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결계가 걸려 있던 두꺼운 강철 문이 통째로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자욱한 매연과 불꽃을 뚫고, 서재 안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피비린내 나는 폭풍을 몸에 두른 채, 눈이 뒤집힌 아빠 데미안이 대검을 바닥에 쓸며 검은 사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마수의 안광처럼 흉포하게 빛나고 있었다.
“헤이즐……!”
가죽 보호구 틈새로 뚝뚝 떨어지는 것은 그가 방금 전 회랑을 가로막던 마수들을 무참히 베어 넘기고 온 흔적이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이 분노로 잘게 떨렸고, 그가 디디는 대리석 바닥마다 쩍쩍 금이 갔다. 제국의 전장을 피로 물들였던 무패의 지배자, 벨페고르 공작의 본모습이었다.
그 끔찍한 기세에 기겁한 사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흩어졌다. 보통의 아이라면 그 무시무시한 살기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자지러지게 울었을 터였다.
하지만 헤이즐은 달랐다.
“아빠아아아-!”
먼지 구덩이 속에서 튀어나온 조그만 형체가 데미안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데미안은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풍기는 피비린내와 살의를 눈치채고 딸아이가 영영 저를 괴물이라 부르며 도망칠까 봐 심장이 얼어붙던 찰나였다. 그러나 헤이즐은 주저함이 없었다. 연한 살구빛 튜닉을 입은 아이의 작은 몸안개가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와락 부딪쳐 왔다.
쿵, 하고 가벼운 충격과 함께 따스하고 말랑한 존재가 품에 쏙 들어찼다.
“우아앙, 아빠! 무서웠어요아!”
헤이즐은 데미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벼댔다. 코를 찌르는 마수의 피비린내조차 아빠의 든든한 품속 냄새라 여기며 꼭 매달렸다.
데미안의 붉게 타오르던 안광이 순간 멍하니 흔들렸다. 길들지 않는 야수 같던 남자의 손이 갈 길을 잃고 공중에서 버벅거렸다. 제 거친 가죽 장갑이나 피 묻은 보호구가 아기의 보드라운 뺨을 상하게 할까 봐, 그는 손가락 끝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헤이즐의 등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헤이즐. 내 아기 요정님.”
방금 전까지 서재를 통째로 찢어발길 것 같던 사신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얇게 가라앉았다. 데미안은 품 안의 온기를 느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날씨로 치자면, 금방이라도 우박을 쏟아부을 듯 검게 뒤덮였던 먹구름 사이로 느닷없이 따스하고 화사한 봄볕이 내리쬐는 격이었다.
하지만 감동의 재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닥에 대리석 석판 더미에 짓눌려 피를 토하던 바르톨로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 광경을 노려보며 이빨을 갈았다.
“이…… 악마의 자식들이…… 감히 신성한 교단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바르톨로의 손끝에서 검붉은 기류가 일렁였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광기가 그의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는 제국의 법도와 교단의 권위마저 잊은 채, 품속에서 검은 보석이 박힌 연금술 촉매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상대의 영혼을 강제로 찢어발겨 정령과의 계약을 파괴하는 금기 중의 금기, ‘영안 마법’의 시동어였다.
“죽어라, 이단 청소부 짓을 하는 괴물 녀석들!”
쉬이이익-!
공기를 찢는 불길한 파찰음과 함께, 칠흑 같은 검은 광선이 무방비한 헤이즐의 등 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데미안이 황급히 대검을 치켜세우려 했고, 문가로 달려오던 오빠 루시안이 들고 있던 연분홍빛 실크 우산을 펼쳐 막아서려던 찰나였다.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아주 찰나의 순간.
헤이즐의 주머니 속에서 파르르 떨림이 일어났다.
‘안 돼……!’
바람 정령 제피르가 오래전 보답으로 건넸던, 주머니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었다. 그 보잘것없는 돌멩이가 스스로 은은한 민트색 빛을 발하며 헤이즐의 주머니를 뚫고 툭 튀어나왔다.
파아앗-!
조각석은 공중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듯 사방으로 잘게 깨어지며, 투명하고 맑은 바람의 방벽을 겹겹이 쳤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결계가 검은 광선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깡-!
마치 단단한 유리판이 부딪치는 듯 청아한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바람 조각석은 검은 광선의 파괴적인 신성력을 그대로 흡수하더니, 인과율을 비틀어 궤적을 180도 꺾어 버렸다.
“어, 어어……?”
바르톨로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뜬 순간, 자신이 쏘아 보낸 금기의 검은 기류가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푸하학-!
“끄아아아악-!”
자신의 영혼을 찢는 마법에 역류당한 바르톨로가 사방으로 피를 뿜으며 자지러졌다. 그의 전신에 시퍼런 멍이 들며 신성 마력을 담고 있던 맥로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완벽한 자업자득이자, 바람 조각석이 남긴 마지막 기적의 회수였다.
하지만 위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르톨로가 자멸하며 뿜어낸 광포한 마력의 충격파가 서재의 천장을 강타했다. 쿠르릉하는 불길한 진동과 함께, 루시안의 머리 바로 위에 매달려 있던 육중한 놋쇠 샹들리에가 고정 나사가 풀리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시안의 이마 위에는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이 보라색 해골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과거 가계부 장부에 마이너스 채무 일지로 임시 등록해 두었던 그 끈질긴 악재가, 이 혼란을 틈타 루시안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발동한 것이었다.
‘오빠가 위험해!’
헤이즐은 본능적으로 머릿속의 정령 가계부를 소환했다.
[보유 포인트: 600 FP] [루시안 벨페고르의 불행 채무 일지: -500 FP]
‘정령들아, 부탁해! 오빠의 나쁜 운을 전부 탕감해 줘!’
