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사신이 억지로 빚어낸 미소는 무척이나 기괴했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거구의 남자가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지어 보이는 아기용 꽃미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이질적인 그 얼굴을 바라보며, 헤이즐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최고의 방어 기제를 끌어올렸다.
눈앞의 공작, 데미안 알베리히 벨페고르는 정령을 저주하는 마수 가문의 수장이다.
들키면 죽는다. 아니, 쫓겨나서 다시 그 차가운 눈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헤이즐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큼지막한 옷자락을 더욱 꽉 쥐었다.
"……웅, 따똣해여……."
헤이즐이 웅얼거리자 데미안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그가 붉은 피가 흥건히 묻은 대검을 황급히 등 뒤로 던져 버렸다. 숲속 어딘가로 처박히는 육중한 무기 소리가 쿵 하고 울렸지만, 데미안은 짐짓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척 굴었다.
"그래, 우리 아기. 아빠가 얼른 따뜻한 마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목구멍을 억지로 좁혀 짜낸 듯한 가느다란 미성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데미안은 헤이즐을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제 주군의 기이한 목소리에 영혼이 출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데미안의 매서운 눈초리가 닿자마자 급히 허리를 숙이고 길을 열었다.
* * *
검은 가죽으로 단단하게 둘러싸인 벨페고르 공작가의 마차는 겉보기에는 요새처럼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헤이즐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달랐다.
마차 내부는 온통 푹신한 양모로 뒤덮여 있었다. 가죽 시트 위에는 은은한 파스텔톤의 살구빛 담요가 겹겹이 깔려 있었고, 한쪽 탁자에는 급히 준비한 듯한 민트색 마카롱과 크림색 슈크림이 소복하게 쌓인 접시가 놓여 있었다.
"추웠을 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요정님."
데미안이 헤이즐을 살구빛 담요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헤이즐은 가죽 시트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령 가계부의 붉은 경고등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 경고: 정령을 혐오하는 가문 내부입니다. 정령사로서의 힘을 드러내는 즉시, 호감도 수치가 급락하며 생존률이 1%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
반투명한 가계부의 경고문이 눈앞을 가렸다. 헤이즐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남아야 했다. 버림받지 않으려면 무해하고 쓸모 있는 아기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너무 추워…….’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이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자, 오히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몰려왔다. 이가 덜덜 맞부딪치는 소리가 침묵이 흐르는 마차 안을 울렸다.
데미안의 눈썹이 단숨에 일자로 굳어졌다. 그가 당장이라도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흉포한 기세를뿜어내려 하자, 마차 구석에 자리한 검은 무쇠 화로 안에서 작은 불꽃이 화들짝 놀라며 쪼그라들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하급 불의 정령, '아그니'의 잔해였다. 마수의 기운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하고 죽어가는 불씨였다.
헤이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수 가문의 눈을 피해 정령을 도와야 했다.
‘가계부, 열려라.’
머릿속으로 외치자 가계부의 장부가 차르륵 넘어가며 새로운 페이지를 띄웠다.
[ 일일 의뢰 발생! ] - 목표: 떨고 있는 하급 불의 정령 '플리'에게 작은 온기를 나누어 주기. - 보상: 호감 포인트 15P 적립.
헤이즐은 데미안이 잠시 창밖의 기사에게 눈짓을 보내는 사이, 화로 근처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입술을 모아 화로의 꺼져가는 불씨를 향해 후, 하고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프지 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상냥함을 불씨에 전했다.
화르륵.
순간, 검은 재만 가득하던 화로 안에서 라벤더빛을 띤 아기자기한 불꽃이 퐁 하고 솟아올랐다. 불꽃은 헤이즐의 손가락 끝을 부드럽게 핥으며 기쁨의 춤을 추었다.
[ 의뢰 완료! 호감 포인트 15P가 적립되었습니다. ] [ 보유 포인트: 15P ] [ 포인트 상점 개방: '온기 확산' (비용: 10P)을 구매하시겠습니까? ]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헤이즐은 즉시 구매를 결정했다.
[ '온기 확산' 기적이 발주됩니다. ] - 등가교환의 법칙 작동: 기적의 대가로 당신의 '기뻤던 기억의 온기'를 소모합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예전에 따뜻한 수프를 먹고 행복해했던 기억 하나가 모래알처럼 스르륵 부서져 내렸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쓸쓸해지며, 헤이즐의 손끝이 아주 잠깐 투명하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화로에서 피어오른 온기가 보이지 않는 투명한 파도로 변해 마차 안을 감쌌다. 삭막하던 공기가 봄날의 햇살처럼 포근하게 바뀌며, 시트 밑바닥까지 훈훈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어……?"
데미안이 고개를 돌렸다. 마차 내부의 급격한 온도 변화에 그가 붉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수의 피를 이은 그로서는 이 기묘하게 정화된 온기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헤이즐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억누르며, 얼른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렸다.
"따똣해여…… 아주, 아주 따똣해요……."
헤이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데미안의 의혹 어린 시선이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다행이구나. 벨페고르의 마차는 언제나 따뜻하단다. 우리 요정님을 위해서라면 봄날의 정원도 통째로 옮겨다 줄 수 있지."
데미안은 자신의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에 마차가 추웠던 것이라 오해한 듯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트 밑으로 긴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시트 아래에 대충 밀어 넣었던 거대한 전투용 도끼와 쇠사슬이 짤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시커먼 핏자국이 말라붙은 흉측한 무기들이 틈새로 살짝 삐져나왔다.
