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단 심문소는 지금 이 순간부터 벨페고르 공작가의 전 영토를 대상으로 기한 없는 ‘불시 강제 감사’를 공표한다!”

바르톨로 심문관이 치켜든 황금빛 칙령장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오르쿠스 영지의 차가운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빛무리 속에서,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기사들의 거대한 먼지떨이와 빗자루에 밀려났던 수치심이 그의 눈동자를 붉은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흘.

귀를 찢는 듯한 선언이 평원에 메아리치자, 아빠 데미안의 너른 품속에 안겨 있던 헤이즐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살구빛 튜닉의 깃을 가볍게 매만지며, 품 안의 헤이즐이 추위에 떨세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이 헤이즐의 뺨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시 감사라니, 멀리서 오신 손님들께서 참으로 부지런하기도 하십니다.”

데미안이 목소리를 억지로 얇게 늘어뜨리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 가라앉은 잔혹한 마수 사냥꾼의 본능을 감추기 위해, 그는 짐짓 입꼬리를 부드러운 호선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우리 무해하고 가녀린 영지민들이 깜짝 놀라 감기라도 걸리면 어찌합니까? 사제님들의 거친 목소리에 귀여운 아기 새들도 둥지에서 떨어질까 걱정스럽군요.”

“공작, 궤변은 거기까지 하시오! 사흘 뒤에는 그 얄팍한 꽃밭 가면이 낱낱이 벗겨질 테니!”

바르톨로는 침을 튀기며 말의 고삐를 거칠게 돌렸다. 백색의 군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는 내내, 사제들의 차가운 시선이 벨페고르 성의 장벽을 샅샅이 훑었다. 영지민들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았고, 바람마저 얼어붙은 듯 숨을 죽였다.

‘사흘 뒤면 영지 전체가 구석구석 파헤쳐질 거야.’

헤이즐은 아빠의 어깨너머로 멀어지는 심문단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르쿠스 영지는 본래 사시사철 메마르고 검은 흙덩이만 굴러다니는 황무지였다. 만약 저 집요한 심문관들이 땅을 파헤치고 뒤져서 마수의 핏자국이나 척박함의 물증을 찾아낸다면, 벨페고르 가문은 황실을 기만한 죄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게다가 자신이 정령사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 정령을 저주하는 마수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단 심문소의 차가운 철창에 갇히게 될 것이 뻔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내가 지킬 거야. 내 스위트 홈을.’

그날 밤, 벨페고르 성의 가장 깊은 방.

창밖으로 은색 바늘 같은 초승달이 쓸쓸하게 걸려 있었다. 헤이즐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민트색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부드러운 크림빛 이불을 촉촉하게 적시는 긴장감 속에서, 헤이즐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정령 가계부’를 꺼내 들었다.

[보유 포인트: 1,200 FP]

지난 수렵 대회에서 마수들의 영혼을 정화하며 어렵사리 모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헤이즐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딛고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얘들아, 잠깐만 나와 줄래?”

바닥의 작은 틈새와 화분 귀퉁이에서 몽글몽글한 갈색 젤리 모양의 흙 정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꼬물거리는 흙 정령들은 헤이즐의 발가락 주위를 맴돌며 기분 좋은 흙내음을 풍겼다.

“오르쿠스 영지의 얼어붙은 대지를 전부 정화하고 싶어. 사흘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룻밤 사이에 아주 풍요롭고 아름다운 밭으로 만들어야 해.”

흙 정령들이 깜짝 놀란 듯 동그란 몸을 흔들며 삐익삐익 비명을 질렀다. 영지 전체의 흙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대규모의 기적이었다. 가계부의 책장이 거칠게 넘어가더니, 붉은색 글씨로 선명한 청구서가 허공에 떠올랐다.

[기적 발주: 대규모 영지 정화 및 속성 대지 개량] [소모 포인트: 500 FP] [경고: 기적의 대가로 계약자의 진심 어린 ‘따뜻한 감정(행복, 기쁨)’이 급격히 인출됩니다. 체온 저하 및 신체 투명화의 위험이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헤이즐은 마른침을 삼켰다. 500 FP. 한 번에 지불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액수였다. 하지만 지금 망설이면 사흘 뒤에 가문 모두가 파멸한다. 헤이즐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제할게.”

수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계부에서 눈부신 금빛 사슬이 뻗어 나와 헤이즐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었다.

“윽……!”

순간, 심장을 얼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한기가 전신을 지배했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행복감,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느꼈던 간지러운 기쁨, 오빠가 구워 준 달콤한 쿠키를 먹을 때의 온기가 순식간에 진공청소기로 빨려 나가듯 사라졌다.

손끝을 내려다보자, 뽀얗고 작은 손가락 마디가 서서히 밤공기 속으로 흐릿하게 녹아내리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추워…… 너무 추워…….’

온몸의 뼈마디가 얼어붙는 감각에 헤이즐이 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지난번 바람 정령 제피르에게 받았던,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었다. 조각석이 스스로 미세하게 진동하며 차가운 한기를 조금씩 흡수해 주기 시작했다.

“헤이즐? 괜찮아?”

바람의 틈새로 제피르가 작은 머리를 내밀며 걱정스레 울었다. 헤이즐은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참으며 조각석을 꼭 쥐었다.

“응…… 괜찮아. 빨리 정령들에게 신호를 보내줘.”

지불된 포인트가 대지로 스며들자, 방 안의 흙 정령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창문을 넘어 어두운 영지의 대지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밤하늘을 수놓는 황금빛 미세한 가루들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오르쿠스 영지 전역으로 흘러내렸다.

