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스마트키 액정 화면이 검게 죽었다. 이어서 액정 안쪽에서 붉은 발광다이오드 소자가 점멸하며 메시지를 출력했다.

[접속 성공, 학자의 서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치직거리는 고주파음이 대기를 찢었다. 기기 외장 틈새로 회백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인의 손목에 감긴 가죽 붕대 사이로 진물이 배어 나왔다.

"이런 미친 새끼가."

옆에 서 있던 마광두가 강인의 손에서 스마트키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두꺼운 손이 허공을 크게 가르며 열려 있던 탑차 뒷문 밖으로 기기를 내던졌다.

폭발은 0.5초 뒤에 일어났다.

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저수지 언덕 아래 풀숲에서 성냥갑만 한 불꽃이 일었다. 사방으로 튄 플라스틱 파편이 빗물 고인 바닥으로 떨어지며 칙 소리를 냈다. 구린 탄내가 차량 내부까지 밀려들었다.

강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상 입은 손목을 가볍게 털어냈을 뿐이다. 마광두는 탑차 문틀을 잡고 밖을 내다보며 혀를 찼다.

"조금만 늦었어도 손가락 몇 개는 날아갔다. 저 새끼는 장난감을 아주 고약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어."

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흙바닥에 떨어져 반쯤 타버린 스마트키의 메인보드 파편이 검은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니트릴 장갑을 낀 손으로 파편을 주워 올렸다. 열에 녹아내린 플라스틱 하우징 안쪽에 은색 부품 번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 표면에 그을음과 함께 눌어붙은 네 자리 숫자가 보였다.

[0412]

강인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다크웹 포럼 '백색 서재'의 메인 페이지 구석에서 보았던 특정 난수배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페이지 번호가 아니었다. 놈은 이 숫자를 마스터 패스워드로 활용하여 피해자의 차량 GPS 시스템을 해킹하고 위치를 추적했다. 2화에서 다크웹을 분석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단서의 고리가 비로소 맞물렸다.

"숫자 0412. 학자의 고유 표식이자 스마트키 조작을 위한 암호 키였다."

강인이 파편을 수거용 비닐봉지에 넣으며 말했다. 뒤에서 서성이던 마광두가 흙을 털어내며 다가왔다.

"그럼 저번 다크웹에서 본 그 암호가 진짜 이거였다고? 아주 꼼꼼한 새끼네. 제 발자국을 일부러 남겨두는 꼴이잖아."

"완벽주의자의 오만이다. 자신의 공식을 우리가 해독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는 거지."

그때 저수지 진입로 쪽에서 전조등 불빛 두 줄기가 어둠을 뚫고 쏟아졌다. 타이어가 젖은 자갈밭을 짓개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구두 굽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거기 둘, 손 떼고 뒤로 물러서."

서늘한 목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손전등 불빛이 강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광역수사대 소속 신참 형사 둘이 권총 집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은영채 팀장의 수하들이었다.

"하강인 씨, 그리고 마 전 형사님. 피의자 신분 차량 갈취 및 현장 증거인멸 혐의로 임의동행하겠습니다."

앞장선 젊은 형사가 수갑을 꺼내 들었다. 마광두가 길게 침을 뱉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어딜 대고 눈뽕질이야? 너희 반장한테 전화해라. 내 퇴직금 깎아 먹으려고 작정했냐?"

"마 전 형사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현장 훼손은 중죄입니다."

신참 형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강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형사의 가슴팍에 달린 공무원증을 응시했다. 그의 옷깃에 묻은 붉은 황토와 어설픈 견착 자세,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관찰했다.

"안민우 형사."

강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내려앉았다.

"3년 전 서대문구 미제 강도 살인 사건. 용의자의 혈흔 검출 단계에서 네가 증거 튜브 라벨을 바꿔치기한 실수를 덮으려고 은영채 팀장이 보고서를 조작했지. 그 덕분에 넌 징계를 면하고 광수대에 들어왔고."

안 형사의 손전등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내 서재 세 번째 서랍에 당시 국과수 원본 감정서 사본이 있다. 마저 임의동행을 고집하고 싶다면 정식 수색영장을 발부받아서 와라. 아니면 지금 당장 그 거슬리는 불빛을 끄고 비켜서거나."

마광두가 안 형사의 어깨를 굵은 손바닥으로 툭 치며 지나갔다.

"들었지, 꼬맹아? 뇌가 반쯤 썩었어도 하강인은 하강인이다. 알아서 기어라."

형사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수갑을 쥐었던 손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었다. 강인은 그들을 지나쳐 탑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마광두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낡은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저수지를 빠져나갔다.