헤이즐의 눈동자가 그 흉포한 무기에 닿는 순간, 데미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차!’
데미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문의 가풍을 보여주는 저 끔찍한 학살의 도구들을 감히 아기 요정님께 보여주다니. 두려움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거나 도망치려 할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커다란 군화를 뻗어 무기들을 시트 깊숙한 곳으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쾅, 콰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쇠붙이들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지극히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냥…… 아주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들이란다. 아빠는 평소에 꽃을 가꾸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말이지. 정원 가꾸기용 가위란다, 저건."
"가위여……?"
"그렇단다! 아주 무해하고 예쁜 꽃들을 다듬는 도구지."
데미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품속을 뒤적였다.
그가 다급하게 꺼내 든 것은 전장에서 노획한 보물이 아니었다. 마차에 타기 전, 보좌관이 '아기들의 환심을 사려면 이런 것이 필요하다'며 억지로 쥐여주었던 라벤더빛 조화 꽃핀이었다.
데미안은 그 거칠고 굳은살 박힌 손가락으로 가냘픈 꽃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 흑발머리 옆에 슬쩍 꽂았다.
"보려무나. 아빠는 이렇게 무해한 존재란다. 꽃을 사랑하는…… 아주 평화로운 사람이지."
험악하게 흉터가 그어진 뺨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머리맡에 꽂힌 앙증맞은 라벤더빛 꽃핀.
그 괴상망측한 부조화의 극치를 달리는 광경에 헤이즐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공작의 눈빛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제발 자신을 무서워하지 말아 달라는, 그 애처로운 눈빛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착한 아이는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버림받지 않는다.
헤이즐은 뺨을 붉히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와아……! 꽃핀, 너무 예뻐요! 아빠, 꼬까꽃 같아여!"
그 한마디에 데미안의 몸이 굳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꼬까꽃…… 나를 보고 꼬까꽃이라고……."
데미안은 감격에 겨워 어깨를 떨었다. 가문 대대로 흘러내려 온 잔혹한 마수의 피가, 아기의 솜사탕 같은 칭찬 한마디에 완전히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마차 문을 열고 제국 전체에 제 머리에 꽂힌 꽃핀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평화가 찾아온 순간, 헤이즐이 몸을 가볍게 움직이자 그녀의 낡은 옷자락 틈새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스르륵, 탁.
그것은 바스라질 듯 말라붙은 자그마한 나무 잎새였다. 비록 지금은 생기를 잃고 갈색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 표면에는 미약한 정령의 푸른 마력이 실선처럼 흐르고 있었다. 헤이즐이 이전 가문에서 도망칠 때 유일하게 쥐고 나왔던, 정령 나무의 부러진 조각이었다.
데미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잎새에 닿았다.
헤이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령의 흔적이다. 정령을 저주하는 마수 가문의 수장이 저것을 본다면, 당장 정령사라는 정체를 들키고 쫓겨날지도 몰랐다.
"앗, 그건……!"
헤이즐이 다급하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데미안의 커다란 손이 더 빨랐다.
데미안은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새를 조심스럽게 주워 올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것은……."
데미안은 잎새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생명력을 느꼈다. 비록 말라비틀어졌으나, 벨페고르 영지의 그 어떤 식물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지극히 순수하고 치유적인 기운이었다.
그는 이것이 헤이즐이 가난하고 험난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품고 있던 유일한 '보물'이라 생각했다. 이 작고 가녀린 아이가 그 모진 추위 속에서 이 보물 하나를 의지해 버텨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소중한 물건이로구나."
데미안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품안에서 가장 부드러운 실크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 귀한 비단 위에 마른 잎새를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단 한 군데도 구겨지지 않도록 겹겹이 감싸 안았다.
"아빠가 소중히 보관해 주마. 너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보물이니, 내 심장보다 더 안전한 곳에 두마."
데미안은 실크 손수건에 감싼 잎새를 제 가슴 안쪽 포켓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의 가슴 흉터 부근에 잎새가 닿자, 묘하게도 평소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마수의 독기가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저 그것이 아기를 품에 안은 기쁨 때문이라 치부했다.
헤이즐은 그의 다정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령의 흔적인데…… 왜 화를 안 내지?’
오히려 보물이라며 소중히 보관해 주는 모습에, 헤이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온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따스함이었다.
"아빠…… 고마워여……."
헤이즐의 진심 어린 속삭임에, 데미안은 천국을 맛본 표정으로 머리의 꽃핀을 고쳐 썼다.
마차는 흔들리며 점점 더 깊은 북부의 황무지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메마른 대지 위로는 검은 안개가 유령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오르쿠스 영지. 마수가 날뛰고 대지가 오염된,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검은 땅이었다.
헤이즐은 창밖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음산한 땅에서 자신이 과연 정체를 숨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때였다.
덜컹!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말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대기를 찢었고, 곧이어 마차 밖에서 기사들의 긴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공작각하! 외성 입구 평원입니다! 거대한 마수의 그림자가……!"
쿠구구구궁!
대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 보랏빛 하늘을 가르며, 집채만 한 거대한 먹구름 같은 그림자가 마차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마수의 포효가 온 평원을 흔들었다.
쿠오오오오오!
마차 내부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헤이즐은 저도 모르게 데미안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데미안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아기용 꽃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사신의 빛으로 뒤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