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마수 혈독이 대리석 바닥을 치익 소리와 함께 녹여 내리는 순간, 연병장의 공기는 일시에 얼어붙었다.
"각하?!" "아버지!"
루시안이 비명을 지르며 데미안을 부축했고, 가문의 기사들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방금 전까지 레몬 쿠키를 건네며 쑥스러워하던 사춘기 소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루시안의 눈동자에는 짐승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흐르던 맑은 하늘마저 갑자기 먹구름이 끼어들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바람 정령 제피르가 헤이즐의 귓가에서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헤이즐! 큰일 났어! 저 인간 몸 안에서 아주 시커멓고 기분 나쁜 기운이 마구 날뛰고 있어! 꼭 썩은 시체 냄새가 나!
헤이즐은 품에 안은 살구빛 아기 코트 자락을 꼬물거리는 손으로 꽉 쥐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빠가... 아빠가 죽으면 안 돼.'
이제야 겨우 마음 둘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소중한 안식처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꼬마 정령사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헤이즐은 애써 겁먹지 않은 척, 눈물을 그렁거리며 데미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빠아... 피나여... 마니 아포여...?"
"쿨럭! 허억... 흐, 헤이즐... 보지 마라. 눈을 감으렴... 우리 착한 요정님께 이런 더러운 걸 보여주다니..."
데미안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신의 검붉은 피가 헤이즐의 앙증맞은 라벤더색 구두에 튈까 봐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닦아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셔츠 안쪽 포켓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헤이즐이 이전에 떨어뜨렸던, 말라붙은 정령 나무의 잎새가 실크 손수건에 싸인 채 보관되어 있었다. 잎새가 데미안의 심장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수의 저주를 필사적으로 억제하려 깜빡이고 있었지만, 그 빛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어서 각하를 마차 안으로 모셔라! 당장 성 내부의 전속 의무관들을 소집해!"
루시안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데미안을 호위했다.
헤이즐 역시 루시안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마차 안으로 다시 타야 했다. 마차 문이 쾅 닫히고, 안은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데미안은 가죽 시트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돋아났고, 피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창백해졌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 했다. 헤이즐은 겉으로는 울먹이는 아기의 표정을 유지하면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잔머리를 굴렸다.
'내가 정령사인 걸 들키면 안 되지만, 아빠의 저 독을 그냥 둘 수는 없어. 마차 안의 독기라도 먼저 빼내야 해.'
헤이즐은 아기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지난번 정령 가계부 상점에서 포인트로 미리 교환해 두었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푸른 흡마석 조약돌.'
페일블루빛의 영롱한 광택을 내뿜는 이 조약돌은 주변의 악성과 마수 가스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즐은 아빠가 고통에 겨워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 칭얼거리는 척하며 시트 아래로 몸을 숙였다.
"웅... 헤이쥬 무서워여..."
헤이즐은 칭얼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척, 마차 시트 깊숙한 틈새 아래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공간에 푸른 흡마석 조약돌을 꾹 밀어 넣었다.
조약돌이 시트 밑에 안착하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는 페일블루빛 파동이 마차 내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데미안의 몸에서 흘러나와 공기를 오염시키던 미세한 마수 혈독의 가스가 조약돌 쪽으로 은밀하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미안의 거친 호흡이 미세하게나마 안정을 찾는 듯싶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혈독을 치료할 수 없었다.
마차가 성의 본관 앞에 멈추어 서자, 대기하고 있던 전속 의사들이 데미안을 침상으로 급히 옮겼다.
침실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데미안의 몸에 온갖 마력 측정기를 대고 약초를 으깨어 발랐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북부 마수 왕의 혈독이 심장까지 가 닿았습니다! 이미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억제제마저 듣지 않습니다!"
수석 의사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
루시안이 의사의 덜미를 잡아채며 포효했다. 평소의 세련된 도련님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공자 전하,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이 독은 인간의 마력이나 일반적인 신성력으로는 정화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정령왕의 눈물이나 그에 준하는 기적만이 이 혈독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정령들에게 미움을 받는 핏줄 아닙니까..."
의사의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벨페고르 가문은 대대로 정령을 하찮게 여기고 저주해 왔기에,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침대 위에 누운 데미안의 이마는 타오르는 불덩이 같았다. 그의 목과 가슴께에 검붉은 핏줄이 뱀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헤이즐은 침대 가를 붙잡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슴이 아려왔다. 저 무섭게 생긴 아빠는 자신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우리 아기 요정님"이라 불러 주었고, 저 까칠한 오빠는 밤새 레몬 쿠키를 구워 주었다.
'나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야. 내가 지킬 거야.'
헤이즐은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헤이즐! 위험하다, 내려오너라! 아버지의 몸에서 독기가 흘러나와 너까지 상할 수 있어!"
루시안이 놀라 헤이즐을 말리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헤이즐은 이미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뜨거운 이마에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얹은 상태였다.
"아빠아... 아포지 마세여..."
헤이즐은 눈을 꼭 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정령 가계부, 열려라!'
* * *
[정령 가계부 (크림빛 양피지 텍스처)] - 보유 호감 포인트: 15 LP - 발주 가능한 기적: * [하급 정화의 숨결] (소모 포인트: 10 LP) * [새싹 돋우기] (소모 포인트: 3 LP)
* * *
헤이즐은 망설임 없이 [하급 정화의 숨결]을 선택했다.
