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비린내 나는 붉은 안개가 황금빛 밀밭 위로 소용돌이치며 내려앉았다.

바르톨로가 치켜든 성검의 칼날 끝에서 번뜩이는 핏빛 마력은, 방금 전까지 대지를 가득 채웠던 싱그러운 보리 향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갓 돋아난 연청록빛 풀잎들이 붉은 기운에 닿자마자 까맣게 타들어 가며 바스러졌다.

쿠구구궁!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는 대지 한가운데에서, 거무죽죽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검열의 제단이 무덤처럼 솟아올랐다. 제단의 표면에는 기괴한 이빨 모양의 문양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마치 산 제물을 기다리는 굶주린 마수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공작가의 혈족 전원은 제단 앞으로 나와 피를 바쳐라!”

바르톨로의 목소리에는 광적인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의 단정했던 백금발은 땀과 흙먼지로 뒤엉켜 엉망이었고, 희게 번뜩이는 눈동자는 오직 벨페고르 가문의 파멸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단 한 방울이라도 더러운 마수의 기운이나 흑마법의 흔적이 섞여 있다면, 이 영지는 성스러운 불꽃으로 정화될 것이다!”

데미안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평소라면 당장 저 위선적인 성직자의 목을 꺾어 버렸을 그였으나, 지금은 등 뒤의 마차에 숨어 있을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마음에 걸렸다. 데미안은 억지로 살구빛 튜닉의 소매를 정돈하며, 가래 끓는 듯한 살벌한 본래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얇게 가다듬었다.

“이보게, 심문관 선생. 우리 요정 같은 가문은 그런 야만적인 피 흘리기 놀이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우리 아기 요정님이 무서운 걸 보면 밤에 잠을 설친단 말일세.”

“시끄럽다, 벨페고르! 네놈들의 가증스러운 연극도 여기까지다!”

바르톨로가 성검을 휘두르자 붉은 신성 결계가 공작가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결계의 장벽은 마치 끈적이는 피로 만들어진 벽처럼 공기를 차단하며 숨통을 조여 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사제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고, 루시안은 연분홍빛 실크 우산을 쥔 손에 핏대를 세웠다. 루시안의 뇌리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가문에 흐르는 마수의 잔재가 저 성검에 닿는 순간, 어떤 파국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루시안이 입술을 깨물며 제단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던 그때였다.

타타타탁.

황금빛 밀밭 사이를 가르고 작은 크림빛 부츠를 신은 발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안 돼요! 오빠는 안 돼요!”

마차의 문을 열고 뛰쳐나온 것은 다름 아닌 헤이즐이었다. 은은한 살구빛 레이스가 달린 소매를 펄럭이며, 헤이즐은 다람쥐처럼 재 빠르게 루시안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헤, 헤이즐? 안 돼, 들어가 있어!”

루시안이 경악하며 헤이즐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형 포니를 타고 달릴 때처럼 날랜 헤이즐의 몸짓이 한 발 더 빨랐다.

헤이즐의 동그란 눈동자가 제단 위에서 번뜩이는 붉은 칼날을 응시했다. 헤이즐은 알고 있었다. 루시안의 영혼에는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저 부정한 결계와 성검이 루시안의 피에 닿는 순간, 낙인이 자극받아 영지 전체에 끔찍한 재앙이 들이닥칠 터였다. 게다가 가계부 장부의 마이너스 채무 일지에 겨우 묶어둔 낙인이 풀려 버리면 공작가는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내가 막아야 해.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준 이 집을, 내 진짜 스위트 홈을 잃어버릴 순 없어!’

착한 아이 증후군이 헤이즐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늘 버림받을까 두려워 타인의 호의를 빚으로 여기던 아이는, 가문이 베풀어 준 과분한 사랑을 갚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작은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헤이즐은 바르톨로의 오만한 시선 앞으로 당당하게 다가가, 우유빛처럼 뽀얗고 조그만 손가락을 자진해서 내밀었다.

“제가 먼저 하겠어요. 저는 벨페고르의 막내딸이니까요.”

“헤이즐! 물러서라!”

데미안이 짐승 같은 포효를 지르며 결계를 격파하려 장검을 뽑아 들었으나, 바르톨로는 이미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스로 제 발로 걸어 나오다니, 기특한 제물이구나. 벨페고르의 더러운 피가 섞인 입양아년 같으니라고.”

바르톨로가 차가운 손길로 헤이즐의 작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뱀처럼 축축하고 불쾌한 감촉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은빛 성검 끝자락이 헤이즐의 손가락 끝을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검날이 살결에 닿기 직전, 성검이 공기 중의 정령력을 감지하고 불길한 붉은빛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마수의 기운이나 이단의 힘을 탐지하면 붉은 불꽃을 피워 올리는 성검의 특성이 발동하려는 참이었다.

‘지금이야!’

헤이즐은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릿속으로 외쳤다.

[정령 가계부 기동!]

시야 가득 반짝이는 파스텔톤의 청록빛 장부가 펼쳐졌다. - 보유 포인트: 1,200 FP.

[기능 사용: 에너지 치환 시스템 발주] [설명: 성검의 타락 판독 에너지를 순수한 정령의 기력으로 강제 치환하여 상쇄합니다.] [소모 포인트: 600 FP] [경고: 대가로 막대한 ‘행복과 기쁨의 감정’이 소모됩니다. 신체 투명화 및 체온 저하에 주의하십시오.]

‘결제할게요! 당장 결제해 주세요!’

