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얼어붙은 자작나무 가지들이 매서운 북풍에 꺾여 비명을 질렀다.
동살이 채 돋지도 않은 새벽의 숲은 지독한 가시덤불처럼 차갑고 뾰족했다. 켜켜이 쌓인 눈밭 위로, 눈송이보다 조금 더 큰 발자국들이 위태롭게 이어졌다. 발등이 다 드러나는 낡은 가죽신 사이로 서릿발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춥지 않아. 전혀 안 추워……."
헤이즐은 거칠게 갈라진 조막만 한 손으로 얇은 누더기 숄을 여몄다. 하지만 여밀 서리 낀 옷자락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사나운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웠고, 조그만 숨결이 허공에 흩어질 때마다 심장 주위가 서서히 굳어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친척들은 헤이즐을 이 얼어붙은 마수들의 숲에 버렸다.
‘정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 나쁜 아이.’ ‘우리 가문의 축복을 빨아먹는 식충이.’
매질과 폭언 끝에 돌아온 것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북부 영지의 차가운 눈밭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도 전에 얼어붙어 뺨에 따가운 굳은살을 만들었다. 헤이즐은 쓰러지지 않으려 앙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무릎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르륵, 몸이 옆으로 쓰러지며 차가운 눈 더미 속으로 파묻혔다.
뺨에 닿는 눈의 감촉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였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시야가 어둠으로 가라앉으려 할 때, 헤이즐의 머리맡으로 아주 조그맣고 반짝이는 빛방울들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얼음장 같은 숲속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따스하고 아기자기한 빛더미였다.
말랑말랑한 **연하늘색** 물방울 정령이 헤이즐의 이마 위를 통통 굴렀고, 솜사탕처럼 부푼 **살구색** 바람 정령이 볼을 간지럽혔으며, 은은한 **라벤더빛** 서리 정령들이 헤이즐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거두어 갔다.
- 안 돼, 아기야! 눈을 감으면 안 돼! - 너무 착하고 예쁜 아이인데, 이대로 얼어 죽게 둘 수 없어!
속삭이는 듯한 정령들의 울림이 귓가를 맴돌았다. 귀찮고 성가신 환청이라며 친척들이 뺨을 때리게 만들었던 그 목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온기보다 다정하게 헤이즐의 귓가를 덥혔다.
‘나…… 조금만 더 살고 싶어.’
바보같이 버림받고 끝나는 삶은 싫었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는 진짜 집을 가지고 싶었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쓸고 닦지 않아도, 착한 아이처럼 굴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그런 안식처가 간절했다.
헤이즐이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정령들의 빛줄기를 향해 가냘픈 손가락을 뻗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잉그르르릉-!
머릿속에서 맑고 청아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앞의 허공이 마치 맑은 호수처럼 일렁이더니, 반투명한 은빛 활자들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 띠링! ] [ 특별한 영혼의 소유자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진심 어린 갈망을 표출하였습니다. ] - 조건 충족: 세상의 모든 정령과 거래할 수 있는 독점적 상호작용 체계가 개방됩니다. - ‘정령 가계부’가 최초로 각성합니다!
‘가계…… 부?’
헤이즐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떠오른 것은 아기자기한 꽃무늬 테두리가 둘러진 커다란 장부 모양의 빛 스크린이었다.
[ 정령 가계부 ] - 보유 호감 포인트: 0 P - 현재 상태: 파산 직전 (정령들의 사소한 심부름을 수행하여 포인트를 적립하세요!) - 사용 가능한 기적: 1) [초급] 온기의 온실막 발주 (소모 포인트: 10 P / 대가: 행복한 기억 1일 분량) 2) [초급] 겨울 서리의 장난 (소모 포인트: 5 P / 대가: 기쁨의 감정 소량)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깜찍한 글씨체 옆으로, 조그만 정령들이 잉크병을 들고 뽈뽈거리는 아이콘이 보였다.
- 아기야! 나 배고파! 저기 얼어붙은 나무 밑둥에 고여 있는 마력 이슬을 조금만 치워 주면 내가 힘을 낼 수 있어! - 나도나도! 꼬인 바람 넝쿨을 풀어 줘!
