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안개 속에서 뻗어 나온 사악한 눈동자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헤이즐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공기를 찢는 불길한 파찰음이 귓가를 때렸지만, 얼어붙은 다리는 땅바닥에 단단히 굳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 끝자락이 공기 중에 녹아내리듯 흐릿하게 비쳐 보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정령 가계부의 기적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대가로 찾아온 지독한 오한이 심장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헤이즐은 사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저 검은 광선에 심장이 꿰뚫린다면, 정령들과 맺은 비밀 계약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말 터였다. 마수를 사냥하는 벨페고르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다시는 돌아갈 곳 없는 차가운 길바닥으로 내던져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안 돼. 겨우 찾은 내 집인데…….’
포기할 수 없었다. 헤이즐은 주머니 속에서 작게 서걱거리는 차가운 감촉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난날 바람 정령 제피르가 칭찬의 대가로 건네주었던,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었다.
손가락 끝에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어 주머니 속의 조각석을 물리적으로 꾹 움켜쥐었다.
콰득.
이미 미세한 균열이 가 있던 낡은 돌멩이가 헤이즐의 작은 손아귀 안에서 완전히 바스러졌다. 그 순간, 주머니 틈새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은 가공할 만한 해방감이었다.
스아아아아—!
눈이 시리도록 맑은 민트빛 바람이 헤이즐의 발끝에서부터 회오리치며 수직으로 뿜어 올랐다. 낡은 조각석 안에 압축되어 있던 태고의 기류가 사방으로 요동치며, 황금빛 밀밭을 무자비하게 헤집어 놓았다. 세차게 불어 닥친 청량한 바람은 헤이즐의 앞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대기를 완벽하게 비틀어 버렸다.
바르톨로가 쏘아 보낸 검붉은 영안 마법의 광선이 헤이즐의 코앞에서 급격하게 굴절되었다. 기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검은 광선은 갈 길을 잃고 허공에서 어지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틈을, 벨페고르의 가주가 놓칠 리 없었다.
“감히 내 영지에서, 내 딸을 향해 이딴 구역질 나는 장난질을 치다니.”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평소 헤이즐 앞에서 억지로 얇고 부드럽게 쥐어짜 내던 다정한 딸바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장을 피로 물들이던 학살자, 데미안 알베리히 벨페고르 본연의 잔혹한 음성이었다.
쿠웅—!
데미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거대한 대검의 자루를 피격 위치의 흙바닥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검날이 대지에 박히는 순간, 굉음과 함께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바르톨로를 향해 무시무시한 충격파를 쏘아 보냈다. 대지를 가르는 무력의 파동은 바르톨로가 펼쳐 둔 불길한 마법진의 기초를 뿌리째 뒤흔들며 산산이 부수어 나갔다.
“커흑……!”
마법의 반동으로 바르톨로가 피침을 뱉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동시에 헤이즐의 주머니에서 뿜어져 나온 민트빛 폭풍이 검붉은 영안 마법의 잔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불길하고 탁한 에너지는 바람의 정화력에 밀려 빠르게 투명해지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알록달록한 정령들의 꽃바람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흔들리며 떨어지는 것은 은은한 살구빛 벚꽃 잎과, 연분홍빛 장미 꽃가루, 그리고 레몬빛으로 반짝이는 고운 모래 알갱이들이었다. 사방에 달콤하고 싱그러운 풀꽃 향기가 가득 감돌았다. 금기 마법의 흉포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동화 속 요정의 정원에 온 듯한 낭만적인 광경이 밀밭 전체를 수놓았다.
“오오…… 신이시여.”
뒤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교단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에는 검은 마법을 부리려던 심문관의 악한 시도가 헤이즐이 지닌 성스러운 성녀의 힘에 의해 아름다운 꽃바람으로 정화된 것처럼 보인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저 고결한 아기 천사께서 심문관님의 광기마저 꽃잎으로 보듬어 안으셨습니다!”
사제들의 맹목적인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작 사건의 원흉인 바르톨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아니야……! 저년은 이단이다! 정령의 더러운 낙인이 찍힌 괴물 녀석이란 말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 계약의 실타래를……!”
바르톨로는 품에서 또 다른 마법 도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정령의 흔적을 억지로 증폭하여 시각화해 주는 교단의 비기, ‘영안의 추적 렌즈’였다. 정교한 은빛 테두리에 핏빛 루비가 박힌 기괴한 단안경을 눈에 밀착시키며, 그는 헤이즐의 투명해진 손목을 가리키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장치를 헤이즐에게 조준하기도 전에, 조각석이 파괴되며 일어난 기류의 역풍이 바르톨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정령들의 순수한 마력과 금기 마법의 잔재가 뒤섞인 폭풍은 바르톨로가 쥔 장치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찌르르르릉!
불길한 파열음이 바르톨로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단안경에 박혀 있던 루비가 검붉은 빛을 비정상적으로 뿜어내더니, 이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바르톨로가 당황하여 장치를 내려놓으려 한 순간이었다.
