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머의 숫자가 0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유압식 잠금장치가 풀리는 마찰음이 고막을 찔렀다. 철문이 무겁게 뒤로 밀려나며 지하실 내부의 정체된 공기가 쏟아졌다. 습기 찬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인화지 특유의 시큼한 화학 약품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강인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문턱을 넘어섰다. 손가락 끝에 묻은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아 끈적였다. 뇌세포가 괴사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타는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한세희의 마지막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영구히 소멸했다는 사실을 뇌가 인지하기도 전에, 눈앞의 광경이 강인의 시각 피질을 마비시켰다.
사방의 벽이었다.
콘크리트 벽면 전체가 수백 장의 사진으로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배경은 하나같이 어두운 조명 아래 붉은 기와가 무너져 내린 양옥집이었다. 15년 전 청량리 미제사건 현장이었다. 사진의 중심에는 굳어버린 시신이 있었고, 그 옆에 한 사내가 주저앉아 절규하고 있었다.
강인 자신이었다.
젊은 시절의 강인이 세희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순간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플래시 불빛을 받아 하얗게 번진 채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사진은 강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극단적으로 확대했고, 어떤 사진은 세희의 목에 남은 삭흔을 정밀하게 포착했다. 인화지들은 붉은색 플라스틱 핀으로 고정되어 있어, 마치 벽면 전체가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역병의 피부처럼 보였다.
"이거 미친 새끼네."
뒤따라 들어온 마광두가 짧게 가래침을 뱉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었다. 철저한 기계적 혐오만이 담겨 있었다. 마광두는 허리춤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인아, 넋 놓고 있을 시간 없다. 쥐새끼 냄새가 난다."
강인은 눈을 세 번 깜빡였다. 시선을 사진에서 떼어내 방 한구석에 놓인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세 자루의 볼펜이 정확히 수평을 이룬 채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강인은 손을 뻗어 한 자루의 볼펜을 집어 들었다가, 이내 그것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완벽히 수평이 맞지 않으면 손끝이 저려오는 강박이 다시 도졌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명확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아래, 어두운 암전 속에서 미세한 가죽 옷의 마찰음이 들렸다.
"0.15초."
강인이 수치를 읊조렸다. 소리가 발생한 지점과 고막에 도달한 시간의 간격이었다.
"우측 캐비닛 뒤쪽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광두의 신형 전투화가 바닥을 차고 나갔다. 마광두는 주저 없이 캐비닛 옆의 어둠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둔탁한 타격음이 두 번 이어졌다. 마광두가 낚아챈 것은 검은색 후드티를 눌러쓴 마른 체구의 사내였다. 사내는 바닥에 처박힌 채 쇠로 된 안경테가 비뚤어지자 그것을 고쳐 쓰려 버둥거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무식한 앞잡이 새끼야!"
사내가 쇳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임창수였다. 다크웹에서 '백색 서재'의 고정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서도현의 수족 노릇을 하던 추종자였다.
마광두는 임창수의 한쪽 팔을 등 뒤로 꺾어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인화지 몇 장이 그들의 몸싸움으로 인해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조용히 해라. 귀청 떨어진다."
마광두가 무릎으로 임창수의 척추를 압박했다. 임창수의 입에서 컥 하는 신음과 함께 더러운 침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인은 천천히 다가가 임창수의 앞에 멈추어 섰다. 강인의 시선은 여전히 임창수의 눈을 피한 채, 그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는 푸른색 잉크 자국에 머물렀다.
"서도현은 어디 있지."
강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거세된 음성이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임창수는 바닥에 뺨을 붙인 채로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찌그러진 안경 너머로 광기가 서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스승님. 드디어 오셨군요. 하지만 늦었습니다. 당신의 시대는 끝났으니까요."
"질문에만 답해라."
강인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말했다.
"학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계명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그 책은 완전한 실패작입니다. 논리적 정합성도 없고,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는 쓰레기 같은 이론일 뿐이지요. 학자님이야말로 당신의 이론을 교정하고 완성하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임창수의 목소리가 고조되며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전신이 흥분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광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두 앞코로 임창수의 오른쪽 정강이를 걷어찼다. 뼈와 가죽이 부딪치는 가혹한 타격음이 울렸다.
"악!"
임창수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야, 대학원생. 너 교수님 앞에서 목소리가 너무 크다. 족보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훈수질이야? 학자인지 개뼈다귀인지 하는 놈은 지금 어디서 똥줄 타고 있냐?"
마광두가 다정하게 물으며 구두 굽으로 임창수의 손가락을 지그시 밟았다.
"학자님은... 절대 잡히지 않아. 그분은 완벽한 공식을 설계하셨다. 너희 같은 개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임창수는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뜨며 강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숭배와 증오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강인은 임창수의 외침을 들으며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격자무늬 노트를 찢어 만든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종이 위에는 조밀한 글씨로 무수한 숫자와 지명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도주로 설계도였다.
강인은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
'장부를 가동한다.'
뇌세포가 괴사하는 고통의 전조 증상으로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강인의 오감이 차단되며 뇌 속의 가상 시뮬레이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임창수가 이 종이에 펜을 대고 글씨를 쓸 때의 미세 촉각 감각이 정량화된 수치로 변환되어 강인의 뇌리에 기록되었다.
