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칠었다. 윤활유가 마른 지 오래된 쇠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벌어졌다. 밤새 내려앉은 서리가 붉은 기와지붕 위에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1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청량리의 폐가는 거대한 관짝처럼 고요했다.

강인은 정문을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구두굽이 서리 낀 시멘트 바닥을 디딜 때마다 서적을 찢는 듯한 파스스 소리가 났다. 마광두는 코트 깃을 세운 채 그 뒤를 따랐다. 그의 손은 이미 주머니 속 권총 손잡이에 가 있었다.

정원은 기괴하게 뒤틀린 오동나무들이 침묵의 감시자처럼 서 있었다. 가지들은 잎사귀 하나 없이 허공을 향해 뼈대만 드러내고 있었다. 썩은 흙냄새와 지하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매캐한 곰팡이취가 코끝을 찔렀다.

"초대장이 제시간에 도착했군."

마광두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사방의 어둠을 훑고 있었다.

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층 양옥의 현관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목재 문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은 세 칸이었다. 강인이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 그의 시각 피질이 미세한 이물질을 감지했다. 현관문 하단과 문틀 사이에 연결된 가느다란 은색 선이 있었다. 지름 0.2밀리미터 이하의 강철 와이어였다. 달빛이 아니었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물리적 덫이었다.

강인은 몸을 낮췄다. 무릎을 꿇고 문틀 구석을 살폈다. 와이어의 고정핀 옆에 마른 핏자국이 아주 작게 묻어 있었다. 누군가 이 덫을 설치하며 손가락 끝을 베인 흔적이었다.

그는 장갑을 벗었다. 맨손가락 끝을 차가운 핏자국에 가져다 댔다.

뇌리가 번쩍이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말 장부의 톱니바퀴가 거칠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조율 98%. 시뮬레이션 기동.]

차가운 데이터가 그의 시각을 지배했다. 10분 전의 광경이 정량화된 수치로 뇌리에 박혔다. 어둠 속에서 와이어를 당기던 사내의 손길이 보였다.

[도르래 장력: 45kg/f.] [격발 임계값: 12도 휘어짐.] [바닥 압력판 연동 수치: 18kg.]

덫은 단순한 경보 장치가 아니었다. 문을 열거나 바닥의 특정 지점을 밟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강철 구조물이 낙하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와이어의 장력 분산 공식이 강인의 머릿속에 그래프로 그려졌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다.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왔다. 오른쪽 눈 뒤편의 모세혈관이 터진 듯 시야가 잠시 붉게 흐려졌다.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강인의 머릿속에서, 초등학교 운동회 날 어머니가 건네주던 따뜻한 보리차의 맛과 그늘막의 색깔이 완전히 소멸했다. 이제 그의 뇌에 남은 유년의 기억은 회색 콘크리트 벽처럼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강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야, 왜 그래? 또 발작이냐?"

마광두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동정 없는 손길이었지만, 강인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확실한 지지대였다.

"밟지 마라."

강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오른발을 앞으로 뻗었다.

"와이어 장력이 45킬로그람포스다. 문을 밀면 천장의 무게추가 떨어진다.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밟아."

강인은 몸의 무게중심을 왼쪽 뒤꿈치로 옮겼다. 체중의 80퍼센트를 왼발에 싣고, 오른발 끝으로 문틀 좌측 하단의 틈새를 정확히 12도 각도로 눌렀다. 바닥의 압력판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무게 변화를 감지한 기계 장치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다시 상체를 앞으로 15도 숙이며 체중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62킬로그램의 무게가 압력판의 격발 장치를 일시적으로 고정하는 지점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틱.

강철 와이어가 힘없이 가라앉으며 느슨해졌다. 도구 하나 쓰지 않고, 오직 물리적 수치 계산과 완벽한 체중 이동만으로 함정을 무력화한 순간이었다.

"미친 새끼. 여전히 귀신같네."

마광두가 짧게 침을 뱉고는 완전히 열린 현관문 안으로 먼저 발을 딛고 들어갔다.

거실 안은 기괴한 풍경이었다. 사방의 벽면이 온통 거울로 도배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달빛과 마광두의 손전등 불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수십 개의 광선으로 갈라졌다. 거울 속에는 수십 명의 하강인과 수십 명의 마광두가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거울 표면에는 손가락으로 쓴 듯한 숫자들이 가득했다. 0412. 서도현의 십계명을 상징하는 표식들이었다.

마광두는 손전등으로 전면의 거울 벽을 비추었다. 거울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과 흉터로 가득했다.

"세희가 여기 묶여 있을 때 말이다."

마광두가 담배를 꺼내 물려다 말고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유쾌함이 지워져 있었다.