***

저수지 인근의 외딴 대포집. 노란 백열등 아래 탁자는 기름때로 끈적거렸다. 구석 자리의 유리가 깨진 창문 틈새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마광두가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금속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희 유품이다. 네 녀석이 사자장부인지 뭔지 쓰다가 대가리 터질까 봐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

낡은 태엽식 회중시계였다. 은색 도금이 대부분 벗겨져 황동 본체가 누렇게 드러나 있었고, 전면 유리에는 사선으로 미세한 실금들이 가 있었다. 15년 전 한세희가 늘 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강인은 붕대가 감긴 손으로 시계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시계 우측의 용두를 돌려보았으나, 내부 기어가 무언가에 걸린 듯 틱, 하는 마찰음만 반복될 뿐 초침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인은 시계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유리 안쪽의 문자판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시계 뒷면의 덮개를 손톱 끝으로 벌려 내부 무브먼트를 노출시켰다. 톱니바퀴들이 얽혀 있는 미세한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황동색 기어 사이, 톱니가 맞물리는 중심부에 검은색의 아주 작고 단단한 이물질이 끼어 있었다. 단순한 먼지나 내부 부속의 파편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초미세 금속 칩의 일부처럼 보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강인이 중얼거렸다. 마광두가 탁자 위의 물컵을 들이켜며 대꾸했다.

"나야 모르지. 세희가 죽던 날 현장에서 수거된 뒤로 한 번도 안 열어봤으니까. 왜, 그것도 그 카피캣 새끼 작품이냐?"

"아니다. 이건 훨씬 오래된 흔적이다."

강인은 시계 덮개를 다시 닫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이물질의 정체는 지금 밝힐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강력한 압박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관자놀이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강인은 반사적으로 이가 맞부딪치는 것을 막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주변의 소음이 멀어졌다.

뇌세포의 급격한 괴사 신호였다. 기말 장부를 가동한 대가는 유예 없이 찾아왔다.

강인은 머릿속의 기억 저장소를 뒤졌다. 한세희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보며 웃을 때 생기던 입꼬리의 각도, 눈매의 부드러운 곡선이 마치 디지털 모자이크 처리가 된 것처럼 사정없이 왜곡되어 뭉개져 있었다. 형태는 존재했으나 본질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톤조차 기계음처럼 일그러졌다.

기억의 벽돌이 또 하나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강인은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진 손톱 끝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고통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지표였다.

"야, 하강인.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또 대가리 속이 타들어 가냐?"

마광두의 목소리가 아득한 터널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강인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가야 한다."

"어디로? 이 밤중에?"

강인은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용두를 세 번 감았다. 끼익, 끼익, 끼익. 기어가 억지로 맞물리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학자의 공식을 역으로 추적한다. 십계명 제3장. 살인마는 피해자를 매장하기 전, 반드시 창조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표식을 남긴다. 그 표식은 파헤쳐진 무덤이다."

마광두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선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 없는 늙은 형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자고. 그 새끼 목덜미를 잡을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야지."

***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탑차는 서울 외곽의 버려진 공동묘지 초입에 멈춰 섰다. 무성하게 자란 잡풀들이 바람에 누워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 방치된 묘비들이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솟아 있었다. 그 너머로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 주민들이 모두 떠난 허름한 단층 가옥 한 채가 보였다. 가옥의 지붕은 내려앉아 있었고, 플라스틱 문은 반쯤 열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가 맞냐?"

마광두가 손전등을 켜며 물었다.

"학자의 두 번째 조력자, 혹은 그가 설계한 또 다른 무덤의 입구다. 냄새가 난다."

강인은 가죽 재킷 깃을 세우며 차에서 내렸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가옥의 마당은 깨진 기와와 썩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강인은 반쯤 열린 문 앞에 섰다. 문틈으로 뿜어져 나오는 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미세한 화학약품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강인이 손을 뻗어 문을 완전히 밀어젖혔다. 삐이익 하는 마찰음이 길게 이어졌다.

손전등의 흰색 광선이 방 안쪽을 비추었다.

강인의 신체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마광두 역시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이게... 대체 뭐냐."

방 안의 모든 가구는 치워져 있었다. 오직 사방의 벽면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벽면 전체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수백 장의 사진들이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모두 동일했다.

15년 전, 청량리 붉은 기와집 지하 밀실. 피로 물든 바닥에 쓰러져 눈을 뜨지 못하는 한세희의 시신. 그리고 그 시신을 품에 안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는 젊은 시절 하강인의 얼굴이 사방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진들은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었다. 방금 현상한 듯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했고, 사진 속 강인의 눈동자 부분에는 모두 붉은색 볼펜으로 정밀하게 엑스(X)자가 그어져 있었다.

그 수백 개의 엑스자가 강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강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낡은 장판지가 찌석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벽면에 부착된 사진들은 단순히 인화된 종이가 아니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열선이 깔려 있었고, 만질 때마다 손끝으로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졌다. 최근에 고속 인쇄기로 출력된 인화지였다.

"이건 15년 전 사진이 아니다."