퍼어엉—!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추적 렌즈 장치가 바르톨로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반파되며 터져 나갔다. 흩어진 금속 파편과 유리 조각이 그의 뺨과 이마를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다. 검은 그을음이 그의 오만한 얼굴을 볼품없이 뒤덮었고, 잘 정돈되어 있던 금발 머리는 폭발의 압력으로 사방으로 뻗쳐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
“으아아악! 내 눈! 내 얼굴이!”
바르톨로는 진흙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고고한 척 제국의 정의를 부르짖던 이단 심문관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탐욕과 독선에 찌들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가련한 패배자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완벽한 사이다이자, 통쾌한 역전이었다. 헤이즐의 정체를 폭로하려던 그의 추악한 음모는 스스로의 파멸을 재촉하는 도화선이 되어 돌아갔다.
“꼴좋군요.”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루시안이 헤이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손에는 헤이즐을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챙겨왔던 연분홍빛 실크 우산이 굳건하게 쥐어져 있었다. 루시안은 우산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치며, 바르톨로를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손으로 우리 동생을 가리키지 마십시오. 손가락을 전부 부러뜨려 마수 먹이로 던져주기 전에.”
루시안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에 사제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즐은 형언할 수 없는 오한 속에서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 준 오빠의 뒷모습이 너무나 크고 든든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헤이즐의 눈에 루시안의 어깨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불길한 보랏빛 기운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가계부 장부에 마이너스 채무 일지로 임시 등록해 둔 루시안의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이었다.
저 지독한 낙인이 언제 루시안을 덮쳐 불행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헤이즐의 가슴이 조여왔다. 지금은 겨우 바람 조각석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머지않아 루시안의 저 거대한 채무를 완전히 탕감하여 흑자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따뜻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헤이즐의 궁극적인 임무였다.
데미안은 대검을 다시 칼집에 써늘하게 밀어 넣으며, 바닥에 쓰러진 바르톨로를 향해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심문관 선생. 제국의 법에 따르면 이단 심문 과정에서 피심문자가 신성한 시련을 통과했을 경우, 심문관은 영지민과 가문의 명예를 훼손한 죄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지. 게다가 감히 내 딸에게 금기 마법까지 시도했으니…….”
데미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잔인하게 올라갔다.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네놈의 목은 이미 저 밀밭의 거름이 되었을 거다. 당장 이 더러운 무리를 이끌고 내 영지에서 꺼지거라. 황실에는 내가 직접 서한을 보내 네놈의 위선적인 악행을 낱낱이 고발해 주지.”
바르톨로는 깨진 안경 파편으로 피가 흐르는 얼굴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벨페고르 가문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차 있었다.
“벨페고르…… 이 가증스러운 마수 놈들…… 결코 살려두지 않겠다. 반드시 너희 가문의 뼈를 갈아 마시리라…….”
바르톨로는 사제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영지를 벗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모양새였으나, 그의 비틀린 뒷모습에서는 불길한 음모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데미안은 험악한 표정을 싹 지우고 헤이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말랑말랑한 살구빛 미소로 가득 찼다.
“우리 아기 요정님! 다친 곳은 없느냐? 무서운 아저씨가 이상한 마술을 부려서 많이 놀랐지? 아빠가 저 나쁜 아저씨를 아주 멀리 쫓아버렸단다!”
데미안은 양손으로 커다란 하트를 그리며 헤이즐의 기분을 맞춰주려 버둥거렸다. 루시안 역시 연분홍빛 우산을 고이 접어 어깨에 매고는,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가왔다.
“흥, 겁쟁이처럼 울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네요. 내가 직접 갈기를 빗겨 준 저 크림빛 포니도 동생이 울면 슬퍼할 거라고요.”
헤이즐은 그들의 지극한 ‘꽃밭 연기’에 가냘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손목은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 따뜻한 연극이 주는 안도감만은 진짜였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날 밤, 영지 외곽의 어두운 숲속.
그을린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바르톨로가 어둠 속에 서서 교단의 밀사들을 소집했다. 그의 손에는 황실 기사단과 은밀히 소통하던 통신 마석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심문관님, 정말로 이대로 퇴각하시는 겁니까? 황실에서 내린 영지 몰수 명령은 어쩌시고요?”
밀사의 물음에 바르톨로가 이빨을 드러내며 잔혹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넘실거렸다.
“퇴각이라니? 벨페고르 성의 지하 깊은 곳에는…… 대수림에서 생포해 온 흉포한 마수들이 수십 마리 갇혀 있지. 가문의 강인함을 증명하겠다며 수렵 대회를 위해 가두어 둔 괴물 놈들 말이다.”
바르톨로가 품바지 속에서 붉은 연금술 촉진제 시약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수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단적인 폭주를 유발하는 금단의 독약이었다.
“오늘 밤, 성 지하의 결계를 해제하고 이 촉진제를 뿌릴 것이다. 성 내부에서부터 폭주한 마수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벨페고르 가문이라 해도 아수라장이 되겠지. 그 혼란을 틈타…… 그 정령사 년을 납치해 이단으로 낙인찍어 압송하겠다.”
바르톨로의 음험한 속삭임이 숲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벨페고르 가문의 심장부를 겨눈, 인위적인 아수라장의 서막이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