헤이즐은 망설임 없이 영혼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샘솟던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행복감이 순식간에 차가운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작가가 선물해 준 민트색 리본의 포니를 탈 때 느꼈던 기쁨, 루시안이 밤새 구워 준 달콤한 쿠키를 먹을 때의 행복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감각이었다.

스스스스…….

헤이즐의 소맷자락 아래로 보이는 조그만 손목이 눈에 띄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살결이 유리처럼 투명해지며 뼈의 윤곽이 희미하게 비쳤다.

동시에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한 극심한 오한이 헤이즐의 온몸을 강습했다.

“으으…….”

헤이즐의 작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추워…… 너무 추워…….’

감정을 빼앗긴 자리가 시린 얼음 구덩이로 변해갔다. 몸이 정령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때, 헤이즐의 주머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바람 정령 제피르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 헤이즐! 정신 차려! 이거라도 쥐고 있어!

주머니 속에 넣어둔, 바람 정령으로부터 보답으로 받았던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 떠올랐다. 헤이즐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머니 속 조각석을 꽉 쥐었다. 조각석의 미세한 틈새에서 희미하지만 따스한 미풍이 흘러나와, 투명해져 가던 헤이즐의 손끝을 겨우 붙잡아 주었다.

“이 더러운 피가 성검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바르톨로가 광소하며 성검의 칼날로 헤이즐의 손가락 끝을 찔렀다.

작은 핏방울 한 방울이 성검의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성검의 칼날에 닿은 헤이즐의 피는, 바르톨로가 예상했던 흑마법의 붉은 불꽃을 피워내지 않았다.

치환 시스템을 통해 헤이즐의 목숨과 맞바꾼 순수한 정령의 기력이 성검의 신성 마력과 융합되는 순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왜곡이 일어났다.

쿠와아아아앙!

성검이 품고 있던 모든 붉은 탁기가 순식간에 정화되며, 대낮의 태양보다 더 눈부신 백색의 신성한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어, 어어……? 이게 무슨……?!”

바르톨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성검은 부정한 자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를 영접한 것처럼 찬란한 광휘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제단 주변의 붉은 결계를 단숨에 유리창 깨뜨리듯 박살 내 버렸다.

쩌저적! 콰앙!

“커헉?!”

성검에서 역류한 엄청난 신성 충격파가 바르톨로의 가슴팍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그의 얼굴에 가차 없는 빛의 채찍이 내리쳤다. 뺨이 보기 좋게 허물어지며 고개가 꺾인 바르톨로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데구르르, 쿵!

위선적이던 이단 심문관의 몸뚱이가 진흙탕에 처박히며 볼품없이 굴렀다. 그의 은빛 투구는 저 멀리 날아가 찌그러졌고, 단정하던 뺨에는 시퍼런 멍과 함께 흙먼지가 잔뜩 묻어났다.

“아, 아니…… 저 빛은……?!”

“성검이 이토록 찬란한 백색의 빛을 뿜어내다니……!”

뒤에서 지켜보던 사제들이 무릎을 꿇으며 경악했다. 그들은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성스러운 광휘 앞에 앞다투어 머리를 조아렸다.

“이 아이는…… 이 아이는 이단이 아닙니다! 신께서 손수 내리신 순결한 천사임이 틀림없습니다!”

“오오, 신이시여! 우리가 감히 신의 총애를 받는 성녀님을 의심하려 했다니!”

사제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헤이즐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황금빛 밀밭 위로 쏟아지는 백색의 빛은 마치 신의 축복처럼 헤이즐의 머리 위에 왕관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완벽한 역전이자 통쾌한 해소였다. 공작가를 이단으로 몰아 파멸시키려던 바르톨로의 음모가, 오히려 헤이즐을 제국 최고의 성녀이자 신성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데미안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꼈다.

“거봐라, 심문관 선생. 우리 아기 요정님은 너무나 무해해서 성검조차 감동해 우는구나. 저 녀석들은 왜 또 저러고 우는 건지 참으로 눈꼴시렵군.”

루시안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츤데레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흥, 감히 우리 동생을 의심하다가 꼴좋게 되었군요. 저러다 대머리가 되겠어.”

하지만 헤이즐은 안심할 수 없었다. 감정을 빼앗긴 대가로 온몸이 얼어붙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손목 끝부분은 공기 중에 녹아들 듯 흐릿한 상태였다.

진흙탕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바르톨로는 뺨을 감싸 쥐며 광기 가득한 눈으로 헤이즐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이럴 리가 없다…… 대지를 기만하고 나를 모욕한 흑마법의 야바위다……!”

위선과 오만으로 똘똘 뭉친 바르톨로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황실에서의 그의 입지는 물론, 황실 기사단과 함께 꾸민 음모가 전부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그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검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바르톨로는 품속에서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교단에서조차 금지된 검은 가죽 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인간의 해골 형상을 한 검은 마수 뼈 조각이었다.

“성검이 속았다면, 내 직접 네년의 영혼을 들여다보겠다!”

바르톨로가 광소하며 마수 뼈 조각을 으깨어 허공에 뿌렸다.

스스스스…….

대기 중에 불길하고 거대한 검은 눈동자 형상의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진 정령의 계약 흔적을 강제로 끄집어내어 찢어발기는 금기 중의 금기, ‘영안 마법’이었다.

“정령의 더러운 기운이 네년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내 직접 밝혀내리라!”

바르톨로가 손가락으로 헤이즐을 가리키자, 허공에 뜬 기괴한 검은 눈동자가 잔혹하게 눈을 뜨며 헤이즐의 심장을 향해 검은 광선을 쏘아 보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는 헤이즐을 향해, 피할 수 없는 금기의 마법이 기습적으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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