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푸른 이끼가 가득한 고대석 관문 너머로, 칠흑처럼 어두운 철판을 두른 암흑 군마들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말들의 발굽이 영지 경계선을 밟는 순간, 수렵 대회의 훈훈한 열기가 가득했던 평원은 순식간에 찬 서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
가면을 쓴 영지인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가운데, 무리의 선두에서 은빛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진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장 위에 수려하게 내려앉은 사내, 이단 심문관 바르톨로 가스외르였다. 그의 뒤편으로 연하늘빛 사제복을 입은 심문소 사제들이 열을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나, 대낮부터 웬 까마귀 떼람?”
헤이즐은 아빠 데미안의 넓은 품에 꼭 안긴 채, 이불자락 틈새로 살며시 눈을 뜨고 밖을 살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바람 정령 제피르가 선물해 준 금이 간 낡은 바람 조각석이 차갑게 식어 가며 헤이즐의 허벅지를 콕콕 찔러댔다. 위험한 냄새를 감지한 정령의 경고였다.
바르톨로의 뒤에 선 사제들이 품속에서 은빛으로 매끄럽게 닦인 탐지용 지팡이를 슬그머니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가느다란 지팡이 끝에서 미세한 백색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정령 계약 탐지 마법이야!’
헤이즐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저 마법이 이 자리에 퍼진다면, 헤이즐 주변을 맴돌며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바람 정령들과 대지 정령들의 흔적이 모조리 탄로 날 터였다. 벨페고르 가문은 정령을 저주하는 마수 사냥꾼 가문인데, 입양된 아기가 정령사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파문은 물론이고 즉시 이단으로 몰려 끌려가게 된다.
사제들이 마법을 기동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려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에취! 에츄우!”
공기를 찢는 듯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작고 말랑말랑한 재채기 소리가 사냥터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데미안의 품속에 파묻혀 있던 분홍빛 이불 뭉치가 크게 들썩였다. 헤이즐은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일부러 이불 밖으로 양팔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사제들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조그만 손가락을 곧장 뻗었다.
“아빠아…… 저기 뾰족한 은색 막대기를 든 아저씨들이 헤이즐을 아프게 해요! 코가 간질간질하구, 머리가 띵해요오……!”
아기의 칭얼거림은 가녀린 방울소리처럼 가냘팠지만, 그 파급력은 지진과도 같았다.
“뭐라?”
데미안의 살구빛 튜닉 아래로 숨겨져 있던 거대한 근육이 일시에 꿈틀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며, 방금 전까지 아기를 보며 짓고 있던 바보 같은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히 내 아기 요정님의 시야에 그딴 흉물스러운 쇳덩이를 들이밀어?”
“히익!”
탐지 지팡이를 치켜들려던 사제들이 데미안의 형언할 수 없는 살기에 짓눌려 숨을 헉 들이켰다. 지팡이를 쥔 손들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고, 일렁이던 백색 마력은 형체도 없이 바스러졌다. 사제들이 정령 계약 탐지 마법을 돌리기도 전에, 헤이즐의 영리한 연기가 그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바르톨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위에서 내려섰다. 그의 하얀 사제복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위선적인 미소를 입가에 매단 그가 데미안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벨페고르 공작. 제국 심문소의 명을 받아 영지 내에 도사린 ‘이단의 흔적’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방금 마수 폭주 사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정령의 사악한 주술이 개입된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겠군요.”
그의 시선이 데미안의 품에 안긴 헤이즐에게로 향했다. 뱀처럼 집요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불쾌한 시선이 헤이즐에게 닿기 직전,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존재가 있었다.
“그 더러운 눈깔을 당장 돌리지 않으면, 네 놈의 목구멍에 이 우산대를 박아 넣어 주지.”
루시안이었다. 그는 평소 헤이즐을 지켜주기 위해 들고 다니던 연분홍빛 실크 우산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의 검을 반쯤 뽑아 들고 있었다. 스릉,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평원의 공기를 갈랐다.
“루시안 소공자, 제국의 심문관에게 칼끝을 겨누는 것은 반역—”
“시끄러워.”
루시안이 차가운 칼끝을 바르톨로의 목울대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검기가 바르톨로의 하얀 깃을 스쳐 지나갔다. 루시안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대륙 북부의 만년설보다 차가웠다.
“내 여동생은 지금 매우 지쳐 있다. 방금 전 마수의 습격으로 놀란 아기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대가리가 장식이라 눈앞의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가?”
“소공자!”
“한 걸음만 더 다가와 봐라. 심문관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대가리를 수박처럼 쪼개 줄 테니.”
루시안의 거친 언사에 뒤에 서 있던 공작가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고쳐 잡았다. 겉으로는 분홍빛, 민트색 스웨터를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만큼은 당장이라도 제국군 전체를 도륙할 기세였다.
헤이즐은 루시안의 뒤에서 그의 어깨 너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 저게 뭐지?’
루시안의 어깨 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 검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령들의 눈에만 보이는, 지독한 ‘불행의 악재 낙인’이었다. 사춘기 소년의 연약한 틈을 타 스며든 사악한 저주의 기운이 루시안의 생명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었다.
‘저대로 두면 오빠가 위험해. 저 악재가 언제 터져서 오빠를 다치게 할지 몰라.’
헤이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칼을 뽑아 든 오빠였다. 헤이즐은 몰래 이불 밑으로 손을 뻗어,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정령 가계부, 열려라!’
* * *
[ 정령 가계부 ] * 보유 포인트: 1,200 FP * 진행 중인 거래: 없음 * 특수 기능: 채무 일지 (마이너스 계정 등록 가능)
* * *
헤이즐은 눈동자를 굴리며 장부의 빈 지면에 루시안의 상태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루시안 알베리히 벨페고르가 지닌 [불행의 악재 낙인]을 독점 정령 채무 계정으로 임시 등록해 줘. 그 악재를 내가 대신 떠안는 채무로 장부화하겠어!’
