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오오오오!
대지를 찢어발길 듯한 포효가 짙은 보랏빛 하늘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차창 밖의 황량한 오르쿠스 평원을 가득 메운 것은 집채만 한 거대한 먹구름, 아니 그보다 훨씬 불길하고 검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거대 마수의 그림자였다.
덜커덩!
마차가 급정거하며 헤이즐의 부드러운 살구빛 머리타래가 공중으로 붕 떴다. 작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크고 단단한 손길이 헤이즐의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가, 괜찮으냐?"
데미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게 쥐어짜 지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순식간에 사신의 서릿발 같은 안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마수 사냥꾼의 본능이, 딸아이 앞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기를 쥐려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헤이즐은 데미안의 품 안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안 돼!'
이 험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벨페고르 마수 공작가다. 만약 저 거대한 마수가 이 마차를 덮치고, 데미안이 본모습을 드러내어 피비린내 나는 도살극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헤이즐은 자신이 그 끔찍한 광경에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지를 것이고, 친척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때처럼 '쓸모없고 나약한 꼬맹이'라며 이 무서운 가문에서 당장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게다가 자신이 정령들의 힘을 빌려 이 상황을 해결하려다 정령사라는 정체라도 들통난다면, 정령을 저주하는 이 가문에서 뼈도 못 추릴 터였다.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해결해야 해.'
헤이즐은 질끈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정령 가계부, 열려라!'
파르르 떨리는 헤이즐의 시야 위로,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민트빛 스크롤이 스르륵 펼쳐졌다. 은은한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반짝이는 글씨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 [정령 가계부 - 거래 장부] * 보유 호감 포인트: 1,500p * 현재 활성화 가능한 기적 목록: - 바람의 장막 (소음 및 살기 차단) : 300p - 대지의 숨결 (지반 안정화) : 400p ==================================
헤이즐의 귓가로 파스텔톤 연분홍빛 날개를 파닥이는 바람의 정령 제피르가 날아와 앉았다.
- 헤이즐! 무지무지 뚱뚱하고 냄새나는 검은 댕댕이가 오고 있어! 저 녀석, 엄청 화가 난 것 같아. 우리가 바람으로 날려버릴까?
"쉿, 제피르. 들키면 안 돼여..."
헤이즐은 데미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아주 작게 웅얼거렸다.
"바람으로... 저 멍멍이 소리랑 무셔운 기운을 다 흩뜨려줘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기적 발주: '바람의 장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대가 지불: 진심 어린 '기쁨의 온기' 소모]
헤이즐은 마음속으로 끄덕였다. 방금 전 데미안이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잎새를 실크 손수건에 소중히 싸서 품에 넣어주었을 때 느꼈던,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기쁨의 감정을 아주 조금 떼어내어 장부에 지불했다.
순간, 헤이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온기 한 조각이 빠져나가며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투명해졌다. 차가운 한기가 손끝을 스쳤지만, 헤이즐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 정도 추위쯤은 길바닥에서 얼어 죽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휘이이이이잉-!
마차 창문 틈새로 부드러운 크림빛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바람은 순식간에 마차 외곽을 겹겹이 에워싸며 거대한 구름 장막을 형성했다.
그와 동시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쿠오오오...!
평원을 가득 채우던 마수의 웅장한 포효가, 바람의 장막을 통과하는 순간 아주 작고 가녀린 소리로 필터링되어 버린 것이다.
"야옹... 삐익..."
대지를 뒤흔들던 지진 같은 진동도, 바람의 쿠션에 흡수되어 그저 마차가 자갈길을 지날 때의 가벼운 덜컹임 정도로 가라앉았다.
창밖을 경계하던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엇? 방금 그 거대한 마수의 기운이 어디로 갔지?"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습니다! 마수가 스스로 도망친 것인가?"
데미안 역시 미간을 좁히며 창밖을 응시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고위 마수의 살기가 감쪽같이 흩어져 있었다. 오직 마차 주변을 감싸고 도는, 묘하게 달콤한 솜사탕 향기가 나는 바람만이 살랑이고 있을 뿐이었다.
