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말이 없다. 그리하여 침묵은 우주의 가장 거대한 언어이자,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비다. 그러나 그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얇고 차가운 철판 한 장에 의지해 심연 위에 떠 있는지를 잔인하게 깨닫게 된다. 영혼이라는 것은 결국 이 가느다란 철판 안에서만 산소를 마시며 타오를 수 있는 미약한 불꽃에 불과하다. 불꽃이 꺼지면 남는 것은 영하 이백칠십도의 절대영도, 그리고 그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굶주린 존재들뿐이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며 울리는 고주파의 진동이 고막을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 키이이이이이익!
방금 전까지 강유준의 경비대와 대치하던 러스트 플랫의 좁은 격벽 통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환경 감시 센서들의 배선이 차례로 터져 나가며 노란 불꽃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비상 상황 발생.]
머릿속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고막을 거치지 않고 양자 수신 단자를 통해 직접 고압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평소의 차분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주파수가 미세하게 떨리는, 철저히 연산된 경고였다.
[외벽 센서 어레이 14번부터 28번까지 물리적 파손 확인. 선체 표면 외장에 부착된 유기체들의 열적 외피 반응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군체 형성 규모…… 현재 9,400개체 돌파. 연산 한계로 인해 정확한 수치 산출 불가능.]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러스트 플랫의 한 난민이 쇠망치를 떨어뜨리며 뒤로 자빠졌다.
강유준은 퇴각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소총을 다시 치켜들었으나, 그의 단단한 턱선마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방금 전의 기세를 잃은 채 서로의 등을 맞대고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상부 구역 연결 통로의 격벽이 전력 차단으로 잠겼습니다! 후퇴로가…… 후퇴로가 막혔습니다!”
부하의 비명 섞인 보고에 강유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쿵! 쿵! 쿵!
머리 위의 두꺼운 장갑판을 무언가 둔탁한 둔기로 내리치는 듯한 충격음이 이어졌다.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강철이 짓이겨지고, 산산조각이 나며, 분자 결합이 찢어지는 파괴의 소리였다. 아크 헤븐의 외벽을 구성하는 복합 티타늄 합금이 굶주린 이빨에 갉아 먹히고 있었다.
“태오 씨!”
서설하가 태오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녀의 거친 숨결이 태오의 뺨에 닿았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우측 시야는 이미 흐릿한 회색 연무로 뒤덮여 있었다. 방금 전 신경 동기화를 억지로 끊어낸 대가였다. 68%밖에 남지 않은 시야 속에서, 벽면의 용접선 틈새로 검붉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액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식인귀들이 흘리는 고농도의 산성 타액이었다.
치이이익!
용접된 철판이 무력하게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해골을 길게 늘여놓은 듯한 기괴한 외형의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구 가리개도 없는 칠흑의 눈구멍, 그리고 그 아래로 가스 밸브처럼 쉭쉭 소리를 내는 이빨들이 번뜩였다.
공허 사냥꾼이었다.
“전원 사격!”
강유준의 외침과 함께 경비대원들의 전자기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푸르스름한 플라즈마 탄환들이 어둠을 가르고 괴수의 대가리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놈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처럼,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격벽의 구멍을 더 넓게 찢어발기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부 거주구의 가느다란 가스 배관들이 놈들의 발톱에 걸려 끊어졌다. 메탄가스가 누출되며 사방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난민들의 비명과 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지옥도를 연출했다.
[제3구역의 산소 잔류량 41%로 급감. 생존 확률 최적화 연산에 의거, 러스트 플랫 전체 구역의 산소 공급 라인을 차단하고 외곽 격벽을 영구 폐쇄합니다.]
레이첼의 냉혹한 선언이 머릿속을 때렸다.
‘기다려, 레이첼.’
태오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안에는 아직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어. 격벽을 닫으면 저 인원이 전부 진공 속에서 질식사하거나 놈들의 먹이가 된다.’
