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제국의 가장 차가운 북쪽 끝에 자리한 벨페고르 공작 성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하고 불길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바르톨로가 악의를 품고 깨뜨린 결계의 틈새로, 코를 찌르는 매캐하고 붉은 연금술 촉진제 냄새가 안개처럼 번져 나갔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대수림의 마수들이 쇠창살을 부수고 포효하며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쿵, 쿵, 하고 성벽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흔들렸고, 아기자기한 레몬빛 불빛이 밝혀져 있던 헤이즐의 침실 창문이 덜덜 떨렸다.
헤이즐은 이불 속에서 번쩍 눈을 떴다.
얇은 밤하늘빛 레이스 잠옷 아래로 드러난 손등은 아직 반쯤 투명하게 비쳐 있었고, 손가락 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령 가계부의 에너지 치환 기능을 무리하게 사용한 대가로 온몸을 짓누르는 오한이 가시지 않았지만, 성을 뒤흔드는 불길한 마수들의 울음소리에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안 돼. 이 착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다치게 둘 순 없어.’
가족들의 호의를 언제나 갚아야 할 무거운 채무처럼 느끼는 헤이즐의 여린 마음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이 따뜻한 스위트 홈을 지키기 위해 헤이즐은 가냘픈 다리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헤이즐은 슬리퍼를 제대로 신을 겨를도 없이, 성벽 계단을 다급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이 고스란히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얼려 버릴 것 같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단 벽면에 걸린 촛대들이 흔들리며 헤이즐의 투명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제피르! 정원의 정령들을 깨워줘! 어서!”
헤이즐이 다급하게 부르자, 허공에서 파스텔 핑크빛 꽃가루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수다쟁이 바람 정령 제피르가 튀어나왔다. 제피르는 헤이즐의 뺨을 다급하게 비벼대며 웅얼거렸다.
-헤이즐! 큰일 났어! 지하에 있던 털 뭉치 괴물들이 시뻘건 약을 먹고 미쳐 날뛰고 있어! 어서 가계부를 열어!
헤이즐은 달리는 와중에도 눈앞에 반투명한 ‘정령 가계부’를 띄웠다.
[보유 포인트: 600 FP]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헤이즐은 주저 없이 장부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비상 포박 발주! 정원의 덩굴 정령들과 정원수들에게 전해줘. 성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전부 막아야 해!”
주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헤이즐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행복한 기억의 파편 하나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아빠 데미안이 연한 살구빛 튜닉을 입고 양손으로 하트를 그려주던 그 따뜻한 순간의 감정이 모래알처럼 흩어지자, 헤이즐의 체온이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손목의 투명도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정원에는 기적이 시작되었다.
성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연한 크림빛 라일락 가지들과 벽을 타고 오르던 사나운 장미 덩굴들이 일제히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팔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지가 들썩이며 식물의 정령들이 잠에서 깨어나 초록빛 손을 뻗었다.
그 시각, 성 중앙 정원에서는 이미 아수라장이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붉은 안개에 휩싸여 눈이 뒤집힌 마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정원으로 들이닥쳤다.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연분홍빛 실크 우산을 어깨에 멘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짐짓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사춘기 소년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더러운 괴물 놈들이 감히 요정님의 정원을 망치려 들다니.”
루시안이 소매 안에서 날카로운 은빛 단검을 뽑아 들고 도약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과거에 심어두었던 검푸른 사슬 모양의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이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마수를 향해 단검을 내지르려는 찰나, 루시안의 발밑에 있던 정원석이 뜬금없이 어긋나며 미끄러졌다. 불행의 낙인이 그의 신체를 부수기 위해 기세를 뻗친 것이었다. 중심을 잃은 루시안의 몸이 허공에서 무방비하게 무너지며 마수의 맹렬한 발톱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형님!”
뒤늦게 대검을 뽑아 들며 달려오던 데미안의 눈이 뒤집혔다.
마침 성벽 계단을 빠져나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도착한 헤이즐의 눈에 그 광경이 들어왔다.
‘안 돼... 루시안 오빠!’
헤이즐은 가계부 화면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루시안의 머리 위에 묶여 있는 마이너스 채무 일지를 흘끗 바라본 그녀는, 남아있는 포인트를 쪼개어 실시간 명령을 내렸다.
“바람과 흙의 정령들아! 오빠를 받쳐줘!”
피융-!
루시안의 등이 날카로운 돌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바람의 기류 장벽이 허공에 둥근 쿠션처럼 형성되었다. 동시에 발밑의 흙들이 솟구쳐 올라 폭신한 스펀지처럼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어...?”
루시안은 자신이 꼴사납게 넘어지는 대신, 마치 솜털 위에 앉은 것처럼 사뿐히 내려앉자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의 불행의 낙인이 찌르르 소리를 내며 잠시 뒤틀렸으나,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힘에 막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수들이 다시금 으르렁거리며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흉포한 대수림의 괴물들이 침을 흘리며 정원을 피로 물들이려 했다. 데미안이 험악한 전장의 마수 사냥꾼다운 본능을 드러내며 시퍼런 기운을 대검에 두른 순간이었다.
