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헤이즐…… 너,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헤이즐의 동그란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말랑한 뺨 위로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잔디밭 위로 흩어지던 연분홍빛 꽃잎들이 마치 헤이즐의 얼어붙은 심장처럼 허공에서 뚝 멈춰 서는 것만 같았다.

‘들켰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사정없이 울려 퍼졌다.

벨페고르 공작가는 정령을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라 여기며 저주하는 잔혹한 마수 가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세상의 모든 정령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정령사라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이 따뜻하고 아늑한 성에서 당장 쫓겨날지도 몰랐다. 간신히 찾아낸 인생의 스위트 홈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위기였다.

헤이즐은 찰나의 순간에 머리를 굴렸다.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스스스.

헤이즐은 등 뒤로 손을 슬그머니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을 톡톡 튕기며 바람의 정령 제피르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던 물방울 모양의 이슬 정령들을 향해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모두 숨어여! 빨리이!’

[히익! 대장, 무서운 마수 오빠가 쳐다본다!]

제피르가 호들갑을 떨며 민트색 풀잎 사이로 쏙 몸을 감추었다. 이슬 정령들 역시 맑은 물방울로 의태해 잎사귀 뒤로 번개처럼 흩어졌다.

정령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침 식사를 마치고 유유히 기어가던 통통하고 커다란 초록색 애벌레 한 마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헤이즐은 0.1초 만에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순진무구한 아기 표정을 지었다. 살구빛 뺨을 한껏 부풀리고, 밤하늘을 담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빠아아…….”

혀가 잔뜩 짧아진 말랑말랑한 목소리였다. 헤이즐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풀잎 위를 기어가는 초록색 애벌레를 콕 가리켰다.

“요기, 쪼로기가 기어가요오. 쪼로기한테 조심조심 기어가라구 말하구 있어써요. 헤헤.”

“……초록이?”

루시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붉은 눈동자가 헤이즐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곳에는 정말로 징그러울 정도로 통통하고 꼬물거리는 초록빛 애벌레 한 마리가 나뭇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루시안은 짐짓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다.

그는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이즐이 허공을 향해 ‘제피르’니 ‘마력 간식’이니 하는 기묘한 단어들을 속삭이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작고 소중한 여동생이 저토록 맑은 눈을 빛내며 애벌레와 대화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어찌 감히 의심의 잣대를 대겠는가.

‘아, 내 동생은 그저 동물과 곤충을 무척 사랑하는 순수하고 무해한 아이였구나.’

루시안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거룩한 의무감으로 가득 찼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동자에 미안함과 애정이 뒤섞인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북부의 냉혹한 소공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그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래, 헤이즐. 아주…… 귀여운 친구를 사귀었구나.”

루시안은 억지로 목소리를 얇고 부드럽게 짜내며 말했다. 평소 전장에서 마수들을 벨 때 나오던 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흙바닥에 그냥 두면 다른 새들이 물어가거나 밟힐지도 모른다. 소중한 초록이를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필요하지 않겠어?”

“웅? 보관이여?”

헤이즐이 고개를 갸웃하자, 루시안은 곧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당장 제국 최고의 장인을 불러라. 우리 헤이즐의 소중한 애완 애벌레를 모실 수 있는 수집통을 제작하도록. 재질은 순금으로 하고, 사방에는 최고급 마력 수정을 박아 숨구멍을 뚫어라. 애벌레가 먹을 신선한 이파리가 상하지 않도록 상시 냉각 마법도 부여하고.”

“예, 예? 애벌레 통을 말씀이십니까?”

시종장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지만, 루시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하자 군말 없이 허리를 숙였다.

“즉시 수소문해 오겠습니다, 소공자님!”

헤이즐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오빠아! 그냥 둘러댄 건데 순금 애벌레 통이라니요! 게다가 마력 수정까지 박으면 저 애벌레가 부담스러워서 체할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살 터였다. 헤이즐은 양손으로 살구빛 뺨을 감싸 안으며 꺄르르 웃었다.

“와아아! 오빠 최고오! 쪼로기도 엄청 조아할 거예요오!”

[띠링!]

그 순간, 헤이즐의 귓가에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앞에 반짝이는 레몬빛 반투명 반창이 떠올랐다.

================================== [정령 가계부 - 상호 확인 완료] - 발주자: 헤이즐 (착한 아이 모드) - 대상: 루시안 벨페고르 - 상태: 완벽한 쌍방 기만 성공! (동생의 동심을 지키려는 오빠의 착각과, 정체를 숨기려는 여동생의 임기응변이 아름답게 맞물렸습니다.) - 보상 적립: '혈육의 절대 신뢰' 보너스 포인트 +500P 획득! - 현재 잔액: 1,200P ==================================

‘오예! 오백 포인트 개이득!’

헤이즐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비록 애벌레 수집용 금장 통이라는 괴상한 물건이 탄생하게 생겼지만, 포인트가 두둑이 쌓였으니 만족스러웠다. 이 포인트라면 나중에 영지의 척박한 토양을 정화하거나, 정령들에게 줄 최고급 마력 간식을 잔뜩 구매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저 멀리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기 요정님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나?”

데미안이었다.

언제 지독한 맹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냐는 듯, 공작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그의 넓은 어깨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금빛으로 부서졌다.

데미안은 헤이즐을 보는 순간, 험악한 흉터가 가득한 얼굴을 억지로 구겨 가며 양손으로 커다란 하트를 그려 보였다.

“아빠아!”

헤이즐이 아장아장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데미안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헤이즐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서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약초의 쌉싸름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풍겼다.