"내가 그때 딱 10분만 빨리 도착했어도, 이 더러운 꼴은 안 봤을 거다. 그랬으면 지금쯤 퇴직금 털어서 뜨끈한 남쪽 나라에서 기집들이랑 노닥거리고 있었겠지. 너 같은 해골바가지 꼬락서니를 매일 안 봐도 됐을 테고."

그것은 조롱의 형태를 한 자책이었다. 15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평생의 회한이 거울 벽에 부딪혀 차갑게 울렸다. 마광두는 강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정신줄 잡아라, 강인아. 여기서 네 대가리가 터지면 난 세희 볼 낯짝이 없다."

강인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주변에 널브러진 부서진 가구 파편들을 발끝으로 세 번씩 가볍게 쳤다. 강박적인 행동을 통해 흩어지려는 인지력을 억지로 붙잡았다.

"올라간다."

강인이 이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가리켰다.

그들이 계단 첫 칸을 밟는 순간, 지이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이층 서재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수십 개의 LED 투광기가 뿜어내는 백색광이 계단 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였다.

강인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이층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방이 지나치게 밝았다. 백색 서재라는 명칭에 걸맞게, 방 안의 모든 책장과 책, 책상마저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강인은 방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그를 덮쳤다. 머릿속의 전선들이 꼬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눈앞의 광경이 이상했다. 그의 인지 체계가 거센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15년 전, 세희가 숨진 채 발견되었던 이 서재의 구조는 그의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왼쪽 벽에는 거대한 책장이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창문과 책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방은 완전히 반대였다. 오른쪽 벽에 책장이 늘어서 있었고, 왼쪽 벽에 창문과 책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강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의 맥박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인가? 뇌세포 괴사로 인해 기억의 좌우 구도가 뒤바뀐 건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내려 했다.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었다. 마비 증상이 벌써 왼팔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강인아, 왜 그래? 바닥에 뭐라도 있냐?"

마광두가 먼지 쌓인 바닥의 카펫을 구두 끝으로 걷어차며 물었다.

카펫 아래에는 낡은 목재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강인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그의 손끝에 닿는 나무판자들은 너무나 견고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나 문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작된 듯한 빈틈만이 보일 뿐, 아래로 통하는 어떠한 통로의 흔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그의 기억도, 이 방의 물리적인 배치도.

그때, 사방의 거울 벽 뒤편에 숨겨져 있던 스피커가 치직거리는 소음을 냈다. 이어서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뱀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사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형편없으시군요, 선생님."

서도현의 목소리였다. 거울에 반사된 백색광 속에서 그의 비웃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15년 전 세희가 숨을 거둔 방의 구조조차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진짜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찾지 못하신 겁니까?"

강인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왼쪽 팔의 마비 증상이 어깨를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손끝의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꺼내 세 번 접었다가 폈다. 손가락이 굳어 마찰음조차 희미했다.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다."

강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오른쪽 벽면에 늘어선 하얀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에 꽂힌 책들의 등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거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책장의 도서들은 모두 하얀색 표지로 제본되어 있었고, 그 위에 검은색 잉크로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강인은 책 표지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글자들이 전부 거꾸로 인쇄되어 있었다. 좌우가 반전된, 거울 속의 문자였다.

"서도현이 방 전체를 거울상으로 제작했다."

강인이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둔탁한 낙하음이 거울 벽에 부딪혀 여러 번 굴절되었다.

마광두가 손전등으로 책장을 비추었다. 가느다란 불빛이 백색 도서들의 표지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방을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고? 왜 이딴 짓을 하는 건데?"

"인지적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강인은 거실 쪽을 향해 뒤를 돌았다.

"15년 전의 기억을 가진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뇌는 실제 물리적 공간과 기억 속 공간의 불일치를 감지한다. 뇌세포가 파괴되고 있는 상태라면 그 혼란은 극대화된다. 내가 내 기억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놈의 목적이다."

그는 천장의 LED 조명들을 올려다보았다. 6개의 강력한 백색 투광기가 특정 각도로 벽면을 조사하고 있었다. 빛의 반사각을 계산했다. 빛은 거울 벽의 특정 이음새를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너무 강한 광원 때문에 인간의 시각은 그 이음새 뒤편의 음영을 인지할 수 없었다. 착시를 이용한 은폐였다.

강인은 서재 중앙으로 걸어갔다. 바닥의 흰색 카펫을 발끝으로 밀어냈다. 카펫 아래의 목재 바닥판들이 드러났다. 나뭇결의 방향 역시 좌우가 반전되어 있었다.

"광두 형."

"말해라."

"동쪽 벽면, 세 번째 거울 아래를 봐라."

마광두가 손전등을 들고 지시한 곳으로 움직였다. 거울 표면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지만, 특정 부분만 미세하게 깨끗했다. 누군가의 손이 자주 닿은 흔적이었다.