'이걸로 아빠의 혈독을 정화해 줘!'
그 순간, 가계부의 붉은 경고창이 눈앞에 번쩍였다.
[경고: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거, 기적을 실체화하기 위해 시전자의 '기쁨과 행복'의 감정을 대가로 인출합니다.] [부작용 경고: 무리한 기적 발주로 인해 시전자의 체온이 즉각 3도 하락하며, 신체 일부에 일시적인 투명화 전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가슴 속에서 따스하게 피어오르던 몽글몽글한 행복감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감각이 찾아왔다. 헤이즐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관없었다. 이 차가움 정도는 예전 친척 집에서 얼어 죽어가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행해!'
[기적 발주 완료. 10 LP가 차감됩니다. (남은 포인트: 5 LP)] [부작용 발현: 시전자의 체온이 하락합니다.]
순식간에 헤이즐의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며 얼굴이 크림빛 레이스 커튼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심지어 소매 아래로 가려진 손톱 끝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투명한 유리처럼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헤이즐은 깜짝 놀라 얼른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손을 숨겼다. 몸 안의 온기가 빠져나가 한기가 돌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아빠, 헤이쥬가 호 해줄게여. 아픈 거 다 날아가라아아— 얍!"
헤이즐은 데미안의 뜨거운 뺨에 자신의 작고 부드러운 볼을 살포시 맞대며 볼뽀뽀를 쪽 했다.
그 순간이었다.
헤이즐의 입술이 닿은 곳으로부터 눈부신 크림빛 광채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 빛은 정령의 숨결처럼 따사롭고 포근했다.
데미안의 목과 가슴을 거칠게 뒤덮고 있던 검붉은 핏줄들이, 마치 봄볕을 만난 눈 사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타오르던 불덩이 같은 열기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치익, 치익 하며 끓어오르던 검은 독기가 흔적도 없이 정화되어 사라졌다.
데미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건강한 혈색을 되찾았고, 거칠던 호흡이 거짓말처럼 평온한 수면 상태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정적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의사들은 들고 있던 약탕기와 청진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 이럴 수가..."
수석 의사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혈독이... 대대로 가문을 좀먹던 그 불치의 혈독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정화되었어요!"
"정말이냐?! 아버지가 살으신 건가?!"
루시안이 데미안의 맥을 짚어보고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데미안의 맥박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이건... 이건 기적입니다! 신전의 고위 사제 수십 명이 와도 하지 못할 정화를... 아기씨의 입맞춤 한 번이 해내다니요!"
의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이로움과 맹목적인 숭배의 빛이 넘실거렸다. 루시안 역시 멍하니 데미안과 헤이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헤이즐... 네가... 네가 아버지를 구한 거냐?"
루시안의 어조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그 차갑고 오만한 소공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헤이즐은 가슴속 차가운 한기를 억누르며,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헤이쥬는 구냥... 아빠 아포서 호 해준 것뿐이에여. 아빠 이제 안 아포여?"
"그래... 안 아프시다. 아버지가... 사셨어."
루시안은 헤이즐을 와락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징그럽다며 피했을 그가, 지금은 헤이즐을 부서져라 안아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침대 위의 데미안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스르륵 눈을 떴다.
"으음..."
"아버지!"
"아빠아!"
데미안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안고 있는 헤이즐을 보았다. 가슴속을 괴롭히던 지독한 불길이 깨끗하게 가라앉은 것을 느낀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머리맡에 있는 작은 요정 덕분임을 직감했다.
데미안은 큰 손을 뻗어 헤이즐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우리 아기... 우리 요정님이 나를 살렸구나..."
그의 목소리는 웅장한 전장의 영웅이 아니라, 딸의 재롱에 감격해 우는 바보 아빠의 그것이었다. 가문 내에 흐르던 무시무시한 피비린내와 살기는 눈 녹듯 사라지고, 침실 안은 다시 한 번 훈훈하고 평화로운 꽃밭으로 변했다.
헤이즐은 비록 체온이 떨어져 몸이 조금 으슬으슬했지만, 자신을 소중하게 안아주는 두 사람의 품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이야... 이번에도 들키지 않고 모두를 구했어.'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경적 소리가 공작가의 고요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데미안이 깨어난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저녁 무렵이었다.
뿌우우—! 뿌우우—!
그것은 영지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날카로운 뿔나팔 소리였다.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호위 기사단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각하! 대성벽 밖에... 제국 황실의 전속 감사관 마차가 와 있습니다!"
데미안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감사관? 예고도 없이 이 북부 황무지까지 무슨 일로?"
"그것이... 황실 소속의 이단 심문관이자 전속 감사관인 바르톨로 가스외르 경이 직접 마차를 몰고 왔다고 합니다. 삼엄한 철제 깃발을 나부끼며, 황제의 직인을 보여주며 성문 개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단 심문관.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한 번 짜르르하게 얼어붙었다. 정령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단하는 제국의 잔혹한 심문관이, 왜 하필 정령들의 기적으로 영지가 정화되기 시작한 이 타이밍에 찾아온 것일까.
헤이즐은 소매 속에서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