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스스…….
참나무 고목의 기괴한 틈새에서 피어난 보라색 마수 독가스 장벽이 마침내 데미안의 선발 수색 대열 전방을 차단했다.
라벤더빛을 띤 불길한 안개는 끈적한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순식간에 거대한 벽을 이루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폐포가 타들어 갈 듯한 지독한 악취가 숲의 맑은 향기를 잠식해 들어갔다.
“주군! 마수 독가스 장벽입니다! 더 전진하면 기사들의 마력 회로가 오염됩니다!”
최전방에 서 있던 부단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철갑 투구 틈새로 비치는 눈망울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데미안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저 거친 독안개를 쌍도끼로 찢어발기며 돌진했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품에는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소중한 솜사탕 같은 아기, 헤이즐이 안겨 있었다.
‘안 돼. 내 몸에 묻은 피비린내도 겨우 지웠는데, 이런 끔찍한 독안개를 우리 요정님께 보여 줄 수는 없다!’
데미안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험악한 전사의 얼굴에 어설픈 미소가 들어차자 기묘한 괴리감이 풍겼다. 그는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내며 헤이즐의 귀를 막아 주었다.
“어머나, 헤이즐. 저기 좀 보렴? 숲속의 요정들이 아주 예쁜 보랏빛 파티를 열었나 보구나. 하지만 조금 매운 연기일 수 있으니, 착한 아기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단다.”
“웅……? 예쁜 보랏빛 파티이……?”
헤이즐은 둥근 눈을 깜빡이며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는 세상 무해한 아기처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헤이즐의 속마음은 이미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예쁜 파티는 무슨! 저거 들이마시면 마력이 폭주해서 피 토하는 맹독이잖아!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무서운 모습을 안 보여 주려고 저러는 건 알겠는데…… 이대로 놔두면 가문의 기사들이 전부 쓰러질 거야!’
헤이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벨페고르 공작가에 입양된 이후, 가문 사람들은 늘 그녀를 ‘금지옥엽 요정님’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 지극한 호의는 심각한 애정결핍을 앓고 있는 헤이즐에게 너무나 달콤한 동시에, 엄청난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시는데, 내가 아무 쓸모도 없이 쫓겨나면 안 돼. 이 빚을 갚아야 해. 내가 이 독가스를 해결해서 가문을 지켜야만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 있어!’
착한 아이 증후군이 발동한 헤이즐의 머릿속에 투명한 시스템 창이 번쩍 떠올랐다.
[정령 가계부] - 현재 보유 포인트: 420p (하급 정화의 기적 지출 후 남은 잔액) - 가용 기적: [미풍의 장난 (소모 포인트: 300p)]
포인트는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독가스 장벽은 이미 기사들의 방독면 필터를 녹여 버릴 기세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기사들이 허둥지둥 가방을 뒤지며 정화 마법석을 꺼내려 했지만, 고위 마수의 독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후우…….”
헤이즐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아빠아, 헤이주리가 후웅- 하면 매운 안개 다 날아갈 거야!”
데미안과 루시안이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헤이즐은 통통한 뺨을 한껏 부풀리더니, 참나무 고목을 향해 앙증맞게 바람을 불었다.
“후우우-!”
[가계부 발주: 미풍의 장난 - 바람 정령 소환!] [대가 지출: 300p 소모.]
순간, 헤이즐의 심장 깊은 곳에서 따스한 온기가 가계부의 수치와 맞바뀌며 빠져나갔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손끝이 잠시 싸늘하게 식었지만, 헤이즐은 주머니 속의 낡은 돌멩이를 꼭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들키면 쫓겨나니까.
그때였다.
- 뾰롱!
아기 콧바람 소리와 함께, 숲속의 고요를 깨고 엄청난 규모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돌풍이 아니었다. 살구빛 햇살을 가득 머금은 상큼하고 따스한 봄바람이었다.
쉬이이이익-!