[인류라는 물리적 정보의 보존 확률을 1.2% 향상시키기 위해, 현재 구역의 개체들은 포기하는 것이 cold-logic의 가치 판단에 부합합니다. 한태오, 당신의 감정적 저항은 연산 효율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기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실제로 복도 끝의 차단 벽이 무거운 기계음을 내며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태오는 이빨을 악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남들을 죽여야 했던 지구에서의 마지막 날이, 그 끔찍한 부채감이 가슴뼈를 바늘로 찌르듯 쑤셔왔다. 또다시 눈앞에서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소모품으로 던져 넣더라도, 이 방주를 정착지까지 끌고 가야 했다.
“지옥으로 가라, 빌어먹을 기계년.”
태오는 허리춤에서 다목적 정밀 렌치와 고전압 용접기를 쥔 채,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태오 씨! 어디 가는 거예요? 격벽이 닫히고 있어요!”
설하가 소리쳤지만 태오는 멈추지 않았다.
“동력로 냉각 파이프라인.”
태오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공학적 연산만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1화 전, 내가 이 구역의 시스템을 점검할 때 기록해 둔 로그가 있어. 동력로 2번 라인의 냉각 파이프라인에 만성적인 미세 균열이 발생해 냉각수가 누출되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걸 단순한 오차 범위 내의 누수로 판단하고 방치했지.”
태오가 벽면에 설치된 수동 바이패스 패널을 향해 다가갔다. 괴수 한 마리가 통로의 천장을 타고 그를 향해 도약했다.
“태오 씨, 조심해!”
그 순간, 설하가 품에서 붉은색 고열 조명탄을 꺼내 들고 괴수의 눈앞으로 던졌다.
화아아악!
강렬한 산소 연소열과 함께 눈이 멀 것 같은 붉은 섬광이 터져 나왔다. 빛과 열에 극도로 민감한 공허 사냥꾼이 비명을 지르며 방향을 잃고 허공을 휘저었다. 설하는 주저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경비대의 소총을 주워 들어 괴수의 드러난 목덜미에 탄창을 통째로 비워버렸다.
퍼억! 퍼어억!
괴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검은 액체를 쏟아냈다. 설하의 숨이 턱밑까지 가쁘게 차올랐지만, 그녀는 태오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조명탄을 추가로 터뜨렸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걸 해요! 귀가 먹든 눈이 멀든, 내가 당신 닻이 되어 줄 테니까!”
설하의 외침이 태오의 심장에 닿았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사치였다. 그는 패널의 나사를 렌치로 사정없이 풀어헤쳤다. 내부의 복잡한 광케이블과 고압 구리 도선들이 얽혀 있는 수동 밸브가 드러났다.
이 밸브는 농업 구역과 원자로를 연결하는 주배관 전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메인 시스템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 없는 봉인 장치였다.
‘레이첼. 강제 동기화(Ego-Sync)를 시작한다.’
[경고. 신경 동기화 활성화 시 뇌세포의 급격한 열화가 예상됩니다. 현재 잔존 감각 수치 위험 수준. 동기화를 강행할 경우, 우측 촉각 및 말초 신경계의 영구적 마비가 발생할 확률 94.7%.]
‘상관없어. 연결해.’
머릿속에서 무언가 퓨즈가 끊어지는 듯한 거친 소음이 일었다.
파지직!
태오의 척수를 타고 머릿속 양자 코어로 차가운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격통이 휘몰아쳤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을 잃고 투명하게 변했다. 세상의 소리가 일순간에 소거되었다. 설하의 외침도, 괴수들의 울부짖음도, 총성도 사라진 고요의 세계.
그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아크 헤븐의 신경망이 태오의 뇌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만 개의 파이프라인을 흐르는 유체의 점도, 벽면 강철판의 미세한 인장 응력, 그리고 저 멀리서 밀려오는 포식자들의 체온이 숫자의 나열이 되어 그의 흐릿한 시야에 입체 시뮬레이션으로 그려졌다.
태오는 보았다.
좌측 격벽 너머, 동력로의 심장부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질소 기반의 ‘초저온 순환 냉각 가스(Super-cooled Circulating Gas)’ 파이프라인을. 그 배관은 만성적인 미세 균열로 인해 안 그래도 압력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밸브 개방 한계점을 340%로 오버라이드한다.’
[연산 거부. 해당 조치는 동력로의 과열 위험을 초래합니다. 시스템의 안전 규정에 위배됩니다.]
