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키키킥! 크아아아아!”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솟구친 고대 맹독 골렘은 온통 시커먼 타르와 걸쭉한 초록색 독액을 사방으로 거칠게 뿜어냈다. 사악한 연금술로 변이된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데미안과 루시안이 서 있던 중앙 전진 지휘소를 기습 맹격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빠! 오빠!”

헤이즐의 동그란 눈망울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짙은 초록색의 맹독 안개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훅 끼쳐오는 지독한 악취에 민트색 리본을 묶은 은은한 크림빛 포니가 앞다리를 높이 들며 거칠게 울부짖었다. 포니의 갈기가 거친 바람에 흩날리며 헤이즐의 뺨을 간지럽혔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감각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축제를 즐기던 영지민들과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공작 전하! 소공작 전하!” “이, 이 독기는 대체…… 닿기만 해도 살이 녹아내릴 것 같습니다!”

황실 기사단원들이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비겁한 눈동자 너머로, 자신들이 몰래 꾸민 음모가 성공했다는 음험한 쾌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헤이즐은 똑똑히 목격했다. 황실 기사단이 검은 안개 계곡 아래의 유물과 사악한 연금술 촉진제를 사용해 폭주시킨 고대 맹독 골렘. 그것은 벨페고르 가문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 준비된 끔찍한 쐐기였다.

독안개 속에서 데미안의 화사한 연한 살구빛 튜닉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헤이즐의 눈높이에 맞추어 입은 그 부드러운 옷자락이 독기에 상하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헤이즐이 있는 방향을 향해 검을 치켜세웠다.

“루시안! 헤이즐을 데리고 뒤로 물러서라!”

데미안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렸지만, 평소 헤이즐 앞에서 억지로 얇게 짜내던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짐승 같은 저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괴물 같은 본래의 목소리를 내어 헤이즐이 겁을 먹을까 봐, 검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루시안 역시 이를 악물며 연분홍빛 실크 우산을 넓게 펼쳤다. 그는 헤이즐을 향해 날아오는 미세한 독기 가루를 우산으로라도 막아보려는 듯, 온몸으로 헤이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바보같이 가만히 서 있지 마! 얼른 내 뒤로 숨어!”

루시안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서툰 책임감과 초조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이즐은 알고 있었다. 저 시커먼 골렘이 뿜어내는 맹독은 단순한 무력으로 베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지를 오염시키고 생명을 좀먹는 저주받은 독기. 저것을 정화하지 못하면 아빠와 오빠는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나는 이 가문을 지키고, 내 따뜻한 보금자리를 지킬 거야!’

헤이즐은 가슴속 구석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는 ‘착한 아이 증후군’의 촉수를 느꼈다. 또다시 버림받지 않으려면, 이 가문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비록 타인의 호의를 부채로 여기는 방어적인 마음일지라도, 지금의 헤이즐에게는 그것이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헤이즐은 은밀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품속에 숨겨둔 무형의 장부를 불러냈다.

‘정령 가계부, 가동!’

*띠링!*

헤이즐의 시야에만 보이는 투명한 레몬빛 홀로그램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보유 포인트: 1,200 FP] [경고: 고대 맹독 골렘의 독기는 일반적인 정화 마법으로 완전히 소멸시키기 어렵습니다. 특수한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헤이즐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매개체라면…… 이미 준비해 뒀어!’

지난 4화에서 가계부 상점을 통해 바짝 모은 포인트로 교환해 두었던 ‘푸른 흡마석 조약돌’. 헤이즐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데미안이 타고 다니는 공작 전용 마차의 푹신한 시트 아래 깊숙한 곳에 그 조약돌을 숨겨 두었었다. 마차는 지금 바로 지휘소 옆, 골렘의 발치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차해 있었다.

헤이즐은 눈을 감고 마차 방향으로 작은 손을 뻗었다.

‘흡마석에 깃든 정령들이여, 내 목소리를 들어줘. 마차 밑에 잠든 푸른 조약돌의 정화 수치를 최대치로 활성화해 줘!’