[필압: 410g] [마찰계수: 0.28] [펜촉의 진동 주파수: 120Hz]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스며들 때 발생한 미세한 저항력이 강인의 손가락 끝을 통해 역추적되었다. 뇌는 임창수가 이 지도를 작성하던 순간의 시간적 흐름과 공간적 좌표를 완벽히 재현해 냈다.
그의 필체 밑바닥에 숨겨진 무의식의 정렬 방식이 보였다. 그것은 철저히 '0412'라는 난수배열을 기반으로 암호화된 격자 좌표였다.
강인의 동공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2화에서 다크웹 캡처 이미지 속 '백색 서재' 표식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난수배열이었다. 임창수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도주 경로의 기하학적 교차점을 이 '0412'라는 상수를 대입해 설계해 두었던 것이다.
강인은 시뮬레이션을 종료했다. 머릿속에서 강인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어머니가 입었던 옷의 색깔이 안개처럼 지워져 전소되었다. 소중한 사적 기억 하나가 다시 소멸했다. 그러나 강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단지 책상 위의 지도를 조용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틀렸다."
강인이 낮게 뱉었다.
임창수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뭐라고? 뭐가 틀렸다는 거야!"
강인은 지도의 중간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좌표. 국도 3호선과 지방도 487호선이 교차하는 지점. 너는 여기서 차량을 폐기하고 도보로 수로를 통해 탈출하는 경로를 설계했다. 0412의 난수를 대입해 계산한 격자 오차는 12미터다."
임창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너는 서도현의 설계를 맹신한 나머지 기초적인 수리학적 오류를 범했다. 교차 지점의 수로는 하수 종말 처리장과 연결되어 있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문이 개방된다. 수문의 개방 압력은 4.2바(bar). 유속은 초속 3.2미터다. 너 같은 체구의 인간이 진입하는 순간 수압에 밀려 콘크리트 벽면에 두개골이 파쇄된다. 생존 확률은 3.8% 미만이다."
강인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차갑고 정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인은 임창수의 일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정체된 눈빛이 임창수의 심장부로 파고들었다.
"너는 내 저서 '범죄 행동 분석과 프로파일링의 실제' 145페이지를 교과서 삼아 이 도주로를 설계했겠지. '추적자의 시야를 분산시키기 위해 수평적 공간 이동과 수직적 심도 변화를 동시에 적용하라.' 맞나?"
임창수는 숨을 들이켜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 이론은 12년 전, 경기 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사용했던 경로를 기반으로 작성된 귀납적 오류다. 나는 이미 8년 전 개정판에서 그 페이지의 내용을 전면 철회했다. 수로를 통한 수직 이동은 추적자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가두는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강인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임창수의 전신을 무겁게 덮었다.
"너희가 신성시하는 서도현의 공식은, 결국 내가 버린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오답 노트를 베낀 것에 불과하다. 모방은 창조를 넘을 수 없다. 위작은 결국 위작일 뿐이다."
지하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임창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가 평생을 바쳐 숭배해 온 '학자'의 완벽한 수학 공식이, 그리고 자신이 설계한 무오한 도주 계획이 창시자의 단 한 마디 질문과 몇 줄의 암송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해 버린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임창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긁었다. 발버둥 치는 그의 손가락톱 밑으로 시멘트 가루가 껴 들어갔다.
"학자님은 완벽해! 그분이 설계한 공식은 단 하나의 오차도 없단 말이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은퇴한 퇴물 주제에!"
"퇴물한테 밟혀서 빽빽거리는 꼴이 아주 볼만하네."
마광두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임창수의 뒷덜미를 더 강하게 짓눌렀다.
"강인아, 이 새끼 도주로 좌표 확보했으니까 광수대에 넘기면 끝나냐? 아니면 여기서 손가락 몇 개 더 부러뜨려 볼까? 난 후자가 더 마음에 드는데."
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도의 여백에 적힌 아주 미세한 화학 기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CN- + H2SO4 -> HCN]
시안화칼륨과 황산의 반응식이었다. 치명적인 독가스인 시안화수소의 제조 공식이었다.
그 순간, 임창수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의 동공이 위를 향해 까뒤집히기 시작했다.
"학자님이..."
임창수의 목구멍에서 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입술 틈새로 붉은 기운이 섞인 검은색 피가 울컥 쏟아졌다.
"컥... 헉..."
"야, 이 새끼 왜 이래?"
마광두가 급히 그를 뒤집어 눕혔다. 임창수의 전신이 마치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피부 아래로 파란 정맥들이 기괴하게 팽창하며 도드라졌다.
강인은 즉각 임창수의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다가 이내 급격히 속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의 위장 속에서 치명적인 독극물이 흡수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체적 반응이었다.
임창수는 검은 피가 섞인 침을 강인의 옷소매에 뿜어내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강인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강인의 살을 파고들었다.
"학자님이... 설계한... 마지막 독극물 입수... 공식은..."
임창수의 목소리가 젖은 모래처럼 갈라졌다.
"이미... 시작... 되었다... 스승님의... 마지막... 무덤에서..."
말을 마친 임창수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안경이 완전히 벗겨져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지하실에 설치된 다른 타이머가 작동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똑, 똑, 똑, 똑.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액체가 일정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