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덜커덩, 쾅!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무덤의 뚜껑이 내려앉는 것처럼 음산했다. 어둡고 서늘한 공기가 지배하는 서재 방 안쪽으로 거칠게 내팽개쳐진 헤이즐은 바닥을 짚으며 가늘게 신음했다. 손바닥에 거친 먼지와 차가운 바닥돌의 감촉이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문밖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쿵! 쿠우웅!

“헤이즐! 문 열어라! 당장 그 더러운 손을 치우지 못할까!”

아빠 데미안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과 함께 대검이 강철 문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왔다. 하지만 황실의 이동 제어 스크롤이 만들어 낸 검푸른 마력 장벽은 성벽보다도 단단하게 방 안을 격리하고 있었다.

창문마다 검은 뱀처럼 얽혀드는 마력의 사슬들 때문에 방 안은 이내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에 잠겼다. 옅은 살구빛으로 빛나던 헤이즐의 뺨은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얇은 리넨 드레스 사이로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단둘이 되었구나, 벨페고르의 가짜 요정님.”

먼지 섞인 어둠 속에서 바르톨로가 기괴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뺨은 방금 전 역류한 신성 마법의 충격으로 시푸르죽죽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고, 찢어진 사제복 사이로 붉은 마석이 기괴한 광채를 뿜어냈다.

헤이즐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만졌다. 주머니 속에는 바람 정령 제피르가 보답으로 주었던, 방금 전 자신을 지키고 산산조각이 나 버린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의 고운 가루만이 만져졌다. 제피르가 준 소중한 선물이 아니었다면 방금 전 바르톨로의 금기 마법에 영혼이 통째로 찢겼을 터였다.

‘고마워, 제피르. 덕분에 살았어.’

차가운 먼지 가루가 된 바람 조각석을 꽉 쥐며 헤이즐은 심호흡을 했다. 몸 안쪽에서부터 정령 가계부의 에너지를 무리하게 쓴 대가로 차가운 오한이 몰려왔다. 손목 끝이 옅은 우윳빛으로 살짝 투명해지려는 감각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바르톨로는 바닥에 주저앉은 헤이즐이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했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품에서 날카로운 은제 메스를 꺼내 들었다.

“감히 신성한 교단의 성검을 기만하고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네년의 가죽을 벗겨서라도 그 정령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혀내겠다. 벨페고르의 마수 놈들이 밖에서 문을 부수기 전에 말이지.”

그의 눈에 서린 탐욕과 광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하지만 헤이즐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거두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르톨로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저씨.”

“뭐라 마구 짓껄여봐야 소용없다. 여기는 신성 결계로 완전히 차단된 밀실…….”

“시끄러워요.”

헤이즐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남모르게 허공을 향해 작은 왼손을 뻗었다. 바르톨로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가 겁에 질려 허공을 더듬는 짓거리에 불과해 보였겠지만, 헤이즐의 시야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파아앗.

은은한 라벤더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나타난 투명한 책장. 바로 헤이즐의 비밀 무기인 ‘정령 가계부’였다.

[보유 포인트: 600 FP] [경고: 현재 사용자 ‘헤이즐’의 감정 소모로 인한 신체 투명화 진행률 15%. 과도한 포인트 즉시 지출 시 동결 위험 있음.]

라벤더빛 가계부 화면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지만, 헤이즐은 망설이지 않고 장부를 옆으로 넘겼다. 조그만 손가락 끝이 닿는 곳마다 민트색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헤이즐이 찾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지난 11화에서 공작가의 장남이자 자신의 오빠인 루시안 벨페고르를 관찰하며 등록해 두었던 특별한 채무 일지.

[임시 등록 채무 일지] - 대상자: 루시안 벨페고르 - 등록 항목: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 (마이너스 수치: -500 FP 상당) - 상태: 미결제 (보류 중)

벨페고르 가문의 핏줄에 흐르는 지독한 불행의 악재. 루시안은 늘 이 낙인 때문에 주변의 물건이 갑자기 부서지거나, 딛는 땅이 무너지거나, 우발적인 사고에 휘말려 다치곤 했다. 헤이즐은 이 낙인을 가계부에 마이너스 채무로 묶어둠으로써 루시안에게 갈 불행을 임시로 억누르고 있었다.

‘이제 이 채무를 탕감할 때야.’

헤이즐의 맑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타인의 호의를 부채로 여기며 늘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지만, 지금 가문을 위협하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 앞에서는 그 어떤 자비도 필요 없었다.

헤이즐은 속으로 가계부에 명령을 내렸다.

‘루시안 오빠의 불행 채무를 지금 이 자리에서 탕감 집행할게. 단, 이 불행의 모든 악재를 저 눈앞의 나쁜 아저씨에게로 전부 치환해 줘!’