“……?! 이, 이 바람은 뭐지?”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나운 독가스 장벽을 향해 불어닥친 봄바람은, 독소를 밀어내는 것을 넘어 아예 ‘치환’하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기괴하게 일렁이던 보랏빛 장벽이 바람에 닿는 순간, 퐁, 퐁, 포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사한 노란 민들레 꽃씨로 변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하늘, 숲속 전체에 연분홍빛 꽃가루와 살구빛 민들레 꽃씨가 눈송이처럼 아름답게 흩날렸다.
방독면을 쓰려던 기사들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들의 코끝으로 매캐한 독가스 대신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독, 독소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정화 마법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독성이 아예 꽃가루로 바뀌었어! 이건 기적이다!”
기사들이 감격에 겨워 웅성거렸다.
데미안은 멍하니 날아다니는 민들레 꽃씨를 바라보다가, 품에 안긴 헤이즐을 내려다보았다. 헤이즐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웅! 헤이주리가 후- 하니까 예쁜 꽃이 되었어!”
데미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아, 대자연마저 우리 아기 요정님의 무해함과 순수함에 감동하여 독가스를 꽃씨로 가꾸어 준 것이로구나! 이 얼마나 성스럽고 가녀린 존재인가!’
루시안 역시 귀 끝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흥, 우연치고는 아주 신기한 바람이군. 날씨가 헤이즐 너를 돕는 모양이야.”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루시안의 손은 헤이즐의 머리칼에 묻은 살구빛 꽃가루를 조심스레 털어 주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헤이즐은 속으로 땀을 흘렸다.
‘휴우, 다행히 들키지 않았어. 그냥 날씨 탓으로 믿어 줘서 고마워요, 아빠, 오빠!’
그러나 안심한 것도 잠시, 헤이즐의 귓가에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키킥, 웃기는 인간들이네. 저게 날씨 탓이라고?
헤이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보랏빛 독가스가 걷힌 거대한 참나무 고목의 밑동 틈새. 그곳에 연한 민트빛 털을 몽실몽실하게 부풀린 기묘한 생명체가 앉아 있었다.
몸집은 조그만 아기 고양이만 한데, 등 뒤에는 투명한 잠자리 날개가 달려 있고, 꼬리는 다람쥐처럼 풍성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털이 많은 뚱뚱한 들쥐’나 ‘덩치 큰 산새’로 보이겠지만, 헤이즐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바람의 정령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하급 정령이 아닌, 대기를 다스리는 상급 정령, 제피르였다.
제피르는 쪼르르 달려와 헤이즐의 유모차 바퀴 옆에 부딪히듯 멈추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 음~! 이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는 뭐지? 네가 방금 가계부 포인트를 쓴 정령사구나?
헤이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앗, 들키면 안 되는데!’
헤이즐은 데미안의 눈치를 살피며, 제피르에게만 들리도록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해! 나 정령사인 거 들키면 여기서 쫓겨난단 말이야.”
- 뭐어? 쫓겨나? 이 바보 같은 인간들이 너 같은 정령사를 쫓아낸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너, 아주 맛있는 냄새를 풍기네. 나 배고파. 맛있는 거 줘!
제피르가 몽실몽실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헤이즐은 곤란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정령들은 정령사의 ‘따뜻한 감정’이나 가계부 포인트를 최고의 간식으로 여긴다. 제피르의 눈은 이미 헤이즐의 주머니 속에 있는 가계부의 기운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제피르가 꼬리를 흔들다가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참나무 밑동의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녀석의 예쁜 민트빛 꼬리털이 엉켜 버린 것이다.
- 아야야! 꼬리가 끼었어! 아파, 아프다고! 이것 좀 풀어줘, 정령사!
제피르가 바둥거리며 웅얼거렸다.
헤이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데미안과 루시안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끙끙 앓는 제피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착한 아이 증후군은 동물이나 정령의 아픔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빠아, 저기 뚱뚱한 들쥐가 가시에 걸려쪄요. 헤이주리가 도와주고 시포요.”
헤이즐이 덤불 속에 낀 제피르를 가리켰다.