검게 죽어 있던 흙들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있던 얼음 장벽 아래로 깊고 풍요로운 생명의 박동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붉은 장미빛 아침 해가 동틀 무렵.

바르톨로가 보낸 성직자들과 기사단 일동이 벨페고르 성의 외곽 초소 앞에 도달했다. 그들은 영지의 황폐함을 샅샅이 감시하여 흑마법의 증거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이른 아침부터 이빨을 갈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뒤져보아라. 마수들의 피로 물든 대지와 썩어 문드러진 황무지가 제국의 법도를 어찌 어겼는지 낱낱이 밝혀낼 것이니.”

사제 중 한 명이 오만한 얼굴로 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성문 앞에는 데미안이 연한 살구빛 튜닉을 입고, 빗자루를 장난감처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그 옆에서 루시안은 귀여운 분홍빛 실크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삐딱하게 서서 사제들을 노려보았다.

“어라, 무서운 아저씨들이 벌써 오셨네?”

데미안이 억지로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짜내며 뻔뻔하게 웃었다.

“우리 벨페고르 가문은 대대로 ‘친환경 유기농 자연 요정 주의’ 가풍을 고수하고 있답니다. 영지가 너무 무해해서 사제님들이 심심하실까 걱정이군요.”

“흥, 해괴한 소리는 사흘 뒤 단두대 위에서나 하시지.”

사제단이 비웃으며 언덕 너머의 경작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본래 이곳은 사시사철 메마르고 거친 바람만 불어 닥쳐, 단 한 포기의 풀도 자라지 못하는 얼어붙은 죽음의 땅이었다. 사제들은 이미 이곳이 황폐한 쓰레기장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덕 정상에 올라선 사제단의 발걸음이 일제히 우뚝 멈춰 섰다.

“이…… 이게 무슨…….”

앞장서던 사제의 손에서 성서가 툭 떨어져 진흙 대신 부드러운 풀밭 위로 굴러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죽음의 땅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 위로, 하룻밤 사이에 자라난 황금빛 밀밭이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일렁이고 있었다. 연노란빛 밀이 파도치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바람에 흔들렸고, 그 사이사이로 민트빛 풀잎들이 이슬을 머금은 채 아기자기하게 속살거리고 있었다. 사시사철 몰아치던 매서운 북풍은 간데없고, 은은한 살구 향과 달콤한 흙내음이 섞인 온화한 미풍이 사제들의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말도 안 돼!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얼어붙은 자갈밭이었거늘!”

사제단장이 비명을 지르며 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대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톱 사이에 낀 흙은 검고 썩은 마수의 기운이 아니라, 쥐어짜면 꿀처럼 달콤한 수분이 배어 나올 듯한 극상의 유기농 황토였다.

“마력 반응을 조사해라! 분명 사악한 최면 마법이나 환각일 것이다!”

성직자들이 허겁지겁 신성한 성수를 뿌리고 탐지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은빛 마력의 파동은 대지에 닿자마자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평온하게 스며들 뿐이었다. 그 어떤 인위적인 흑마법도, 억지로 가해진 연금술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대자연이 내린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기적의 풍요만이 그곳에 실재했다.

“신이시여…… 이 북부의 끝자락에 이런 낙원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젊은 사제 한 명이 밀 이삭을 손에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신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국 그 어느 곡창 지대도 이토록 완벽한 생명력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신의 성역을 모독하려 했던 것입니까?”

사제들 몇몇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단 심문 의지는 황금빛 밀밭이 뿜어내는 비현실적인 평화로움 앞에 완전히 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데미안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루시안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루시안, 저 사제 녀석들 왜 저러느냐? 갑자기 단체로 풍년 감사 예배라도 드리는 모양인데.”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요즘 교단의 트렌드가 유기농 밀밭에서 오열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험악하게 생긴 자들이 저러고 있으니 참으로 눈꼴시렵습니다.”

루시안이 츤데레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 역시 눈앞의 기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 마차 안에서 손가락이 아직 조금 투명한 채로 숨어 있던 헤이즐은, 사제들이 기절초풍하며 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냈어…… 포인트를 쓴 보람이 있어.’

하지만 통쾌한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모두 물러서라! 이 사악한 야바위에 속아 넘어가지 말란 말이다!”

저 멀리 언덕 뒤편에서, 분노로 눈이 뒤집힌 바르톨로가 성검을 빼 들고 폭풍처럼 달려왔다. 그의 은빛 갑옷 곳곳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위선적이고 단정한 얼굴은 이미 광기와 굴욕감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황무지가 곡창 지대로 변하는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다! 이것은 대지를 기만한 가장 질 나쁜 흑마법이자 악마와의 계약이다!”

바르톨로가 거칠게 성검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성검의 칼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신성 마력이 황금빛 밀밭의 상공을 피비린내 나는 붉은 안개로 뒤덮기 시작했다.

“벨페고르 공작! 네놈들의 가증스러운 피가 마수와 섞여 있는지, 아니면 금지된 악마의 계약으로 연명하고 있는지 이 성검이 직접 증명할 것이다!”

바르톨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대지 한가운데에 붉은색 검열의 제단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혈족 전원은 제단 앞으로 나와 피를 바쳐라! 단 한 방울이라도 더러운 기운이 섞여 있다면, 그 즉시 이 영지 전체를 불태워 버릴 것이다!”

바르톨로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붉은 제단 위의 칼날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벨페고르 가문을 향해 번뜩였다. 새로운 피의 검열이, 헤이즐과 공작가를 향해 잔혹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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