가계부 밑으로 작은 퀘스트 창들이 깜빡였다.
[ 돌발 정령 심부름! ] - 물 정령의 마력 이슬 청소하기 (난이도: 최하) - 바람 정령의 넝쿨 매듭 풀어주기 (난이도: 최하) - 보상: 각각 5 P 적립!
헤이즐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저 멀리 얼어붙은 나무 아래로 가 손가락으로 얼어붙은 이슬을 톡톡 건드려 깨뜨렸다. 얼어서 엉킨 덩굴을 조심스럽게 헤쳐 매듭을 풀어 주었다. 아린 손끝 통증보다 살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 띠링! 심부름 완료! ] - 호감 포인트 10 P가 적립되었습니다. (누적: 10 P)
- 와아! 시원해! 고마워, 착한 아기야! - 우리가 도와줄게!
정령들이 기쁨의 춤을 추며 헤이즐의 주위를 맴돌았다. 헤이즐은 숨을 헐떡이며 가계부 화면을 다급히 두드렸다.
‘겨울 서리의 장난…… 발주할래! 제발!’
[ 기적 발주 승인! ] - 소모 포인트: 5 P - 등가교환 적용: 헤이즐 님의 마음속 '기뻤던 순간의 감정'이 소량 소모됩니다. - 효과: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에게 강력한 서리 마법을 구현합니다.
순간, 헤이즐의 가슴 한구석에서 뽀송뽀송하게 피어나던 작은 기쁨의 조각 하나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서늘한 공백이 찾아왔지만, 그와 동시에 헤이즐의 손끝에서 눈부신 은빛 마법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자작나무 숲을 헤치며, 요란한 거친 발소리와 함께 횃불을 든 무리가 나타났다.
"이년이 어디까지 도망친 거야? 감히 가문의 가보를 훔쳐 달아나?"
험악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헤이즐을 학대하고 버렸던 친척 숙부와 그의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숨기기 위해, 헤이즐에게 도둑 누명까지 씌워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뒤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어라, 저기 쓰러져 있네! 쥐새끼 같은 년, 얼른 목을 매달아서……."
숙부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쇠몽둥이를 치켜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헤이즐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내 눈을 똑바로 뜨고 가계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응징해 줘.’
헤이즐의 발걸음이 닿은 눈밭을 시작으로, 파르르 떨리는 정령들의 서리 마법이 지면을 타고 무섭게 뻗어 나갔다.
키이이이잉-!
"어, 어라? 발이……!"
다가오던 숙부의 발끝에서부터 시퍼런 얼음 결정들이 무서운 속도로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겨울바람이 아니었다. 정령들의 분노가 담긴, 강철도 부숴 버릴 듯한 절대적인 냉기였다.
사락, 사사락!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얼음꽃들이 순식간에 친척 일당의 다리와 몸을 휘감았다. 불타오르던 횃불은 단숨에 얼어붙어 차가운 고드름으로 변했고, 그들의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살려, 살려 줘! 몸이 안 움직여!" "끄아악! 얼어 죽는다! 살려 줘!"
꽁꽁 얼어붙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친척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자마자 눈물마저 고드름이 되어 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조금 전까지 헤이즐을 죽이려 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얼어붙은 석상처럼 벌벌 떨며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완벽한 사이다 같은 통쾌함이 숲속을 가득 채웠다. 헤이즐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적을 부린 대가였을까.
몸 안의 온기가 급격히 빠져나가며 시야가 다시 세차게 흔들렸다. 차가운 서리 정령들이 걱정스러운 듯 헤이즐의 뺨을 비벼 댔지만, 밀려오는 탈력감은 막을 수 없었다. 손끝이 점점 투명하게 바스라질 것 같은 기이한 감각에 헤이즐은 덜컥 겁이 났다.
바로 그때였다.
둥-! 둥-! 둥-!
대지를 흔드는 묵직하고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숲의 정적을 산산조각 내며 다가왔다.
단순한 가신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검붉은 연기를 뿜어내며 포효하는 거대한 마수들이 기사들을 태운 채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기사들의 선두에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망토를 휘날리며, 피비린내 나는 거대한 대검을 한 손에 쥔 사내.