데미안은 품에 안긴 작은 요정님을 내려다보았다. 헤이즐은 겁에 질린 듯 그의 소맷자락을 꼭 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가, 무섭지 않았느냐? 바람이 조금 세게 불었을 뿐이란다. 우리 성의 기사들이 아주 유능해서 나쁜 참새들을 전부 쫓아내 버렸거든."
"웅... 참새가 아주 무셔운 소리를 내쪄여. 그래도 아빠가 이쪄서 안 무셔여!"
헤이즐은 일부러 더 과장되게 양손을 모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착한 아이는 아빠를 걱정시키지 않는 법이니까.
그 살구빛 미소를 마주한 데미안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그는 감격에 겨워 목소리를 얇게 짜내며 대답했다.
"오, 그래! 우리 아기 요정님이 용감하기도 하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마차는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성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마침내 벨페고르 공작가의 본성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 * *
성의 외경은 그야말로 '마수 가문'이라는 악명에 걸맞게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검은 석조 탑들 위로는 보랏빛 안개가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고, 성벽을 타고 올라간 가시 덩굴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성 내부 연병장에 들어선 순간, 헤이즐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헤이즐의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연병장 좌우로 길게 늘어선 기사들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칠흑 같은 갑옷을 입고 흉흉한 거검을 찬 백전노장의 기사들이, 어째서인지 목에는 파스텔톤의 연분홍빛 실크 스카프를 정성스럽게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기사들은 투구 옆에 민트빛 리본을 앙증맞게 묶어두기까지 했다.
그들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뛰어들 것처럼 험악하게 굳어 있었지만, 헤이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 요정님... 어서 오십시오...!" "벨페고르에 오신 것을... 화, 환영합니다아...!"
우락부락한 거구의 기사들이 억지로 얇은 목소리를 내려다보니,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수탉 같은 기괴한 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헤이즐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들을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가문 사람들... 정말 무서운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혹시 나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 한 번에 제물로 바치려는 음모인가?'
불안감이 엄습하는 가운데,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문이 열렸다.
데미안이 먼저 내려 헤이즐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성의 거대한 중앙 계단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데미안과 똑같은 차가운 붉은 눈동자.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은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벨페고르 공작가의 소공자이자 헤이즐의 첫째 오빠, 루시안 벨페고르였다.
루시안은 계단 아래의 헤이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자, 헤이즐의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저 사람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피도 눈물도 없는 소공자...'
사실 루시안의 속마음은 지금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중이었다.
'책에서 분명히 그랬다. 어린아이들은 큰 목소리와 굳은 표정을 보면 악마를 본 것처럼 자지러지게 운다고. 그리고 한 번 울기 시작하면 평생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고 했어.'
어젯밤, 루시안은 밤을 새워 육아 서적을 독파했다. [아기 천사와 친해지는 101가지 방법], [상냥한 오빠가 되는 미소 연습] 등의 책들이 그의 침대 머리맡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루시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책에서 배운 '상냥한 미소'를 실천하기 위해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슥.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위로 올라갔다. 눈은 여전히 매섭게 빛나는데 입만 웃는,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 유괴범 같은 표정이 완성되었다.
"......반갑다."
루시안은 억지로 목소리 톤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지만, 사춘기 변성기 특유의 쇳소리가 섞여 나와 묘하게 위협적인 저음이 되어버렸다.
헤이즐은 그 모습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화, 화났다! 오빠라는 사람이 나를 엄청 싫어하고 있어! 이대로 밉보이면 당장 이 성에서 쫓겨날 거야. 그럼 난 다시 그 추운 겨울 거리로...'
살아야 했다. 다시는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따뜻한 수프를 먹고, 부드러운 침대에서 잘 수 있는 이 완벽한 스위트 홈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착한 아이는... 먼저 다가가는 거야. 다정하게!'
헤이즐은 데미안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내려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데미안이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를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자, 헤이즐은 아장아장 짧은 다리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하얀 레이스가 달린 살구빛 원피스 자락이 걸음마다 나비처럼 풀럭였다.