강인의 시선이 중앙에 붙은 대형 사진에 고정되었다.

"뭐? 세희 사진이 아니라고?"

마광두가 손전등 불빛을 사진의 얼굴 부분으로 집중시켰다.

"골격이 다르다. 비장골의 길이와 안와상융기의 미세한 각도가 세희보다 2밀리리터 정도 좁아. 가발을 씌우고 세희가 죽던 날의 옷을 입혔을 뿐이다."

강인은 사진 아래쪽의 혈흔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붉은 액체가 검은 니트릴 장갑 끝에 묻어났다. 인공 혈액이 아니었다. 점도가 높고 철분 냄새가 끈적하게 배어 나오는 진짜 사람의 피였다.

"최근 24시간 이내에 촬영된 모방 현장이다. 학자가 새로운 무대를 만든 거야."

그때 방구석의 낡은 벽지 틈새에서 금속성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치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소형 스피커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눈썰미는 녹슬지 않으셨군요.

변조되지 않은, 맑고 고요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서도현이었다.

마광두가 즉시 허리춤의 가스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눈이 사방의 벽면과 천장을 훑었으나 카메라의 렌즈는 보이지 않았다.

"서도현, 어디 있냐."

강인이 벽을 향해 건조하게 물었다.

- 저는 항상 선생님의 가장 가까운 규칙 속에 존재합니다. 십계명 제3장 기억하십니까? '완벽한 매장은 관찰자의 발밑에서 완성된다.'

스피커 너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마포의 청색 신호는 단순한 이정표였습니다. 진짜 제물은 지금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온도를 나누고 있지요. 0412의 비밀을 푸셨으니, 이제 마지막 연산만 남았습니다.

송수신이 끊겼다. 스피커는 침묵을 지켰으나, 방 안의 공기는 급격히 무거워졌다.

강인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장판지 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흙을 긁어내는 듯한 서걱거림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광두 형, 불빛을 아래로."

마광두가 군용 손전등의 광원을 바닥으로 내리쬐었다.

장판지 한구석이 미세하게 들려 있었다. 강인은 주저 없이 허리를 숙여 장판지를 거칠게 뜯어냈다. 썩은 나무 합판이 드러났고, 그 중앙에 녹슨 철제 손잡이가 달린 지하실 문이 숨겨져 있었다.

문고리 주위에는 붉은색 라벨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04:12]

스마트키에서 보았던 숫자가 이번에는 타이머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액정의 숫자가 1초씩 줄어들 때마다 지하실 문 틈새로 백색의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내부의 산소를 강제로 밀어내어 밀실 안의 생명체를 질식시키는 장치였다.

[00:03:15]

남은 시간은 3분 15초였다.

"이 아래에 가둬둔 거다. 새 피해자를."

마광두가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으나, 유압식 잠금장치가 걸려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인아, 이거 강제로 개방하면 내부 압력 때문에 가스가 더 빨리 주입되게 설계됐어. 비밀번호가 필요해."

비밀번호는 네 자리였다. 0412는 이미 입력 포트에서 거부되었다. 시스템은 '기억의 원점'을 요구하는 질문을 액정에 띄웠다.

[창조자와 첫 번째 제물이 만난 번지수를 입력하시오.]

강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첫 번째 제물. 한세희. 그녀와 처음 만났던 청량리 미제사건 현장의 구 주소 번지수였다.

머릿속이 번쩍이며 극심한 편두통이 다시 몰려왔다. 강인은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뇌세포가 괴사하면서 세희와 관련된 사적인 기억들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번지수의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모래알처럼 흘러내려 형태를 잃어갔다.

"생각해 내, 하강인! 너 기억력 괴물이었잖아!"

마광두가 강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안 보여... 숫자가 지워지고 있어."

강인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뇌 속의 기말 장부가 가동을 시작하려 꿈틀거렸다. 인위적인 강제 각성이었다. 이번에 장부를 펼치면, 세희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영구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하실 문 너머에서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톱이 나무판자를 필사적으로 긁어대는, 생존을 향한 마지막 절규였다.

긁는 소리는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산소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강인은 지하실 문고리에 묻은 핏자국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댔다. 뇌세포의 파괴를 알리는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장부를 연다.'

오감이 차단되고, 차가운 시뮬레이션의 계산식이 강인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암전 속에서 붉은 숫자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피해자의 공포도 92. 잔여 산소 농도 11%.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살인마의 마지막 뒷모습이 수치화되어 떠올랐다.

그 순간, 가상공간 속의 살인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인을 바라보았다.

가면 뒤에서 드러난 서도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 틀렸습니다, 스승님. 여기는 무덤이 아닙니다.

강인의 뇌세포가 동시다발적으로 파괴되며, 세희의 마지막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그리고 현실의 지하실 문 너머에서, 쿵 하는 무거운 타격음과 함께 타이머의 숫자가 순식간에 영(0)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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