[시스템 가동: 채무 탕감 및 인과 치환을 시작합니다.] [소모 포인트: 400 FP (잔여 포인트: 200 FP)] [치환 대상: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 가스외르] [효과: 대상자에게 가문 대대로 누적된 초월적인 ‘우발적 환경 악재’가 즉각 폭주합니다.]

위이이잉-!

조용한 서재 방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바르톨로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마력의 흐름에 눈을 가늘게 뜨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꼬맹이 녀석, 쓸데없는 수작을 부려봤자…….”

“아저씨, 혹시 운이 좋은 편인가요?”

헤이즐이 차가운 목닥돌 바닥에 얌전히 주저앉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라벤더빛으로 일렁이는 가계부의 빛이 그녀의 얼굴을 반사해 신비롭고도 서늘한 인상을 풍겼다.

“뭐라?”

“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에요. 그리고 울 오빠는…… 좀 나쁜 편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질 예정이거든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재 방 내부의 물리 법칙이 통째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처음은 아주 사소한 어긋남이었다. 바르톨로가 헤이즐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가 신고 있던 최고급 가죽 장화의 굽이 바닥의 미세한 틈새에 끼었다.

툭.

“어, 윽?”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바르톨로의 손에서 은제 메스가 미끄러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날카로운 메스는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정확히 벽면에 걸려 있던 거대한 벨페고르 가문의 역대 방패 장식의 고정 끈을 끊어버렸다.

스르륵, 탁!

“끄악!”

육중한 철제 방패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바르톨로의 발등을 정확히 찍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르톨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루시안의 불행 채무는 제국의 대마법사조차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지독한 인과율의 덩어리였다. 그것이 단 몇 초 사이에 한 사람에게 집중 포화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톨로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순간, 그가 짚은 응접용 탁자의 다리가 마침 썩어 있었던 것처럼 쩍 갈라졌다.

우당탕탕!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무거운 청동 잉크병과 연금술 촉진제 병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바르톨로의 얼굴로 쏟아졌다. 끈적하고 독한 수은 성분의 잉크가 그의 눈과 코로 스며들었다.

“아악! 내 눈! 내 눈이-!”

바르톨로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고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뒷걸음질을 치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이 서재에서 가장 위험한 구역이었다.

벨페고르 성의 서재 천장은 수백 년 전 고대 마수의 뼈와 육중한 대리석 석판들을 엮어 만든 거대한 장식 천장이었다. 오랫동안 마력의 뒤틀림을 버텨오던 천장의 지지대가, 바르톨로가 뿜어낸 신성 마법의 잔여 진동과 그의 머리 위로 집중된 불행의 인과율에 반응해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어, 어라……?”

바르톨로가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먼 잉크로 범벅이 된 그의 시야 속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십 톤 무게의 육중한 대리석 장식 석판들이 돌연 고정 장치에서 분리되어 수직으로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정확히, 그가 서재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지나야만 하는 유일한 퇴로와 그의 두 다리가 위치한 곳을 향해.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악-!”

바르톨로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밑에 쏟아진 연금술 기름과 잉크가 얼음판처럼 미끄러웠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그의 다리가 꼬이며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그리고.

쿠우우우웅-!

지진이 일어난 듯 서재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매캐한 회색 먼지가 사방으로 폭풍처럼 휘날렸고, 굉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힌 육중한 대리석 석판들이 바르톨로의 하반신을 완벽하게 내리눌렀다.

콰드득!

“구우우욱……! 끄아아아아악-!”

뼈와 근육이 완전히 짓뭉개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바르톨로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 안에 메아리쳤다. 대리석 석판은 그의 도망 경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방벽이 되었고, 동시에 그의 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박아버린 족쇄가 되었다.

그는 피를 토하며 석판 아래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완벽한 자멸이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는 서재의 한구석.

헤이즐은 여전히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차가운 바닥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오던 아주 작은 돌가루조차도, 가계부의 엷은 라벤더빛 보호막에 막혀 툭툭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꼬마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서, 기고만장하던 이단 심문관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헤이즐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는…… 괴물…… 괴물이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가 아닌, 뼛속 깊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요정이라 속이던 이 자그만 아기가 실제로는 인과율마저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괴물이었다니.

헤이즐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에 묻은 먼지를 톡톡 털어내며 바르톨로를 내려다보았다.

“괴물 아니에요.”

헤이즐은 주머니 속에서 다 부서진 바람 조각석의 마지막 온기를 느끼며,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그냥,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을 벌주는 평범한 아이일 뿐이에요.”

그 순간이었다.

바르톨로의 절규와 먼지 너머로,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철문이 한계에 달했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결계가 걸려 있던 두꺼운 강철 문이 통째로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자욱한 매연과 불꽃을 뚫고, 서재 안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피비린내 나는 폭풍을 몸에 두른 채, 눈이 뒤집힌 아빠 데미안이 대검을 바닥에 쓸며 검은 사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마수의 안광처럼 흉포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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