데미안은 헤이즐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저 털이 북슬북슬한 이상한 들쥐 한 마리가 덤불에 끼어 버둥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오, 저런. 더러운 들쥐로구나. 아빠가 당장 도끼로 쪼개 버릴까, 헤이즐?”
“안 돼요! 쪼개면 안 돼!”
헤이즐이 깜짝 놀라 데미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헤이주리가 아야 하는 거 도와줄래요. 앙대요?”
촉촉하게 젖은 밤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빛나자, 데미안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끄윽……! 앙대지 않단다, 내 아기 요정님. 네 뜻대로 하려무나.”
헤이즐은 조심스럽게 유모차에서 내려와 참나무 밑동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피르의 꼬리에 엉킨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떼어 내기 시작했다.
가시에 찔려 아플 법도 한데, 헤이즐은 오직 제피르가 다치지 않게 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프지 마아, 착하지…….”
소곤거리는 헤이즐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따뜻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르륵.
마침내 가시덤불이 풀려나고 제피르의 꼬리가 자유로워졌다.
그 순간, 헤이즐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순수한 안도감과 기쁨이 흘러넘쳤다.
[시스템: 진심 어린 기쁨과 안도감으로 ‘따뜻한 감정’이 급증합니다!] [임시 충전 포인트: +500p] [현재 총 보유 포인트: 620p]
제피르는 자유로워진 꼬리를 흔들며 헤이즐의 손바닥에 부드러운 머리를 비벼댔다.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연한 민트빛 마력이 헤이즐의 손끝을 감쌌다.
- 우와아! 정말 따뜻하고 맛있는 감정이야! 마음에 들었어, 꼬마 정령사!
제피르는 입을 크게 벌려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가계부의 기운을 한 입 꿀꺽 삼키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트림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떼어내 헤이즐의 손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것은 금이 가 있는, 하지만 은은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낡은 조각석이었다.
이전에 헤이즐이 임시로 쥐고 있던 평범한 돌멩이가, 바람의 대정령 제피르의 진정한 축복을 받아 소통의 증표인 ‘바람 조각석’으로 완벽히 각성한 순간이었다.
- 이건 내 징표야. 힘들 때 그걸 쥐고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언제든 바람을 몰고 달려올게!
[시스템: 바람의 대정령 ‘제피르’와의 소통 계약 성공!] [정령 가계부에 ‘풍속 제어 및 대기 정화 기능’이 정식 등록됩니다!] [영지 배후 정화 경영이 2단계로 도약합니다!] - 새로운 기적 잠금 해제: [제피르의 숨결 - 광범위 대기 정화 (소모 포인트: 800p)]
머릿속에 울리는 웅장한 시스템 알림음에 헤이즐은 눈을 크게 떴다.
‘정화 경영 2단계……! 이제 더 넓은 범위의 독소도 은밀하게 정화할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기적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순간적으로 계약을 맺으며 소모된 마력과 온기 때문에, 헤이즐의 작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손끝이 서서히 유리처럼 투명하게 변해가려 했다.
헤이즐은 급히 제피르가 준 바람 조각석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고 꼭 쥐었다. 조각석에서 흘러나오는 훈훈한 미풍이 온몸의 한기를 몰아내며 투명화를 막아 주었다.
“헤이즐? 왜 그러느냐? 몸이 차갑구나.”
데미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헤이즐을 안아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헤이즐의 뺨을 감싸 쥐었다.
“웅, 조금 바람이 불어서 그래요. 하지만 헤이주리는 아빠 품에 있어서 따뜻해요!”
헤이즐은 활짝 웃으며 데미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데미안은 딸의 애교에 완전히 녹아내려, 방금 전의 기이한 돌풍이나 들쥐의 정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그래. 우리 요정님이 추우면 안 되지. 당장 성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코코아를 끓여 주마!”
루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지만, 그의 눈길 역시 헤이즐의 주머니 쪽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그 들쥐…… 아니, 그 생명체가 주고 간 돌멩이는 뭐지? 헤이즐에게 해가 되는 물건은 아니겠지?’
