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기억력이 형편없으시군요, 선생님. 15년 전 세희가 숨을 거둔 방의 구조조차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거울 벽 뒤편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서도현의 음성은 쇠를 긁는 듯한 고음이었다.

독가스가 살포되는 좁은 밀실 안에서 마광두가 젖은 기침을 뱉어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강인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의 디지털 도어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액체가 인중을 타고 내려와 입술 경계선에 걸쳤다. 피비린내가 혀끝을 마비시켰다.

"강인아, 1분 남았다. 이 기계 쪼가리를 부수든가 해야지, 숨통이 막혀서 못 살겠다."

마광두가 벽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을 도어락의 키패드 표면에 댄 채, 뇌 속에서 요동치는 정량 데이터를 응시했다.

[동조율 121%. 전두엽 피질 세포 파괴 진행 중.] [잔류 열상 분석 수치 업데이트: 8(92%), 4(85%), 1(78%), 2(40%)]

서도현은 영리했다. 그가 언급한 '십계명 제4조'는 강인이 과거 경찰대 강연에서 강조했던 논리였다. 범인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숫자의 배열 뒤에 핵심적인 스위치를 감춘다. 15년 전 한세희가 사망한 날짜는 4월 12일이었다. '0412'.

하지만 강인의 눈앞에 떠오른 숫자는 네 개였다. 8, 4, 1, 2.

순서를 조합하는 경우의 수는 스물네 가지였다. 단 한 번의 오입력으로도 독가스 분출 속도는 다섯 배로 치솟는다. 그것은 즉사를 의미했다.

강인은 눈을 감았다.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열이 일어났다. 뇌세포가 타들어 갈 때마다 머릿속의 기억들이 회색 재가 되어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남아 있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의 풍경이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실루엣으로 변해 있었다. 세희가 건넸던 꽃다발의 색깔이 붉은색이었는지, 노란색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기말 장부의 차가운 정량 수치뿐이었다.

강인은 머릿속의 장부 페이지를 넘겼다. 3주일 전, 이 청량리 붉은 기와집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을 추적했다.

당시 강인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기둥의 위치와 책상의 배치를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뇌세포 괴사가 시작된 이후, 그의 기억 속 서재는 언제나 좌우가 뒤바뀐 상태로 재생되었다.

'기억 누수로 인한 일시적 공간 인지 장애.'

그것이 주치의와 은영채가 내린 진단이었다. 강인 역시 자신의 망가진 뇌가 부린 심술이라고만 치부했다. 15년 전의 일이었으니 뇌가 방의 구조를 거꾸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기말 장부의 정밀 시뮬레이션은 주관적 착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강인은 머릿속에서 8화 당시 기록된 서재의 3D 렌더링 데이터를 강제로 소환했다.

[공간 정밀도 역치 대조 시작.] [15년 전 원본 사건 현장 도면 대비 현재 공간 정밀도: -98.7% (좌우 대칭 일치율 100%)]

뇌리가 번쩍였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장애가 아니었어."

강인의 입술 사이로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광두가 붉어진 눈으로 강인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임마. 숨 안 쉬어져? 정신 차려!"

"내 머리가 망가져서 좌우를 헷갈린 게 아닙니다, 선배."

강인은 키패드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관절에서 뼈가 맞춰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왼팔은 여전히 감각이 없어 옆구리에 무력하게 매달려 있었다. 강인은 오른손으로 벽면의 나무 패널을 쓸었다.

"이 방 자체가 가짜입니다."

"가짜?"

"서도현은 15년 전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닙니다. 원본 도면을 정확히 좌우 반전시켜서 거울상(Mirror Image)으로 이 방을 새로 만든 겁니다."

스피커 너머에서 미세한 숨소리가 끊겼다. 송출되는 주파수의 노이즈 패턴이 거칠어졌다. 강인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인간의 뇌는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면 과거의 기억을 투사하지. 서도현은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15년 전의 기억과 실제 공간의 좌우 반전 사이에서 극심한 인지 저하를 겪기를 바란 겁니다. 뇌세포 괴사로 인한 혼란인 것처럼 위장해서 말입니다."

강인은 오른쪽 벽면으로 걸어갔다. 거울상 설계라면, 모든 핵심 장치는 원본 방의 반대편에 있어야 했다. 15년 전 진짜 청량리 서재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는 좌측 벽면 아래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거울방에서의 진짜 통로는 우측 벽면 아래에 존재해야 한다.

"바닥의 도어락은 시간 끌기용 미끼에 불과해. 진짜 해치는 여기가 아닙니다."

강인은 우측 장식장 기저부의 틈새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촉감이 걸렸다. 원형의 유압식 레버였다.

"찾았군."

강인이 레버를 움켜쥐고 아래로 강하게 끌어내렸다.

덜컥, 하는 중후한 쇠 마찰음과 함께 우측 서랍장 전체가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그 아래로 시커먼 지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가짜 도어락의 타이머가 [00:00]으로 직행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짜 통로에서 누런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지만, 이미 개방된 우측 비밀 통로의 음압으로 인해 가스는 위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스피커 너머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였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아챈 거지? 네 뇌는 이미 붉은 기와집의 세부 사항을 지워버렸을 텐데! 그 기억은 내가 직접 지워버렸단 말이다!"