헤이즐은 숨을 들이쉬며 가계부의 가장 강력한 버튼을 눌렀다.
“마비 가계부 명령어 작동! 정원의 모든 가시덩굴아, 마수들을 잠재워줘!”
[마비 가계부 명령어 작동: 200 FP 소모. 잔액 400 FP]
그 순간, 지독하게 아름답고도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쉬이익! 하는 파공음과 함께, 정원 사방에서 수천, 수만 개의 살구빛 장미 덩굴들이 채찍처럼 날아올랐다. 가시 돋친 덩굴들은 마치 지능을 가진 거대한 그물망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폭주하던 마수들의 목과 다리를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마수들이 발버둥을 치려 했으나, 덩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하고 향긋한 라벤더빛 안개가 그들의 코끝을 스쳤다. 마비 성분을 품은 정령의 향기였다.
스르륵.
붉게 충혈되어 광기를 뿜어내던 마수들의 눈동자가 서서히 맑은 레몬빛 온순한 눈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얌전하게 꼬리를 내리고, 장미 덩굴이 만들어낸 가시 감옥 속에 웅크려 누워 얕은 숨을 내쉬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 한 번의 뼈 부러지는 소리도 없이 수십 마리의 마수 대군이 완벽하게 길들여진 것이다.
대검을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피의 축제를 벌이려던 데미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무사들 역시 검을 반쯤 뽑은 채 입을 벌리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마수들이 왜 갑자기 꽃밭에서 잠을 자는 거지?”
데미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루시안 역시 단검을 쥔 채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벨페고르 가문이 자랑하는 흉포한 무력으로도 최소 반나절은 피 터지게 싸워야 했을 폭주 사태가, 단 몇 초 만에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종결되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진압력이었다.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던 헤이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온몸의 마력이 바닥나며 시야가 가볍게 흔들렸다. 차가워진 손끝을 비비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스스스스.
머리맡의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조소가 들려왔다.
“결국 꼬리를 잡았구나, 이 사악한 이단 정령사 년.”
헤이즐이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붕대를 칭칭 감아 유령 같은 몰골을 한 바르톨로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미치광이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성안의 혼란을 틈타 은밀히 침투한 것이 분명했다.
바르톨로는 헤이즐이 정령을 부리는 모습을 위에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백성들을 속이고 신성한 제국을 기만한 죄, 네 년의 정령 계약을 이 자리에서 강제로 찢어발겨 주마!”
바르톨로의 손끝에서 황금빛과 검은 마력이 뒤섞인 광범위 이단 탐색 신성 마법의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무방비 상태로 비틀거리던 헤이즐에게는 피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광선이 헤이즐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의 찰나.
헤이즐의 잠옷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반응했다.
그것은 지난날 바람 정령 제피르가 고맙다며 건네주었던, 아무 쓸모 없어 보이던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었다.
파아아앗-!
조각석이 헤이즐의 주머니를 뚫고 허공으로 튀어나오며 눈부신 민트색 방어막을 형성했다. 바르톨로가 쏘아 보낸 사악한 신성 마법이 민트색 방어막에 부딪히는 순간, 콰앙-! 하는 고막을 찢는 소리와 함께 마법이 고스란히 역류하기 시작했다.
바람 조각석은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쨍그랑 소리를 내며 스스로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끄아아악-!”
자신이 시전한 금기 마법의 충격파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바르톨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얼굴에 감겨 있던 붕대가 찢어지며 시푸르죽죽하게 멍든 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바르톨로는 독종이었다. 그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헤이즐을 노려보았다. 역류한 마법의 여파로 정원의 결계가 일시적으로 뒤흔들리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데미안! 루시안! 이리 오지 마라! 이 년은 내가 데려간다!”
바르톨로는 이 악물고 몸을 날려,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는 헤이즐의 가냘픈 손목을 악착같이 낚아챘다. 그의 손아귀 힘에 헤이즐은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다.
“헤이즐-!”
정원의 기적에 취해 있던 데미안과 루시안이 비명 소리를 듣고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공포와 분노로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데미안이 대검을 휘두르며 폭풍처럼 계단을 뛰어올라왔고, 루시안 역시 바람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바르톨로는 이미 품속에서 마지막 남은 이동 제어 스크롤을 찢어발긴 후였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헤이즐이 서 있던 테라스와 연결된 서재 방의 두꺼운 철문이 거대한 마력의 장벽을 두르며 쾅! 소리를 내고 닫혔다.
“아빠! 오빠-!”
헤이즐의 절규가 닫힌 문 틈새로 차단되었다.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서재 방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쳐진 헤이즐은 차가운 바닥을 짚으며 신음했다. 문밖에서는 데미안이 문을 부수기 위해 대검을 내리치는 굉음이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
쾅! 쾅! 쾅!
먼지가 풀풀 날리는 어둠 속에서, 바르톨로가 천천히 걸어와 헤이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등 뒤로 서재 방의 창문들이 검은 마력의 사슬로 꽁꽁 묶이며 완벽한 밀실이 완성되었다.
“드디어 단둘이 되었구나, 벨페고르의 가짜 요정님.”
바르톨로가 피 묻은 이빨을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붉은 마석이 헤이즐의 목덜미를 겨누며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