[기적 발주: 푸른 흡마석의 광역 정화 필드 전개] [소모 포인트: 700 FP] [현재 잔액: 500 FP] [⚠️ 경고: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거, 기적을 결제하기 위해 계약자의 진심 어린 ‘따뜻한 감정(행복, 기쁨)’ 40%를 소모합니다. 무리한 인출 시 급격한 체온 저하 및 신체 투명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슴속에서 몽실몽실하게 피어나던, 아빠가 입혀준 살구빛 옷을 보며 느꼈던 기쁨과 오빠가 선물해 준 크림빛 포니를 보며 품었던 따뜻한 행복감이 순식간에 진공청소기로 빨려 나가듯 사라졌다.

“아…….”

헤이즐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손끝을 내려다보니, 마치 맑은 유리 조각처럼 피부가 서서히 투명해지며 뒷배경의 풀밭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시리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혹독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헤이즐! 안 돼! 너무 무리하게 감정을 소모하고 있어! 몸이 사라지려고 하잖아!

머리맡에서 바람의 정령 제피르가 파스텔톤의 연두빛 날개를 파닥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헤이즐은 이를 앙다물었다. 투명해져 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기적의 실행을 강행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아빠와 오빠가 다치는 것보다는 백배 나아!’

그 순간, 지휘소 옆에 세워져 있던 공작 전용 마차 밑바닥에서 말도 안 되게 거대하고 영롱한 푸른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쏟아부은 듯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하늘색과 파스텔톤의 민트빛이 뒤섞인 정화의 파도였다.

“이, 이게 무슨 빛이냐!” “마차에서 빛이 난다!”

기사들이 경악하며 눈을 가렸다. 마차 시트 아래에서 솟구쳐 오른 푸른 흡마석 조약돌은 공중으로 떠올라, 마치 거대한 태양처럼 사방으로 정화의 에너지를 방사하기 시작했다.

골렘이 뿜어내던 지독한 초록색 맹독 가스가 그 푸른빛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중화되어 향기로운 솔잎 냄새를 풍기는 하얀 안개로 변해갔다. 독기가 정화되며 사방의 대지가 오히려 푸른 잔디로 뒤덮이는 기적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크아아악! 크륵, 끄아아!”

골렘은 자신을 둘러싼 정화의 빛에 괴로워하며 거대한 몸을 뒤틀었다. 녀석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붉고 초록빛으로 기괴하게 빛나던 맹독 동력원이자 코어가 훤히러 드러났다. 조약돌의 정화 에너지가 골렘의 가장 깊숙한 핵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몸이 극도로 차가워진 헤이즐은 온몸을 덜덜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코끝이 찡해지며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헤이즐!”

데미안이 독안개가 걷힌 것을 보고 황급히 헤이즐을 향해 달려왔다. 루시안 역시 연분홍빛 우산을 던져두고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한계에 달한 헤이즐의 입에서 아주 작고 가녀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에, 에취……!”

그것은 솜털처럼 가볍고, 아기 요정의 날갯짓처럼 수줍은 재채기였다.

그러나 그 기침 소리가 정화 필드의 파동과 공명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콰르릉! 쩌저적!*

천지를 뒤흔들며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던 거대한 고대 맹독 골렘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코어가, 헤이즐의 기침 소리에 맞추어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작살나 버린 것이다.

“……어?”

누군가가 멍하니 내뱉은 신음이었다.

동력원을 잃은 거대한 돌더미 괴물은, 단 한 걸음도 더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마치 뜨거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혹은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벚꽃 가루처럼 스르륵 부스러지며 허공으로 분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악하고 포악하던 괴물의 형체는 온데간데없고, 사냥터에는 오직 은은한 레몬 향기와 함께 파스텔톤의 분홍빛 꽃가루만이 비처럼 감미롭게 내릴 뿐이었다.

정적이 사냥터를 지배했다.

황실 기사단장은 검을 쥔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고, 영지민들과 귀족들은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요정님이…… 우리 아기 요정님이 기침을 한 번 하시자마자, 저 무시무시한 골렘이 녹아내렸어!” “오오, 대자연의 군주이시여! 요정님의 성스러운 재채기 한 번에 마수의 저주가 정화되었다!”

