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정원의 연분홍빛 장미 꽃잎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방금 전까지 살구빛 튤립과 민트빛 잔디 위를 수놓던 평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졌다. 대기를 가득 메운 것은 콧등을 찌르는 퀴퀴한 탄내와, 썩은 늪지대에서나 풍길 법한 끈적한 마력의 잔해였다.

하늘은 마치 검붉은 먹구름 이불을 억지로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사시사철 메마른 바람만 불어닥치던 북부 서부 참나무 숲의 거대한 암흑 마수성 폭풍이 성벽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대장! 온다! 저건 그냥 바람이 아니야! 땅속 깊은 곳까지 썩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저주라고!”

헤이즐의 퐁당포실한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든 바람의 정령 제피르가 웅얼거리며 몸을 떨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는 간데없고,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고양이처럼 바르르 떨리는 울림만이 헤이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데미안의 커다란 손이 헤이즐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서부 참나무 숲을 향해 냉혹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군.”

그의 목소리는 평소 헤이즐 앞에서의 억지스러운 하이톤이 아니었다. 전장을 지배하는 피비린내 나는 군주의 진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데미안은 품 안의 헤이즐이 제 살기에 놀라 울음을 터뜨릴까 봐, 급히 안면 근육을 우그러뜨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늘게 쥐어짜 낸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아, 아기 요정님? 방금 그건 아빠가 목청을 가다듬느라 큼큼, 소리를 낸 거란다. 저 하늘의 검은 구름은 아주 커다랗고 맛있는 초콜릿 구름이 틀림없어!”

“마, 맞다! 초콜릿 구름이다! 저기서 단물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얼른 성안으로 피하자!”

루시안 역시 머리에 묻은 장미 가시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헤이즐은 그들의 어설픈 연극에 속아 줄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 투명하게 떠오른 ‘정령 가계부’의 장부가 붉은색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 서부 참나무 숲의 오염도가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영지 토양 오염률: 78%] [경고: 대지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면 정령들의 거처가 파괴되며, 가계부의 모든 호감 포인트가 소멸합니다!]

‘포인트 소멸이라고? 내 피 같은 포인트가?!’

헤이즐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떻게 모은 포인트인데, 저 무식한 마수 폭풍 때문에 한순간에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영지는 헤이즐이 앞으로 평생 정착하고 싶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해롭지 않은 ‘스위트 홈’이 되어야 했다.

내 집 마당이 썩어가는데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는 법이었다.

“아빠아! 헤이쥬도 가치 가여! 저기 쪼꼬 구름 구경 가고 시퍼여!”

헤이즐이 데미안의 큼지막한 옷자락을 양손으로 꼭 붙잡으며 외쳤다.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데미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헤이즐, 저곳은 위험…… 아니, 아주 먼지가 많아서 요정님의 고운 피부가 상할 수 있단다.”

“시러여! 헤이쥬도 아빠랑 오빠랑 가치 이쓸 거에여! 혼자 이쓰면 무서어여어…….”

애정결핍이 빚어낸 눈물겨운 명연기였다. 사실 무서운 것보다 가계부 포인트가 날아가는 게 오백 배는 더 무서웠지만, 마수 가문의 부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확실한 치트키가 없었다.

데미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루시안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 헤이즐을 성안에 두고 갔다가 결계라도 뚫리면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 눈앞에 두는 것이…….”

“그렇군. 벨페고르의 요람 안보다 안전한 곳은 없지.”

결국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평범한 이동용 마차나 투박한 군용 안장 따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벨페고르 공작가의 장인들이 단 세 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 낸 것은, 온통 화려한 레이스와 파스텔 핑크빛 비단으로 치장된 ‘요정 전용 특수 방탄 유모차’였다.

유모차의 바퀴에는 마수의 뼈를 깎아 만든 충격 흡수 장치가 달렸고, 차체는 드래곤의 가죽에 연분홍빛 염료를 덧칠해 그 어떤 충격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헤이즐은 그 푹신하고 기괴할 정도로 화려한 유모차에 올라탄 채, 서부 숲 오염 지역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 *

서부 참나무 숲의 입구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본래 울창했어야 할 참나무들은 검게 타들어 가 뼈대만 남았고, 대지는 검붉은 진흙탕처럼 변해 썩은 냄새를 풀풀 풍겼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평소의 검은 갑옷 대신, 헤이즐의 눈을 배려해 급조한 파스텔톤의 하늘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덩치 산만 한 사내들이 하늘하늘한 망토를 휘날리며 살기등등한 눈빛을 빛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쿠구구궁!

