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벨페고르 성의 밤은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영지의 남쪽 국경을 에워싸고 뱀처럼 기어들려던 황실 기사단과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의 세작들을 일거에 소탕하기 위해, 루시안이 기획한 대규모 영지 수렵 대회는 그야말로 번개처럼 추진되었다. 황실에 보내는 공식 초청장에는 ‘오르쿠스 영지의 평화와 안전을 대외적으로 입증하기 위함’이라는 정중한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것이 서슬 퍼런 칼날을 감춘 비단보자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냥터로 지정된 검은 안개 계곡 초입에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들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천막들이 숲을 이루었다. 차가운 북풍이 계곡 사이를 날카롭게 훑고 지나갈 때마다 천막 깃발들이 파닥이며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숨을 죽인 바다처럼 사냥 캠프 전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살얼음판 같은 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마수 공작가의 전용 마차였다.

덜커덩거리는 마차의 진동 속에서, 헤이즐은 엉덩이 밑을 슬쩍 손으로 짚어 보았다. 푹신한 벨벳 시트 아래, 지난번 몰래 숨겨두었던 푸른 흡마석 조약돌이 단단하고 차가운 감각으로 만져졌다. 정령 가계부에서 포인트로 교환해 둔 그 신비로운 돌은, 마치 주인의 불안을 달래 주듯 미약하게 웅웅거리며 마차 내부의 탁한 공기를 은밀히 정화하고 있었다. 헤이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아직은 이 돌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우리 아기 요정님, 드디어 도착했단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데미안이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눈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평소의 피비린내 나는 검은 갑옷 대신, 헤이즐의 눈높이에 맞추어 특별히 제작된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연한 살구빛 튜닉을 입은 상태였다.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이었지만, 데미안의 얼굴에는 오직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만이 가득했다.

헤이즐은 앙증맞은 가죽 장화를 디디며 마차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헤이즐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사냥 캠프 한가운데에, 헤이즐의 몸집에 꼭 맞춘 미니 포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포니의 털은 은은한 크림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등 위에는 일곱 빛깔의 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귀여운 무지개 마구가 얹혀 있었다. 고삐에는 앙증맞은 민트색 벨벳 리본이 묶여 있어, 포니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새싹처럼 살랑거렸다.

“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그냥 영지 구석에 굴러다니던 흔한 조랑말일 뿐이니까. 네가 타고 싶다고 떼를 쓴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준비한 건 아니란 말이야.”

루시안이 붉어진 귀끝을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소매 깃에는 이미 포니의 갈기를 빗겨 주느라 묻은 크림빛 털들이 몇 가닥 붙어 있었다. 밤새도록 포니의 마구를 직접 점검했을 오빠의 츤데레 같은 모습에 헤이즐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우와……! 정말 예뻐요, 오빠! 아빠! 헤이즐이 이거 타도 돼요?”

헤이즐이 작은 손으로 포니의 콧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포니가 기분 좋은 듯 푸르르 소리를 내며 헤이즐의 뺨에 머리를 비벼 왔다. 그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던 데미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럼, 되고말고! 우리 요정님이 이 대회의 가장 아름다운 주인공이시란다.”

그러나 그 훈훈한 기류도 잠시, 사냥 캠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황실 기사단의 시선이 헤이즐에게 쏠렸다. 황실의 상징인 황금 사자 문장을 가슴에 새긴 기사들은, 벨페고르 가문이 이 험악한 검은 안개 계곡에 굳이 어린아이를 데려온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은 비웃음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리춤의 검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쇠붙이가 스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고 사냥터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데미안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실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안광은 방금 전의 다정한 아빠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마리의 마수를 도륙하고 전장을 피로 물들였던 벨페고르 공작의 본능이, 단 한 순간의 눈빛만으로 기사단의 숨통을 죄어왔다.

루시안 역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매가 기사단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누었다.

‘내 딸의 귓가에 쇳소리 하나라도 더 들리게 만드는 날엔,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이 계곡의 거름으로 주겠다.’

말 한마디 없었음에도, 공작가 부자의 살기 어린 침묵은 기사단 전원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공포를 흘려보냈다. 기사단장은 침을 꿀컥 삼키며 황급히 손을 검자루에서 떼어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헤이즐은 그들의 팽팽한 기싸움을 모르는 척, 포니의 고삐를 꼬물거리는 손가락으로 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이미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헤이즐! 큰일 났어, 큰일! 저기 북쪽 장벽 뒤에서 아주 고약하고 썩은 냄새가 나!

바람의 대정령 제피르가 보이지 않는 바람의 가닥이 되어 헤이즐의 귓가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원래 이 계곡에 살던 마수들이 아니야! 억지로 쇠사슬에 묶여서, 아주 매운 약물을 먹고 미쳐 날뛰는 냄새가 난다고! 엄청나게 많아!

헤이즐은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포니의 갈기를 만지는 척, 시야 한구석에 ‘정령 가계부’를 떠올렸다.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장부가 허공에 펼쳐지며, 영지의 실시간 마력 흐름을 보여주는 레이더망이 작동했다.