서도현의 목소리가 이성을 잃고 가늘게 떨렸다. 매끄럽던 학자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찌질한 광기가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강인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 계단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코끝에 묻은 피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자 붉은 얼룩이 셔츠 깃을 물들였다.

"내 기억은 지웠을지 몰라도, 네가 남긴 흔적은 지우지 못했더군, 도현아."

"이 개새끼가……!"

"15년 동안 나를 가두기 위해 이 정교한 거울방을 지으며 희열을 느꼈겠지. 하지만 정밀함이란 언제나 맹점을 동반하는 법이다. 네가 만든 대칭의 완벽함이 오히려 네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었다."

강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법의학자가 부패한 시신을 해부하며 나직하게 읊조리는 사실의 나열에 가까웠다.

마광두가 품 안에서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실린더가 돌아가는 차가운 금속음이 지하 통로의 입구에서 공명했다.

"강인아, 쥐새끼가 구멍 속에서 떽떽거리는 소리는 그만 듣고 내려가자. 내 퇴직금 유흥비로 쓰기 전에 이 새끼 대가리부터 깨부숴야겠다."

마광두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강인의 어깨를 툭 치며 먼저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강인은 오른손으로 계단 벽을 짚으며 그 뒤를 따랐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갑고 습했다. 붉은 기와집의 지하 깊은 곳, 15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공기가 허파 속으로 들어오자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팠다.

스피커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직 모니터가 켜지는 웅웅거리는 기계음만이 지하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지하 밀실의 중심부에 도달했을 때, 강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15년 전의 범행 현장과 완전히 동일한 구도로 꾸며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쇠사슬에 묶인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위에는 인간의 체구와 똑같은 크기의 마네킹이 앉아 있었다. 마네킹의 머리에는 긴 갈색 가발이 씌워져 있었고, 목에는 붉은색 나일론 끈이 감겨 있었다.

한세희의 마지막 순간을 조롱하기 위해 서도현이 정성스럽게 연출한 무대였다.

마광두가 마네킹을 보며 침을 뱉었다.

"미친 새끼가 인형 놀이를 하고 자빠졌네."

강인은 마네킹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이 마네킹의 가슴팍에 고정되었다. 가슴 부분에 미세하게 진동하는 소형 액정 화면이 부착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붉은색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05:00]

그와 동시에 강인의 시야에 기말 장부의 경고창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고감도 압력식 인계 철선 감지.] [수류탄 작동 메커니즘 연결 완료.] [해제 실패 시 반경 10m 이내 완전 소각.] [타이머 하강 속도: 0.05초 단위 변동.]

마네킹의 등 뒤, 의자 다리와 바닥을 연결하는 미세한 구리선이 강인의 망막에 정량화된 수치로 매핑되었다.

[인계 철선 장력: 0.12N (임계값 0.15N 초과 시 인격 폭발)]

"강인아, 건드리지 마라."

마광두가 강인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단단했다.

"이 새끼, 진짜로 우리랑 같이 죽을 작정이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의 화면이 켜졌다. 화면 속에는 어두운 방 안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서도현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휠체어 바퀴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선명했다.

"선생님, 마지막 수업입니다."

서도현의 목소리가 모니터 아래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 의자 밑에 깔린 압력 센서는 세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몸무게와 동일하게 세팅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인형을 들어 올리거나, 혹은 의자에서 떨어뜨리는 순간 이 지하는 15년 전의 불꽃과 함께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서도현이 휠체어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안경 렌즈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당신이 쓴 논문 제7장, '인질 구출 시 범인의 심리적 동조를 유도하는 역학 관계'에 따르면, 범인은 가장 가치 있는 인질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둔다고 했죠. 세희는 진짜로 그 의자 밑에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다른 곳에서 재가 되었을까요?"

강인은 마네킹의 목에 감긴 붉은 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기말 장부의 페이지가 무서운 속도로 넘어가며 뇌세포를 갉아먹었다. 귀에서 삐 소리가 나며 시야가 좁아졌다. 왼팔에 이어 왼쪽 다리까지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진짜 한세희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 아니면 서도현이라는 괴물을 지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해 온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강인은 오른손을 뻗어 마네킹의 가슴에 부착된 타이머 배선을 잡았다.

[동조율 125%. 위험 수위 초과. 영구 기억 손실 경고.]

강인의 머릿속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을 잡고 걸어가던 골목길의 풍경이 완전히 지워졌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도, 골목길 구석에 피어 있던 나팔꽃의 색깔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강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서도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도현아, 너는 내 논문을 성경처럼 읽었지만, 한 가지를 빠뜨렸더군."

"……뭐라고?"

"나는 실패한 프로파일러다. 그리고 실패한 자는 규칙을 지키지 않지."

강인은 타이머 배선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인계 철선 장력 변화 감지: 0.14N…… 0.15N……]

빨간색 경고등이 지하 밀실 전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이머의 숫자가 미친 듯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00:03] [00:02] [00:01]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