"여긴 깨끗하네. 경첩이라도 달아놓은 건가?"

"거울 뒤편에 실제 방이 있다. 이 방은 그 방의 거울상으로 제작된 가짜 무대다."

강인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뇌 속에서 신경세포들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감이 느껴졌다. 시야 우측 하단이 검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억의 누수가 시작되기 전에 문을 열어야 했다.

"거울을 깨뜨려라. 충격 지점은 우측 하단 고정핀이다."

마광두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는 총구를 거울 모퉁이에 대고 망설임 없이 방トリ거를 당겼다.

타앙—!

밀폐된 서재 내부에서 폭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거울 표면에 미세한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더니,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째로 앞으로 기울어졌다. 거울 뒤편에서 차갑고 깊은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마광두가 어깨로 거울판을 밀쳤다. 철제 프레임으로 보강된 거울 문이 삐걱거리며 안쪽으로 열렸다.

그 너머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에서 썩은 냄새와 함께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마광두가 손전등 불빛을 안쪽으로 비추었다.

빛이 닿은 곳에는 15년 전의 진짜 서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먼지 덮인 붉은색 카펫, 왼쪽 벽면의 책장,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나무 의자. 의자 위에는 낡은 가죽 끈이 끊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 세희가 묶여 있었던 바로 그 의자였다.

강인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심장이 늑골을 거칠게 때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등 뒤에서 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쿠구구궁!

그들이 들어온 거울 문이 거친 기계음과 함께 스스로 닫히기 시작했다. 마광두가 몸을 돌려 문을 막으려 했으나, 두꺼운 강철 프레임이 이미 문틀에 맞물려 들어간 뒤였다.

철컥.

잠금장치가 체결되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가 완벽히 차단되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 갇힌 진짜 서재의 천장에서 붉은색 비상등이 켜졌다. 기괴한 적색광이 방 안을 물들였다.

의자 바로 앞 놓인 소형 모니터의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는 붉은색 디지털 숫자가 깜빡이며 역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03:00]

[02:59]

3분의 제한 시간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쥐덫을 놓았군."

마광두가 거울 문을 발로 찼다. 강철로 보강된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강인은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의자 다리 아래, 바닥판의 틈새로 가느다란 가스 배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니터 옆의 작은 가스 분사구에서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무색의 기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냄새는 없었지만, 들이마시는 순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건조함이 느껴졌다. 15년 전 세희의 폐를 망가뜨렸던 그 신경독 가스였다.

"강인아, 시간이 없다. 바닥을 뜯어내야 해!"

마광두가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강인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의자 바로 아래의 나무 바닥에 사각형의 이음새가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해치였다. 하지만 해치의 손잡이 부분에는 디지털 도어락이 장착되어 있었다.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해야 하는 구조였다.

비밀번호를 틀릴 때마다 제한 시간은 단축될 것이 뻔했다.

강인은 주머니 속에서 세희의 유품인 은색 머리핀을 꺼냈다. 손끝의 감각이 거의 없었기에, 그는 입술로 머리핀의 차가운 금속 촉감을 느끼며 집중했다.

이 방의 모든 흔적을 읽어야 했다. 15년 전의 흔적과, 최근 서도현이 이곳을 드나들며 남긴 흔적을 동시에 찾아내야 했다.

강인은 머리핀을 디지털 도어락의 키패드 표면에 가져다 댔다. 지문과 마찰열의 미세한 잔류 에너지를 강제로 읽어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맨손가락을 그 위에 겹쳐 얹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동조율 120%. 위험 수준 돌파. 뇌세포 괴사율 급증.]

눈앞이 완전히 투명한 백색으로 변했다가, 이내 핏빛으로 물들었다. 강인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느꼈다. 코와 입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고등학교 졸업식 날 세희가 그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환하게 웃던 마지막 영상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재로 변해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가 입었던 옷의 색깔도 이제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대신, 그의 뇌 속 기말 장부에 새로운 수치들이 정량화되어 박히기 시작했다.

[키패드 잔류 열상 분석 완료.] [최근 입력 번호 강도: 8번(92%), 4번(85%), 1번(78%), 2번(40%)] [입력 순서 조합 실패 시 가스 분출 속도 500% 증가.]

숫자는 네 개였지만, 순서는 알 수 없었다. 잘못 누르는 순간 즉사였다.

타이머의 숫자는 이미 [01:15]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기 중의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마광두가 거친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다시 한 번 서도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십계명의 제4조를 기억하십니까? '범인은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장 익숙한 숫자의 뒤에 숨긴다.' 당신이 직접 쓴 문장이지요. 그녀를 구하지 못했던 그날의 숫자가 무엇인지,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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