순식간에 사냥터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헤이즐을 향해 경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벨페고르의 기사들조차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도끼와 검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헤이즐은 그 환호성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감정을 무리하게 기적의 대가로 지불한 탓에, 전신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가락 끝은 여전히 반쯤 투명한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몸이 정령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으우…… 추워요…….”

헤이즐이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헤이즐!”

데미안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헤이즐을 안아 올렸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품등은 평소처럼 따뜻했으나, 헤이즐의 체온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수준을 한참 밑돌고 있었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루시안! 마차에 있는 담요란 담요는 전부 가져와라! 어서!”

데미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전장에서 수천의 적을 벨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철혈의 공작이, 지금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 내가 가져올게!”

루시안이 헐떡이며 마차로 달려가 부드러운 거위 털과 분홍빛 양모로 가득 찬 솜털 이불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헤이즐을 솜털 이불로 꽁꽁 싸매어 마치 동글동글한 누에고치처럼 만들었다. 데미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따뜻한 살구빛 튜닉 자락으로 이불 겉을 한 번 더 감싸 안았다.

“추워, 흐으…….”

헤이즐이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내민 채 웅얼거렸다. 차가운 한기 속에서도 아빠와 오빠의 지극한 사랑과 온기가 전해지자, 가계부로 소실되었던 행복감이 아주 미세하게 복구되기 시작했다. 투명해지던 손끝에 다시 붉은 핏기가 돌았다.

“이게 다 저 썩을 황실 놈들이 요정님을 놀라게 해서 그렇다! 감히 우리 아기 요정님께 감기를 옮기다니!” “맞습니다! 저 비겁한 기사단 놈들의 목을 당장 쳐야 합니다!”

공작가의 전사들이 이마에 힘줄을 세우며 거친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헤이즐이 겁먹을까 봐 억지로 입고 있던 분홍빛 스웨터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거친 살기를 뿜어냈다.

“모두 조용히 해라. 헤이즐이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한다.”

데미안이 나직하게 경고하자, 사방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데미안은 이불에 싸인 헤이즐을 품에 꼭 안은 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눈빛으로 속삭였다.

“괜찮단다, 내 아기 요정님. 아빠가 여기 있으니 이제 아무 걱정 말거라. 감기 기운 따위는 이 아빠가 전부 쫓아내 줄 테니.”

루시안 역시 슬그머니 다가와 헤이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이마의 열을 짚어보는 몸짓은 어설펐지만 깊은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흥, 딱히 걱정돼서 이러는 건 아냐. 그냥…… 네가 아프면 시끄러우니까 그렇지.”

루시안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손가락은 헤이즐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리고 있었다.

헤이즐은 이불 속에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비록 가계부의 페널티로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자신을 이토록 소중하게 여겨주는 진짜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다행이야. 이번에도 무사히 지켜냈어.’

영지민들이 요정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축제의 음식을 가져오고, 분위기가 다시금 훈훈한 힐링의 장으로 돌아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냥터 외곽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 하나가 사색이 되어 달려와 대지 위에 엎어졌다.

“공, 공작 전하! 큰일났습니다!”

취해 있던 축제의 온기가 그 비명 한 번에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데미안의 눈매가 순식간에 가차 없는 포식자의 그것으로 번뜩였다.

“무슨 일이냐.”

“영지 관문 너머에서…… 이단 심문소의 깃발이 보입니다! 피의 사명을 띤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 가스외르 경의 암흑 군마들이 지금 영지 관문을 밟고 성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자, 사냥터에 있던 귀족들과 기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정령사와 이단을 처단한다는 구실로 수많은 가문을 몰락시켜 온 악명 높은 심문관. 그가 마수 폭주 음모가 실패하자마자 직접 벨페고르 영지를 짓밟기 위해 당도한 것이다.

헤이즐은 품속에서 서서히 굳어가는 아빠와 오빠의 몸짓을 느끼며, 이불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새로운 위기가, 더 거대한 폭풍우가 벨페고르 공작가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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