갑자기 머리 위로 거대한 암석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폭풍의 마력이 절벽을 강타해 발생한 산사태였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유모차가 달리는 길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굴러떨어졌다.

“적습인가?!”

한 기사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하자, 데미안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기 앞에서 무기를 꺼내지 말라 했을 텐데?’

무언의 압박에 기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 대신 데미안이 직접 나섰다. 그의 등 뒤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연분홍빛 파스텔 망토가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데미안은 유모차 앞을 가로막더니, 굴러떨어지는 거대한 낙석을 향해 두 팔을 가볍게 벌렸다.

“어머나, 예쁜 돌멩이들이 우리 아기 요정님의 꽃길을 방해하러 굴러오네? 아빠가 이 무례한 돌멩이들을 아주 예쁘게 치워 줄게!”

그의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듯 상냥했으나, 행동은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데미안의 가죽 장갑을 낀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마력을 두른 주먹이 낙석의 정중앙을 그대로 관통했다. 집채만 한 바위가 단 한 방에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는 날리는 돌가루마저 헤이즐에게 닿지 않도록, 파스텔 망토를 크게 휘둘러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슈우우우욱!

거친 돌가루들이 데미안의 망토에 부딪쳐 고운 모래가 되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우와아아! 아빠 지짜 머시써여! 돌멩이가 가루가 돼써여!”

유모차 안에서 손뼉을 치는 헤이즐의 모습에 데미안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요정 가문의 수장에게 이 정도는 가벼운 안마 수준이란다. 우리 헤이즐이 기뻐하니 이 아빠는 돌산도 뚫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루시안은 지지 않겠다는 듯, 허리춤에 찬 목검(헤이즐 앞에서 진짜 검을 쓰지 않기 위해 급히 바꾼 나무 칼)을 치켜들었다.

그는 책에서 배운 ‘친절하고 무해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길목을 가로막는 가시덤불을 향해 돌진했다.

“이, 이까짓 잡초 따위, 내가 전부 정리하지! 하압!”

루시안의 목검에서 뿜어져 나온 무시무시한 검기가 가시덤불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던 참나무 서너 그루까지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루시안은 한 마리 나비를 쫓는 수줍은 소년처럼 몸을 가볍게 돌렸다.

“어라? 나비가 날아가네? 참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숲이군.”

‘평화는 무슨…… 숲을 아주 박살을 내고 있잖아.’

헤이즐은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가문의 ‘꽃밭 가면극’은 이제 광기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잉!

[가계부 센서 작동: 토양층 분석 완료.] [심층부에 축적된 ‘마수 독소’가 지하수맥을 타고 영지 전체로 확산 중입니다.] [정화 비용: 호감 포인트 500p 필요.] [현재 보유 포인트: 620p]

현재 가진 포인트의 대부분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령 가계부의 등가교환 법칙에 따라, 기적을 실행하려면 헤이즐의 진심 어린 ‘따뜻한 감정’을 지불해야 했다.

‘포인트를 쓰면 또 몸이 차가워지고 투명해질 텐데…….’

헤이즐은 은밀히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여기서 무리하게 기적을 발주했다가 몸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가문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검은 대지 위로 기괴한 형상들이 솟아올랐다.

썩은 대지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하급 마수, ‘타락한 가시 늑대’들이었다. 온몸이 뾰족한 가시와 검은 진흙으로 뒤덮인 늑대 무리가 붉은 안광을 빛내며 유모차를 에워쌌다.

“크르르르…….”

벨페고르의 기사들이 즉각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들의 손이 무기로 향하려는 찰나, 데미안의 매서운 호통이 들려왔다.

“멈춰라! 우리 아기 요정님 앞이다! 날붙이를 꺼내 살생을 보여서는 안 된다!”

기사들은 멈칫했다. 마수를 잡아야 하는데 칼을 쓰지 말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명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공작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데미안은 씨익 웃으며, 허리춤에서 거대한 전투용 도끼를 꺼내 들었다. 비록 칼날은 무디게 갈아두었으나, 그 무게만으로도 마수를 으깨 버리기엔 충분한 흉기였다.