데미안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은빛으로 미세하게 맥박 치며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말라붙은 정령 나무의 잎새였다.

“헤이즐, 이것을 보아라.”

데미안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네가 내 방 침대 옆에 떨어뜨리고 갔던 이 작은 잎새가…… 나를 살려냈다. 이단 심문관의 비열한 독에 중독되어 온몸의 마력이 뒤틀렸을 때, 이 부적이 내 가슴 위에서 스스로 타오르며 독기를 전부 정화해 주었지.”

헤이즐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잎새는 예전에 헤이즐의 옷자락에서 떨어졌던 정령 나무의 마른 잎사귀였다. 데미안이 그것을 소중히 수거해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아! 내가 아빠를 치료하려고 가계부에서 '하급 정화의 숨결' 기적을 구매해 결제했을 때…… 그 기적이 아빠가 품고 있던 저 정령 나무 잎새와 반응해서 증폭되었던 거구나!’

데미안은 그 잎새를 마치 신 성한 성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매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것은 단순한 나뭇잎이 아니다. 우리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대자연이 내린 기적이자, 네가 내게 준 행운의 징표야. 평생 목걸이로 만들어 가슴에 품고 다닐 것이다.”

“히익…….”

헤이즐은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대자연의 구원이 아니라 정령 가계부의 유료 결제 시스템 덕분이었지만, 아빠가 저토록 감격하고 있으니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정령을 저주한다던 벨페고르 공작이 정령 나무의 잎새를 성물처럼 모시고 다닌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면서도 귀여운 오해인가.

“아빠가 아뿌지 안하서…… 헤이주른 너무너무 조아여.”

헤이즐은 데미안의 뺨에 말랑한 얼굴을 부비며 속삭였다.

그 순간, 헤이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령 기적의 대가로 인한 약한 체온 저하가 찾아왔다. 손끝이 살짝 차가워지는 느낌에 헤이즐은 데미안의 따뜻한 목덜미에 더 깊숙이 파묻혔다. 아빠의 넓고 따스한 품이 전해주는 온기 덕분에, 차갑게 식어가던 온몸이 금세 노르스름한 봄볕처럼 따스하게 데워졌다.

이 안전한 품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추운 겨울 길거리에 버려져 얼어 죽어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빠 루시안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경쟁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만 헤이즐에게 선물을 주고 칭찬을 받다니.’

루시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동생의 환한 웃음을 독차지하고 싶은 오빠의 유치한 질투심이 발동한 것이다.

루시안은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칼을 풀어 시종에게 던져버렸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헤이즐.”

루시안의 부름에 데미안의 품에 안겨 있던 헤이즐이 고개를 돌렸다.

“응, 오빠아?”

“초록이 한 마리로는 외로울 거다. 내가 네 소중한 친구를 위해 더 멋지고 화려한 친구들을 직접 구해주지.”

“네에?”

헤이즐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북부 최고의 천재 검사라 불리는 루시안이 몸을 날렸다.

그는 연분홍빛 장미 덩굴이 우거진 흙밭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쉭, 쉭! 전장에서 마수들의 목을 베던 그 정교하고 신속한 신법이 지금은 정원 구석의 나비와 애벌레를 잡기 위해 펼쳐지고 있었다.

“앗! 도련님! 옷이 더러워집니다!”

집사가 비명을 질렀지만 루시안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습격이다! 아니, 사냥이다!”

루시안은 민트색 잔디밭 위를 구르며 손을 번개처럼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순식간에 날개가 레몬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와,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통통한 애벌레 세 마리가 잡혔다.

“헤이즐! 여기 기어 다니는 뚱뚱한 녀석들과 날개 달린 녀석들을 잡았다!”

루시안은 머리에 장미 가시와 풀잎을 잔뜩 묻힌 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전리품을 바치는 전사처럼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나 잘했지?’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책으로 배운 어색한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정원의 기사들과 하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오…… 냉혹하기 그지없던 소공자님께서 오직 소공녀님의 웃음을 위해 저렇게 흙바닥을 구르시다니!”

“이것이 바로 요정 가문의 지극한 형제애로다!”

정원은 순식간에 훈훈하고 통쾌한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헤이즐은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온갖 애벌레들의 향연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오빠의 저 눈물겨운(?) 노력에 화답해야만 했다.

“우와아아! 오빠 지짜 대다내여! 쪼로기 친구들이 가드기에여!”

헤이즐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자, 루시안의 귀끝이 붉어졌다. 그는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흠, 이 정도쯤이야 벨페고르의 전사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

쌍방 기만이 낳은 이 평화롭고 따스한 소동극 속에서, 헤이즐은 진심으로 행복함을 느꼈다. 비록 서로 속고 속이는 가면무도회 같은 일상이었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서로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짜였으니까.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 법이었다.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의 대기가, 갑작스럽게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 제피르가 비명을 지르며 헤이즐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장! 온다! 엄청나게 기분 나쁘고 끈적한 마력이 몰려오고 있어!]

“……!”

데미안과 루시안의 표정 역시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의 몸에서 무해한 요정의 가면이 벗겨지고, 피에 굶주린 북부의 마수 본능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스스스스…….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사시사철 메마르고 거친 바람만 불어닥치는 북부 서부의 참나무 숲.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거대하고 불길한 암흑 마수성의 폭풍이 벨페고르 영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대지를 오염시키고 생명을 갉아먹는, 강력한 저주의 마력이 폭풍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성벽을 뒤흔들었다.

데미안은 헤이즐을 품에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서부 숲을 향해 냉혹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결국 올 것이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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