[경고: 북방 장벽 일대에 수백 마리의 비공식 마수 무리 감지.] [상태: 인위적인 연금술 촉진제로 인한 폭주 상태.] [위험도: 상(上)]

‘검은 안개 계곡 아래에 숨겨진 유물을 이용해 마수를 폭주시키려는 짓이구나.’

바르톨로와 황실 기사단 놈들이 공작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미리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수백 마리의 폭주한 마수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리 강한 벨페고르 가문이라 할지라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틈을 타 공작가를 ‘마수를 통제하지 못해 제국을 위험에 빠뜨린 반역 가문’으로 몰고 가려는 음모였다.

하지만 헤이즐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완벽한 가계부 계산기가 두드려지고 있었다.

“아빠, 오빠! 헤이즐이 이 예쁜 장난감으로 시작 신호를 보내도 돼요?”

헤이즐이 가리킨 것은 사냥 대회 시작을 알리는 신호용 마법 발포 장치였다. 연분홍빛 꽃가루가 터져 나오도록 설계된, 벨페고르 성의 기술자들이 오직 헤이즐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무해한 물건이었다.

“물론이지, 우리 아기. 네가 신호를 내리면 이 아빠가 저 숲속의 모든 사냥감을 네 발아래에 바치마.”

데미안이 다시 목소리를 얇게 짜내며 하트를 그려 보였다. 루시안은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헤이즐의 손을 잡아 발포 장치의 손잡이에 얹어 주었다.

“자, 여기를 가볍게 당기면 돼.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네!”

헤이즐이 수줍게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팡!*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연분홍빛 장미 꽃가루가 아름다운 불꽃처럼 수놓아졌다. 캠프에 모인 영지민들과 귀족들이 그 사랑스러운 광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역시 벨페고르의 아기 요정님이셔. 신호탄마저 저렇게 눈부시고 아름답다니!”

그러나 그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속 깊은 곳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구!*

검붉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폭주한 마수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계곡 입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침을 흘리며 눈이 붉게 뒤집힌 멧돼지 형상의 마수들과 칼날 같은 발톱을 세운 늑대들이 계곡을 가득 메웠다.

“마, 마수들의 대규모 폭주다!” “기사단, 방어 대형을 구축하라!”

황실 기사단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들이 뒤에서 꾸민 음모치고는 그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헤이즐이 서 있는 텐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벨페고르 가문의 무사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감히 우리 아기 요정님의 꽃밭을 망치려 들다니.”

데미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대검이 검은 마력을 뿜어내며 허공을 갈랐다.

*스파앗!*

단 한 번의 검격에 휘둘린 검은 검기가 돌진하던 마수 수십 마리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헤이즐의 눈앞에는 이미 루시안이 재빠르게 펼쳐 든 연분홍빛 실크 우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더러운 건 보지 마, 헤이즐.”

루시안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 송곳들이 공중을 날아다니던 비행 마수들의 날개를 정확히 관통해 바닥으로 처박았다.

벨페고르의 기사들은 마치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효율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마수들을 도륙해 나갔다. 사냥터는 순식간에 마수들의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했다.

“이, 이게 무슨…….”

황실 기사단장은 검을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학살극에 입을 떡 벌렸다. 자신들이 가문을 옭아매기 위해 준비한 ‘폭주 마수’들이, 벨페고르 가문에게는 그저 사소한 사냥감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연 벨페고르 가문이다! 요정님의 수줍은 발포 신호에 맞추어, 마수들이 스스로 목을 바치러 기어 나오는구나!” “공작가의 무력은 진정 제국 최강이로다!”

캠프를 지켜보던 영지민들과 귀족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단이 꾸민 음모는, 벨페고르 가문의 압도적인 무력과 헤이즐의 사랑스러운 시작 선언 덕분에 오히려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최고의 축제로 둔갑해 버렸다.

헤이즐은 우산 뒤에서 눈을 반짝이며 가계부의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정령들이 마수들의 정화된 영혼을 흡수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포인트 적립 완료: +500 FP] [현재 잔액: 1,200 FP]

‘완벽해. 이 정도면 오빠와 아빠의 힘을 빌려 영지를 완전히 흑자로 돌릴 수 있겠어.’

헤이즐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가계부 창을 닫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냥터 전체를 감싸고 있던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람의 정령 제피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헤이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헤이즐! 위험해! 땅속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게 올라오고 있어! 이건 그냥 마수가 아니야!

*쿠르릉!*

대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데미안이 진두지휘하고 있던 중앙 전진 지휘소 바로 아래의 땅바닥이 거대하게 솟구쳤다.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몸이 시커먼 타르와 초록색 독액으로 뒤덮인 거대한 돌덩어리들이었다. 사악한 연금술로 인위적으로 변이된 고대 맹독 골렘이 숨죽였던 아빠 데미안의 중앙 전진 지휘소를 기습 맹격한 것이다.

“아빠……!”

헤이즐의 비명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 속에 묻혔다. 골렘이 뿜어내기 시작한 짙은 초록색의 맹독 안개가 순식간에 데미안과 루시안이 서 있던 자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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