데미안은 왼손으로 유모차 모빌에 달린 앙증맞은 연분홍빛 딸랑이를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피비린내 나는 거대 도끼를 쥔 채, 마수들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아가야, 아빠랑 같이 신나는 율동 놀이를 해볼까? 딸랑딸랑~!”

딸랑! 딸랑!

데미안이 딸랑이를 흔들며 상냥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율동이었다.

그리고 그 상냥한 율동의 궤적에 맞춰, 오른손의 도끼가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앙!

가장 먼저 달려들던 가시 늑대의 머리통이 단 한 방에 박살 나며 진흙 더미로 화했다.

“딸랑딸랑~ 저기 검은 강아지가 아주 신나게 춤을 추며 사라지네?”

데미안은 딸랑이를 흔들며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옆에서 달려들던 마수 두 마리가 도끼날의 뭉툭한 옆면에 얻어맞고 뼈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콰직! 퍼억!

가혹한 타격음이 숲속에 울려 퍼졌지만, 데미안의 입가에는 여전히 세상을 구원할 요정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빠랑 아빠랑 가치 춤을 춰요, 아가야! 영차, 영차!”

루시안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목검으로 마수의 목을 후려치며 외쳤다.

“그, 그래! 아주 즐거운 무도회로군! 하하하! 참으로 유쾌하다!”

루시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목검으로 가시 늑대의 허리를 두 동강 내면서도, 그의 얼굴은 독서로 배운 어색한 미소로 경직되어 있었다.

잔학함과 유쾌함이 기괴하게 공존하는 벨페고르 가문의 전투 방식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혈투 속에서도, 오직 헤이즐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딸랑이를 흔들고 율동을 멈추지 않는 그들의 처절한 노력에 헤이즐은 감동을 넘어선 경외감을 느꼈다.

‘이 사람들, 나를 위해 진짜 진심이구나…….’

가문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애정이 헤이즐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겁게 차올랐다. 평생 눈치만 보며 타인의 호의를 부채로 여기던 ‘착한 아이 증후군’의 방어벽이 아주 조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따뜻한 감정이 심장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자, 정령 가계부의 수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스템: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따뜻한 감정’이 급증합니다!] [임시 충전 포인트: +300p] [현재 총 보유 포인트: 920p]

“제피르! 지금이야!”

헤이즐은 유모차 시트 아래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지난번 가계부 상점에서 교환해 숨겨두었던 ‘푸른 흡마석 조약돌’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가계부 발주: 하급 정화의 기적 - 토양 정화 실행!] [대가 지출: 500p 소모.]

웅웅웅-!

헤이즐의 손끝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는 푸른 정령의 파동이 흡마석 조약돌을 통해 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데미안과 루시안이 마수들을 으깨 버리는 소란 속에서, 정령들의 은밀한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검게 썩어가던 대지가 푸른빛을 머금으며 원래의 갈색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참나무 뿌리를 갉아먹던 검은 마수 독소들이 정화의 숨결에 밀려나며 정화되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하지만 기적의 대가는 가혹했다.

“으윽…….”

갑작스럽게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헤이즐의 온몸을 덮쳤다. 손끝이 서서히 반투명하게 변하며, 정령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려는 전조 증상이 나타났다. 헤이즐은 급히 주머니 속의 바람 조각석을 꼭 쥐며 정령력을 억눌렀다.

다행히 데미안과 루시안은 마지막 마수를 처리하느라 헤이즐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휴우, 아주 귀여운 강아지들과의 놀이가 끝났구나, 헤이즐.”

데미안이 도끼에 묻은 진흙을 파스텔 망토로 급히 닦아내며 돌아서서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채 몇 초도 가지 못했다.

스스스스…….

참나무 숲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참나무 고목의 기괴한 틈새에서 차가우면서도 불길한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생명체의 호흡기를 마비시키고 마력을 강제로 폭주시키는, 고위 마수의 ‘독가스 장벽’이었다.

보라색 장벽은 무서운 기세로 팽창하며 데미안의 선발 수색 대열 전방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

데미안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 독가스는 그의 주먹이나 도끼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장벽을 돌파하지 못하면, 서부 숲의 오염원 자체를 제거할 수 없었다.

막강한 위기감이 숲의 공기를 얼려 버린 그때, 보라색 독가스 장벽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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