‘그 안전 규정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야. 레이첼, 열역학 제2법칙을 무시하지 마라. 지금 방출하지 않으면, 이 구역이 뚫려 어차피 우주선 전체의 열 균형이 무너진다.’
태오는 뇌 신경을 채찍질하며 수동 밸브의 제어 칩에 자신의 뇌파를 동기화시켰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쇠의 차가운 질감이 서서히 멀어졌다. 마치 손가락이 모래로 변해 흩날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상실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지구의 기억 중 하나가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바스러져 갔다.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이었던가, 혹은 친구들과 함께 걷던 서울의 어느 골목길이었던가. 그 소중한 기억이 영구히 소멸하는 대가로, 기계의 잠금장치가 철컥거리며 풀렸다.
[오버라이드 승인. 냉각 루프 바이패스 밸브 개방.]
태오가 수동 레버를 온 힘을 다해 꺾었다.
- 쿠구구구구구궁!
벽면 깊은 곳에서 거대한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용접선 사이의 틈새와 찢어진 격벽 구멍으로, 영하 이백도에 달하는 초저온 냉각 가스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얗게 얼어붙은 안개가 순식간에 러스트 플랫 전체를 집어삼켰다.
“전원, 뒤로 물러나!”
강유준이 소리치며 대원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공격적으로 달려들던 공허 사냥꾼 무리가 냉각 가스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놈들의 유기적 외피는 우주의 진공에는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으나, 고압으로 분사되는 액체 가스의 급속 기화 열흡수 현상까지는 버틸 수 없었다.
가스가 놈들의 피부에 닿는 순간, 수분이 급격히 동결되며 부피가 팽창했다.
쩍! 쩍! 쩌적!
놈들의 단단한 등껍질과 관절 부위가 유리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가스 역학 계산에 따른 완벽한 물리적 냉각 기믹이었다. 태오는 동기화된 신경을 통해 가스의 흐름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괴수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으로 냉각 가스를 집중 분사했다.
“키에에에엑-!”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괴수들의 비명이 고요한 사방을 울렸다.
얼어붙은 괴수들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지옥의 포식자처럼 날뛰던 수백 마리의 공허 사냥꾼들이, 이제는 은빛 서리를 뒤집어쓴 채 기괴한 조각상이 되어 통로를 메웠다.
바람이 불자, 동결된 괴수의 사체가 가벼운 충격에도 모래성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바스스스…….
새하얀 얼음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는 괴수들의 잔해를 보며, 난민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경비대원들 역시 총을 내린 채 침을 삼켰다.
“해…… 해낸 건가?”
한 난민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태오는 밸브를 잠그고 패널에서 손을 떼었다.
스르륵.
그의 오른손이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채 허공에 덜렁거렸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으나, 뇌에서 보내는 신호는 손끝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소멸했다. 영구적인 촉각 상실. 얻어낸 승리의 대가는 가혹했다.
[현재 시야 확보율 61%. 우측 손의 말초 신경계 영구 마비 확인. 경고. 추가 동기화 시 생명 유지 장치의 치명적인 뇌사 유발이 우려됩니다.]
레이첼의 푸른 홀로그램 창이 차갑게 꺼졌다.
“태오 씨!”
설하가 달려와 그의 차가운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시각적으로 그녀의 손이 닿아 있음을 인지할 뿐이었다.
“괜찮아…….”
태오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메말라 있었다.
강유준은 얼어붙은 괴수들의 잔해와 태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경비대는 무너진 해치를 수습하고 조용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번 싸움으로 하부 구역의 봉쇄는 일시적으로 저지되었고, 난민들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태오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기계의 신경망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때였다.
- 삐이이-.
태오의 뇌 신경망에 연결된 잔류 주파수 속에서, 기이한 고주파 노이즈가 잡혔다.
그것은 공허 사냥꾼들의 소리도, 레이첼의 시스템 제어 신호도 아니었다. 아크 헤븐의 심장부인 중앙 엔진실의 통제권을 강제로 가로채려는, 고도로 암호화된 불법 바이오 전파 해킹 신호였다.
‘이 신호는…….’
태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신호의 발신지는 다름 아닌, 테크노 세력의 은요한이 있는 구역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