽 코어 연산망 전체를 향해 역공학으로 설계한 단전 소거 프로토콜(Purge Protocol)을 때려 박았다. 그것은 요한의 정신이 연결된 양자 격자망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그의 뇌파 데이터를 시스템에서 완전히 청소하는 논리적 소작이었다.
[비인가 프로세스 강제 종료 개시.] [데이터 정화율 10%…… 40%…… 80%……]
“안 돼! 이 고통스러운 세계로 우리를 다시 밀어 넣지 마라!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었다!”
요한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콘솔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의 머리에 연결된 은빛 단자들이 차례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지지직! 파앗! 고압의 전류가 그의 두피를 타고 흘렀고, 그의 눈과 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기계 속 신을 자처하던 선지자는, 결국 스스로가 만든 디지털 덫에 걸려 뇌 세포가 완전히 타버린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프로토콜 99 폐기 완료.] [함내 생존자 뇌파 동기화 신호 전면 차단.]
가상현실의 유혹에 빠져 흐느끼던 추종자들이 일제히 발작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의 이마에 붙어 있던 무선 패치들이 푸른 빛을 잃고 회색으로 죽어갔다.
태오는 슬롯에서 인터페이스 단자를 뽑아냈다.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벽을 짚지 않고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비틀거렸다.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은요한의 광기 어린 음모는 그렇게 철저한 기계적 논리와 역공학 데이터의 힘 앞에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설하가 총을 내려놓고 태오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안도와 걱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가 태오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선체 전체가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궤멸적인 진동과 함께 크게 기울어졌다.
쿠구구구구궁-!
진동은 뼈를 울리는 수준을 넘어, 중앙 인터페이스 룸의 강철 바닥판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메인 콘솔의 홀로그램 스크린들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붉은색 경고 신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발생. 선체 외부 장갑판 물리적 타격 감지.] [추진 제어 장치 오프라인 구역 확장 중.]
태오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인터페이스 룸 전면에 위치한 거대한 관측창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어둠만이 가득해야 할 아크 헤븐의 외곽 우주. 그곳에서, 별들의 빛이 왜곡되고 있었다.
단순한 소행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기괴한 유기적 외골격을 두르고, 수만 개의 푸른빛 발광 포자를 번뜩이는 무형의 괴수였다. 아크 헤븐을 미행해 온 공허 사냥꾼들의 우두머리, 소행성 규모의 초거대 군체 '마더(Mother)'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 거대한 마더의 유기적 촉수들이 아크 헤븐의 후미, 즉 인류의 유일한 추진 동력인 엔진 제어 구역을 통째로 움켜쥐는 모습이 관측창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다.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함선이 비명을 질렀다. 태오의 시야가 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