헤이즐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경고: 기적의 연쇄 기동 대가로 사용자의 감정 및 생명력이 추가 소모됩니다. 신체 투명화 수치가 위험 수준에 도달합니다.]
붉은 경고창이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헤이즐은 망설이지 않았다. 소중한 가족을 잃는 것에 비하면 제 몸뚱이 하나쯤 차가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불할게! 전부 가져가도 좋으니까, 오빠를 구해줘!’
[결제 완료. 루시안 벨페고르의 불행 채무 500 FP를 흑자 탕감합니다.]
그 순간, 헤이즐의 가슴팍에서 눈부신 라벤더빛 빛무리와 민트색 나비들이 무리 지어 흘러나왔다. 나비들은 빛의 궤적을 그리며 루시안의 머리 위로 날아가, 그를 짓누르던 보라색 불행의 낙인을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마치 어둠이 아침 햇살에 녹아내리듯, 끈질기던 불행의 낙인이 완전히 지워지고 흑자로 전환되었다.
낙인이 사라지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
루시안이 발을 헛디디며 미끄러진 순간, 그의 몸이 기가 막힌 각도로 비껴 나갔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거대한 샹들리에는 루시안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샹들리에가 처박힌 곳은, 다름 아닌 바르톨로가 숨겨두었던 서재 비밀 금고의 이중 뒷벽이었다. 두꺼운 대리석 벽이 쪼개지며 비밀 공간이 훤히 드러났다.
그 부서진 틈새 사이로, 빛을 무서워하는 어둠의 정령들과 바람 정령 제피르가 쪼르르 날아올랐다. 제피르는 뚱뚱한 들쥐처럼 털을 부풀린 채, 영악한 앞발로 금고 안쪽 깊숙이 숨겨져 있던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덥석 물어 채웠다.
“끼익! 이거 봐라, 이거! 아주 나쁜 냄새가 나는 종이다, 끼익!”
제피르가 공중에서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안에 새겨진 불길한 흑마법 문양과 바르톨로의 친필 서명, 그리고 황실 기사단과 모의하여 벨페고르 영지에 마수 폭주 촉진제를 살포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담긴 ‘이단 주술 흑마법 계약서’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제들과 기사들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혔다.
“저, 저것은…… 심문관 님의 인장……?” “바르톨로 님이 직접 마수를 불러들였다는 말인가? 이단을 심판하러 와서 스스로 이단 주술을 부리다니!”
사제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명백한 증거가 대낮의 햇살 아래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데미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는 품 안의 헤이즐을 루시안에게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루시안은 얼떨결에 헤이즐을 받아 안으며, 제 품에 안긴 여동생의 몸이 이상하리만치 차갑다는 사실에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데미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인무도한 패기가 서재 안의 공기를 완전히 얼려 버렸다. 이제 더는 다정한 ‘꽃밭 아빠’를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내숭의 가면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감히 내 영지에서 흑마법을 부리고, 내 딸의 목숨을 위협해?”
데미안의 얇은 입술이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마치 대지가 울리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벨페고르의 기사들이여.”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재 문밖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검은 갑주의 마수 사냥꾼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들이 차가운 빛을 반사했다.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와 그 추종자들은 신성한 교단의 이름을 더럽힌 대역죄인이자, 벨페고르 영지를 침해한 침략자다.”
데미안이 대검을 바닥에 쾅 찍었다.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쓰레기 더미처럼 난도질해서 저 더러운 흑마법 계약서와 함께 교단 본산의 문 앞에 던져 버려라.”
“존명-!”
우렁찬 함성과 함께 벨페고르의 기사들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비명과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서재를 가득 채웠다. 자신들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이단 조사단은, 말 그대로 쓰레기더미처럼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뼈가 바스러지고 피가 튀는 잔혹한 광경이었지만, 그것은 벨페고르 가문에게 완벽한 합법적 명분을 쥐여준 통쾌한 역습이었다.
경비병들이 바르톨로의 사지를 붙잡아 개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바르톨로는 피를 흘리며 마지막까지 헤이즐을 향해 저주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의 최후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지를 위협하던 거대한 어둠이 한순간에 걷히는, 번개 같은 급습이자 완벽한 해소였다.
“……끝났어, 헤이즐. 이제 다 괜찮단다.”
루시안이 품 안의 헤이즐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헤이즐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이즐……?”
루시안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품에 안긴 아기의 무게감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 있었다. 마치 깃털을 안고 있는 것처럼, 실체가 사라져 가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었다.
데미안이 황급히 다가와 헤이즐의 상태를 살폈다.
“아기 요정님? 정신이 드느냐?”
두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헤이즐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조그만 손목이, 마치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맑은 유리잔처럼 반대편 배경을 그대로 투과해 보여주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시작된 투명화는 이미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무리한 연쇄 기적 기동과 루시안의 불행 낙인을 지우기 위해, 헤이즐의 영혼이 품고 있던 ‘따뜻한 감정’과 온기가 한계치 이상으로 인출된 탓이었다.
아이의 뺨은 핏기를 완전히 잃은 크림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아빠…… 오빠…….”
헤이즐이 간신히 눈풀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한 자락에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처럼 희미했다.
“나…… 이제 안 버려지는…… 거죠……?”
자신이 쓸모없어져서 다시 그 차가운 길바닥으로 버려질까 봐, 마지막 순간까지 착한 아이로 남으려 애쓰던 헤이즐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헤이즐! 정신 차려라! 헤이즐-!”
데미안의 처절한 절규가 서재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기의 전신 피부가 눈이 부시도록 맑은 라벤더빛 입자로 흩어지며, 헤이즐의 몸이 바닥을 향해 맥없이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