제국 최북단의 지배자이자, 정령을 저주하는 무자비한 마수 가문의 수장인 데미안 알베리히 벨페고르 공작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고, 온몸에서는 주변의 눈조차 증발시킬 듯한 붉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슨 소란이지?"
데미안의 낮고 웅장한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얼어붙어 있던 친척 일당은 살기를 느끼고 거품을 물며 기절해 버렸다.
데미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아주 작고 처참한 행색의 헤이즐에게 멈췄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헤이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수 공작가’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린아이조차 마수의 먹이로 던져 버린다는 잔혹한 괴물들. 이제 겨우 친척들을 피했더니, 더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죽었다. 이제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스르륵.
데미안이 마수에서 내려와 헤이즐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가죽 장화가 눈을 밟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커다랗게 울렸다. 헤이즐의 눈앞을 가로막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데미안은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헤이즐의 상처투성이 얼굴, 부르튼 손발, 그리고 얇은 누더기를 샅샅이 훑었다.
순간, 데미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제국의 그 어떤 전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이 작고 무해한 생명체는 대체 뭐지?’
이렇게 작고 연약한 아이가 이 끔찍한 눈밭에 버려져 있었다니. 솜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묻은 눈송이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냘픈 숨소리가 데미안의 심장을 가차 없이 난도질했다. 잔혹한 마수의 심장이 난생처음으로 쿵쾅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듯 거친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헤이즐을 안아 올렸다.
따뜻했다.
그의 넓은 품은 마수 가문이라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두껍고 부드러운 모피 망토로 헤이즐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멍하니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천둥 같은 목소리로 선포했다.
"지금 즉시 본성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전령을 보내라."
데미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오늘부로 이 아이는 벨페고르 공작가의 유일한 막내딸이자, 나의 후계자다. 감히 이 아이를 해하려 한 저 얼어붙은 버러지들은 영지 감옥에 처넣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해라."
"예, 옛?! 공작각하, 그게 무슨……!"
기사들이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지만, 데미안의 서슬 퍼런 눈빛 한 번에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품에 안겨 있던 헤이즐의 눈앞에 다시 한번 가계부의 반투명한 화면이 긴박하게 떠올랐다.
[ 위험! 위험! ] - 대상 '데미안 알베리히 벨페고르'는 초고농도의 마수 에너지를 보유한 위험 인물입니다! - 정령 가계부의 안전 수칙 발동: 정령사의 신분이 들통날 경우, 가문의 기풍상 즉시 배척당할 위험이 극도로 높습니다! - 생존을 위한 권장 수칙: '무해하고 평범한 아기'를 연기하여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십시오!
- 아기야! 저 인간 엄청 무서워! 정령을 싫어하는 가문이래! - 들키면 큰일 나! 절대 정령사라는 걸 들키면 안 돼! 평범한 아기인 척해!
정령들이 헤이즐의 귓가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헤이즐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야 했다. 이 따뜻하고 넓은 품에서 쫓겨나 다시 차가운 눈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비록 무시무시한 마수 가문이라 할지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고 무해한 아기가 되어 주리라.
헤이즐은 가계부의 경고를 가슴 깊이 새기며, 조심스럽게 데미안의 단단한 옷자락을 작은 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아주 가냘프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웅, 따똣해여……."
그 순간, 헤이즐은 데미안의 거대한 몸이 눈에 띄게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데미안은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자작나무를 일격에 베어 넘겼던, 붉은 피가 흥건히 묻은 대검을 헤이즐의 시야에 닿지 않도록 황급히 등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험악한 얼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사신이, 난생처음 해보는 짓이라는 듯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지어 보인 것은 가히 기이할 정도로 어색한 ‘아기용 꽃미소’였다.
"……우, 우리 착한 아기 요정님. 이제 안 추워요. 아빠랑…… 집에 가자꾸나?"
평소의 벼락같은 목소리는 어디 가고, 목구멍을 억지로 조여 짜낸 듯한 얇고 기괴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 기괴하면서도 눈물겨운 광경을 정면으로 마주한 헤이즐은, 밀려오는 경악과 긴장감에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