정령 가계부가 잉크를 머금은 듯 스르륵 글자를 붉게 물들였다.
[경고: 대상을 지정하여 악재를 흡수할 시,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사용자의 ‘따뜻한 감정’이 소모되며 체온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정말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응, 진행해!’
망설임은 없었다. 순간, 헤이즐의 심장 부근에서 따스한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아빠와 오빠의 사랑을 느끼며 피어올랐던 몽글몽글한 행복감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이불 속에 가려진 발가락 끝이 미세하게 투명해지며 바스라지려 했다.
‘으윽…… 춥다.’
헤이즐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 대가로, 루시안의 어깨 위를 짓누르고 있던 검은 안개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헤이즐의 정령 가계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띵동!] [루시안의 '불행의 악재 낙인'이 마이너스 채무 일지에 등록되었습니다.] [-300 FP 상당의 채무로 장부화 완료. (추후 흑자 탕감 가능)]
루시안의 안색이 눈에 띄게 맑아졌다. 기분 탓인지 늘 찌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편안하게 펴졌다. 정작 헤이즐은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한기를 느꼈지만, 오빠의 가벼워진 어깨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은밀한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바르톨로는 루시안의 칼끝 앞에서 모욕감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벨페고르 공작! 아무리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라 한들, 정당한 심문관의 수색을 무력으로 막아서는 것은 명백한 법률 위반이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법률?”
그때, 군중 속에서 공작가의 행정관이 돋보기를 치켜올리며 두꺼운 가죽 책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행정관의 얼굴에는 근엄함이 가득했다.
“바르톨로 경. 벨페고르 공작령의 특별 자치 법률 제1장 4조를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바르톨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행정관은 짐짓 엄숙하게 책장을 넘기며 낭독하기 시작했다.
“벨페고르 공작령 내에서는 영지의 가장 존엄하고 무해한 존재인 ‘아기 요정님’의 수면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보장한다. 만약 이를 방해하거나, 아기 요정님에게 위해가 될 만한 날카로운 철제 도구(탐지 지팡이 포함)를 노출시켜 울음을 터뜨리게 할 경우, 이는 ‘아기 수면 방해죄 및 정서 학대죄’에 해당한다.”
“……뭐?”
바르톨로의 얼굴이 멍하게 굳어졌다. 사제들 역시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 죄를 범한 자는 영지법에 의거, 즉시 공작령 영토 밖으로 강제 추방당하며, 향후 3년간 영지 내의 모든 디저트류 및 특산물 구매가 금지된다. 또한, 아기 요정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대가로 광장 분수대 앞에서 3시간 동안 참회의 ‘요정 댄스’를 추어야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해괴한 법률이 제국령 내에 존재한단 말이냐!”
바르톨로가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지만, 데미안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한다. 내가 방금 마음속으로 제정했으니까.”
“공작!”
“벨페고르령의 법은 곧 나다. 그리고 내 법은 내 딸의 눈물 한 방울보다 가볍지 않지.”
데미안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찰나의 순간, 공작가의 전사 수십 명이 바르톨로와 사제들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들의 손에는 칼 대신, 어디선가 가져왔는지 모를 거대한 빗자루와 먼지떨이, 그리고 ‘요정님 수면 중’이라고 적힌 커다란 푯말이 들려 있었다.
“법 집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엄숙하게 외치며 먼지떨이를 휘둘렀다.
“콜록! 콜록! 이게 무슨 짓거리냐!”
“아기 요정님의 단잠을 방해하는 먼지 같은 자들은 쓸어내는 것이 법입니다! 자, 물러가십시오! 훠이! 훠이!”
기사들이 뻔뻔한 얼굴로 빗자루를 휘두르며 심문단의 말발굽 아래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영지민들 역시 일제히 동조하여 소리쳤다.
“가라! 우리 요정님 주무신다!”
“얼굴도 험악하게 생겨서 아기 꿈자리 뒤숭숭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꺼져라!”
위엄 넘치던 이단 심문단은 졸지에 아기 낮잠을 방해한 흉악범 취급을 받으며, 거대한 빗자루와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바르톨로는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우스꽝스럽고 굴욕적인 대접에 얼굴이 붉다 못해 검푸르게 죽어갔다.
“이…… 이 오만방자한 마수 놈들이……!”
바르톨로는 말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채며 가슴팍에서 황금색 인장이 찍힌 두꺼운 양가죽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의 눈에 살기 어린 광기가 번뜩였다.
“벨페고르 공작! 네놈들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 칙령장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바르톨로가 칙령장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자, 눈부신 황금빛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황제 폐하의 명이다! 벨페고르 영지 내에 정령사의 흔적과 불법 마수 연금술의 징후가 포착되었으므로, 이단 심문소는 지금 이 순간부터 벨페고르 공작가의 전 영토를 대상으로 기한 없는 ‘불시 강제 감사’를 공표한다!”
바르톨로의 우렁찬 목소리가 평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사흘 뒤, 심문소의 대규모 정화 기사단이 이 성의 지하 감옥부터 영지의 가장 깊은 계곡까지 샅샅이 뒤질 것이다! 만약 단 하나의 정령 흔적이라도 나온다면, 벨페고르 가문은 그날로 멸문이다!”
그의 선언에 영지민들의 안색이 다시금 새파랗게 질려갔다. 사흘 뒤, 영지 전체를 강제로 짓밟겠다는 전면적인 전쟁 선포나 다름없었다.
헤이즐은 아빠의 품속에서 차게 식은 손을 꼭 쥐며 바르톨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거대한 폭풍우가, 마침내 벨페고르 공작가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