루시안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헤이즐이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기에 차마 뺏어 들지는 못했다. 가문의 기사들은 마수 독가스가 완전히 사라진 청명한 숲을 보며, 벨페고르 가문에 드디어 신의 축복이 내린 것이라며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그렇게 서부 숲의 오염원 수색은 헤이즐의 은밀한 활약 덕분에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
그날 저녁.
벨페고르 성의 집무실은 가라앉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 동안 헤이즐 앞에서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분홍빛 망토를 걸치고 있던 데미안과 루시안은, 이제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본래의 냉혹한 전사로 돌아와 있었다.
탁-!
루시안이 책상 위에 두꺼운 가죽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의 차가운 벽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버지, 남쪽 국경 수비대에서 긴급 전령이 왔습니다.”
데미안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수를 도륙하던 차갑고 잔혹한 공작의 눈빛이 살아나 있었다.
“황실 놈들이 움직였나 보군.”
“예. 황실 기사단이 오르쿠스 영지의 남쪽 국경 인근에서 훈련을 핑계로 결집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무력시위라고 하지만, 실상은 영지 내부의 정화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도입니다.”
루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특히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가 황실 기사단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자는 우리 영지가 갑자기 풍요로워진 비결이 ‘이단적인 힘’이나 ‘금지된 정령술’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국경을 침탈해 영지를 강제 압수수색하려 할 겁니다.”
바르톨로 가스외르.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탐욕스러운 성직자이자 정치가. 그가 이끄는 이단 심문관들이 오르쿠스 영지에 들이닥친다면, 헤이즐의 존재 역시 위험해질 것이 자명했다.
헤이즐이 정령사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 바르톨로는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에 세우려 할 터였다.
데미안의 손아귀에서 펜이 빠각,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감히…… 내 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는 놈들은 전부 마수의 먹이로 던져 버릴 것이다.”
“물리적인 충돌은 황실에 선전포고를 하는 꼴이 됩니다.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우리 국경을 함부로 넘지 못하게 만들면서도, 바르톨로의 의심을 원천 차단할 명분이.”
루시안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정교한 계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수렵 대회를 기획하는 겁니다.”
루시안이 지도 위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 위치는 바로 황실 기사단이 대치하고 있는 남쪽 국경 인근의 ‘검은 안개 계곡’이었다.
“제국의 모든 명문가와 황실 기사단까지 공식 초청하는 대규모 영지 수렵 대회입니다. 우리 영지가 마수와 독가스로 가득 찬 황무지가 아니라, 통제 가능한 풍요로운 사냥터임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겁니다. 동시에, 대회장이라는 명목 하에 합법적으로 가문의 정예 병력을 국경에 배치할 수 있습니다.”
데미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오, 황실 기사단 놈들의 코앞에서 우리의 무력을 과시하고, 감히 국경을 넘볼 생각조차 못 하게 밟아 주겠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렵 대회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든, 우리 영지 안에서는 우리가 지배자입니다.”
루시안은 서랍을 열어 낡은 양장본 책을 꺼냈다.
그 책의 표지에는 ‘동생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는 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지만, 루시안이 펼친 페이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것은 벨페고르 가문이 대대로 숨겨온, 마수를 폭주시키는 고대 유물의 위치가 적힌 비밀 지도였다.
루시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바르톨로가 감히 수렵 대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은 그자의 무덤이 될 겁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철저한 계획 이면에, 이미 정령 가계부를 2단계로 각성시킨 꼬마 실세 헤이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수렵 대회가 영지의 배후 경영자로서 헤이즐이 공식적으로 첫발을 내딛는 거대한 무대가 되리라는 사실을.
바람의 대정령 제피르의 징표를 쥔 헤이즐이, 가문을 노리는 사악한 음모를 어떻게 되받아쳐 줄 것인가.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오르쿠스 영지의 밤하늘을 조용히 뒤덮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