루시안은 다가오는 헤이즐을 보며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 어쩌지? 나한테 걸어온다. 내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때리러 오는 건가? 아니면 살려달라고 비는 건가?'
마침내 루시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헤이즐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꿀을 머금은 듯한 맑은 눈동자가 루시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헤이즐은 아주 조심스럽게, 루시안의 칠흑 같은 코트 소매 깃을 작은 손가락으로 꼬옥 쥐었다.
"오빠아..."
헤이즐의 목소리가 라벤더 향기처럼 부드럽게 퍼졌다.
"헤이쥬리... 오빠 보고 시퍼쪄여. 그래서 요러케 와쪄여..."
헤이즐은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앙증맞게 빛났다.
쿵.
루시안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둔기에 얻어맞은 듯 강하게 내려앉았다.
'오빠... 라고 불렀어.'
그것도 자신을 보고 싶었다며, 이렇게 작은 손으로 제 옷소매를 붙잡고서.
그 순간, 루시안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경계심과 어색함, 그리고 '무해한 가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마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그의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 냉혹했던 이성을 사정없이 휩쓸어 가버렸다.
스르륵.
피도 눈물도 없다던 공작가의 소공자, 제국의 촉망받는 천재 검사 루시안 벨페고르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헤이즐과 눈높이를 맞춘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허공에서 손을 버벅거렸다. 이 작은 요정님을 만졌다가 혹시라도 부서지면 어쩌나 하는 극도의 공포와 설렘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너, 너... 아니, 헤이즐."
루시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내가... 무섭지 않은 거냐?"
"웅! 오빠 무지무지 머시쪄여! 헤이쥬 눈에는 천사 가타여!"
헤이즐은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끌어모은 아부를 던졌다. 비록 눈앞의 오빠는 천사보다는 타락천사나 마왕에 가까운 외모였지만, 착한 아이의 눈에는 모두가 천사여야만 했다.
"천, 천사..."
루시안의 귀끝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어젯밤 밤새도록 직접 구운 레몬 쿠키 한 봉지를 꺼냈다. 파스텔톤의 노란 리본으로 조잡하게 묶인 봉지였다.
"이, 이거 먹어라. 네가 올 때 주려고... 내가 직접 만든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길가다 주운 거다."
츤데레 특유의 횡설수설이 튀어나왔지만, 눈동자만큼은 쿠키를 받아 든 헤이즐의 반응을 살피느라 안달이 나 있었다.
헤이즐은 얼른 쿠키 봉지를 품에 안고 빵긋 웃었다.
"와아! 고마워여, 오빠! 헤이쥬 오빠가 준 쿠키가 세상에서 젤 조아여!"
그 순간, 연병장에 서 있던 모든 기사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소공자 전하가 무릎을 꿇으셨다!' '저 냉혈한 소공자님이 저렇게 쩔쩔매며 붉어지시다니...!' '요정님 만세! 우리 가문에 드디어 구원이 왔다!'
데미안 역시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문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무해한 순간이었다. 쌍방의 오해와 기만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완벽한 꽃밭 가면극의 성공이었다.
"훌륭하구나, 루시안. 동생을 아주 잘 맞이해 주었어."
데미안이 큼지막한 걸음으로 다가와 루시안의 어깨를 툭 쳤다.
"자, 우리 공작가의 새로운 보물도 왔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코코아라도 마시자꾸나. 헤이즐이 추위에 떨면 안 되니까..."
데미안이 헤이즐을 다시 안아 들기 위해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콜록! 쿨럭...!"
갑자기 데미안의 입에서 깊고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더니, 미처 손으로 가릴 새도 없이 붉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피는 평범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바닥의 대리석을 치익, 소리를 내며 녹여버리는 지독한 마수의 혈독이었다.
"각하?!" "아버지!"
루시안의 눈빛이 급변하며 데미안을 부축했고, 주변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연병장의 공기가 단숨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처럼 얼어붙었다.
데미안은 비틀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셔츠 안쪽 포켓, 헤이즐이 준 마른 잎새가 들어있는 실크 손수건이 있는 자리가 타들어 가듯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헤이즐은 눈앞에서 쏟아지는 검은 피를 보며 얼어붙었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