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대리인의 가당치도 않은 비웃음이 눅눅한 지하 연습실의 공기 사이로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강도경은 손에 쥔 경매 통지서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압류 딱지의 잔상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골든핑거를 발동했던 대가로 고막 안쪽에서 미세하게 징징거리는 이명이 일고 있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백현욱. TK 엔터테인먼트의 거대한 손이 사채 금융이라는 더러운 줄을 타고 결국 이곳 지하 2층까지 뻗어온 것이다. 지상파 음악 방송에서 아레스를 무너뜨리려던 음모가 라이브 무대의 압도적인 실력 앞에 조각나자, 이제는 그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성지를 물리적으로 짓밟으려는 심산이었다.

“당장 다음 주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민우가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하자, 도경이 묵직하게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로막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이런 법적 진흙탕 싸움에 상처 입게 둘 순 없었다.

도경은 비열하게 껌을 씹고 있는 건물 관리 대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임의 경매 처분 통지서라. 오창석의 사채 대출금 연체를 이유로 건물 전체를 압류했다는 거군요.”

“말귀가 빠르네, 강 사장. 법원 경매가 개시되면 기존 임대차 계약은 그날로 공중분해 되는 거야. 질질 짜면서 버텨봤자 다음 주면 집행관들이 들이닥쳐서 빨간 딱지 붙이고 쓸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짐 싸라고.”

대리인의 등 뒤로 험악한 덩치의 사내 둘이 낄낄거리며 연습실 거울을 구둣발로 툭툭 찼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지하 거울에 거친 발자국이 남았다. 리더 채아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졌다. 연골판 손상의 통증을 견디며 이 바닥을 쓸고 닦았던 그녀에게는 이 더러운 연습실조차 목숨과 바꿀 수 없는 무대였기에, 눈가에 서린 분노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도경은 엷은 실소를 흘렸다. 그 차가운 반응에 대리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웃어? 미쳤나, 이 새끼가.”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군요.”

도경은 소지품 가방에서 JS 엔터테인먼트의 사업자등록증 원본과 세무서에서 발급받은 확정일자부 임대차계약서를 꺼내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제9조와 제14조.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뭐, 뭐야?”

“우리는 이 지하 연습실에 입주한 즉시 사업자등록을 마쳤고, 확정일자까지 정식으로 부여받았습니다. 건물에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되기 전에 대항력 요건을 완벽히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법원 경매가 진행되더라도 임차인으로서의 대항력은 그대로 유지되며, 낙찰자가 우리 보증금을 전액 변제할 때까지 이 공간에 대한 점유를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도경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성대 부상의 여파로 약간 갈라진 음색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법적 확신은 대리인의 기세를 단숨에 제압했다.

“게다가 이 건물의 보증금 규모로 볼 때, 우리는 소액임차인 우선변제권 대상입니다. 경매 배당 절차에서 그 어떤 채권자보다 보증금 중 일정액을 최우선으로 돌려받을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요. 당신들이 들고 온 그깟 임의 경매 개시 결정문은 우리를 당장 쫓아낼 수 있는 명도 집행 권원이 되지 못합니다.”

대리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뒤의 덩치들에게 눈짓을 하자, 덩치 큰 사내가 험악하게 도경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이 법쟁이 새끼가 어디서 말장난이야? 우리가 경매 양수 각서 들고 명도 이행하러 왔다는데!”

그 순간, 도경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이미 112 단축다이얼이 눌려 있었고, 통화 녹음기가 정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발로 거울을 차며 위협한 행위는 형사상 업무방해죄 및 재물손괴죄에 해당합니다. 또한 적법한 명도 소송이나 인도명령 집행관 동행 없이 사적으로 퇴거를 강요하는 행위는 주거침입 및 협박죄로 즉시 현행범 체포 대상입니다. 누르기만 하면 서부경찰서 형사계로 바로 연결됩니다. 백현욱 대표가 당신들 감옥 가는 비용까지 보전해 주기로 약속했습니까?”

도경의 서늘한 안광이 덩치의 눈을 꿰뚫었다. 공권력과 정확한 법률 조항의 등장에 덩치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오늘 자로 법원에 ‘점유이전금지가처분’에 대한 이의 신청 및 경매 절차 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사채업자 오창석과 TK 엔터테인먼트 간의 불법 채권 양도 및 기획 파산 공모 정황이 포착되었거든요. 법정이 열리면 당신들이 쓴 그 양수 각서가 얼마나 불법적인 장난질인지 판사 앞에서 직접 설명해야 할 겁니다.”

대리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단순한 망돌 기획사의 풋내기 사장인 줄 알았더니, 튀어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대형 로펌의 송무 변호사 뺨치는 수준이었다. 도경의 뒤에 버티고 선 아레스 멤버들의 눈빛 역시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다. 피디를 믿고, 자신들의 성지를 지키겠다는 단단한 연대의 아우라가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치, 치사한 새끼…. 법대로 해보시겠다 이거지? 두고 봐, 경매 낙찰되는 순간 니들은 국물도 없어!”

대리인은 퉤 침을 뱉으며 덩치들을 이끌고 허둥지둥 지하 계단을 올라갔다. 철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제야 도경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골든핑거의 부하가 다시금 척추를 타고 올라와 한기가 돌았다. 귀가 먹먹해져 리더 채아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피디님! 괜찮으세요?”

채아가 도경의 팔을 다급히 부축했다. 도경은 이명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법은 언제나 준비된 사람의 편이니까. 당장 쫓겨날 일은 절대 없다.”

연습실 구석에는 여전히 압류 예정 통지서가 뒹굴고 있었고, 깨진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섞인 이 좁은 지하에서,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서 있었다.

그날 밤, 도경과 아레스 멤버들은 연습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둘러앉았다.

식탁도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 커다란 알루미늄 식판 하나에 편의점 도시락과 채아의 어머니가 보내준 신 김치, 그리고 따뜻한 즉석 밥 몇 공기가 놓였다. 화려한 지상파 음악 방송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아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눈물겨운 밥상이었다.

“다들 많이 먹어둬라. 다음 미션부터는 체력 싸움이다.”

도경이 숟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민우가 김치를 밥 위에 크게 얹으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피디님, 저 아까 피디님이 그 깡패들 쫓아내실 때 진짜 소름 돋았어요. 우리 보금자리가 여기밖에 없는데,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맞아요, 피디님. 이 지하 연습실이 눅눅하긴 해도, 우리 피와 땀이 제일 많이 묻은 곳이잖아요. 여기서 데뷔곡 편곡도 완성했고…….”

막내 준서가 밥을 우물거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까 덩치가 발로 차서 남은 먼지 묻은 발자국을, 채아가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낸 참이었다. 깨끗해진 거울 속에는 비록 초라한 밥상을 마주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떤 대기업 연습생보다 살아있는 다섯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우리가 대기업 녀석들처럼 좋은 대리석 바닥에서 연습하진 못해도, 화음만큼은 걔들보다 훨씬 단단해요. 지지 않을 겁니다.”

채아가 도경의 식판 위에 계란말이를 올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백현욱 대표든, 거대 카르텔이든 상관없어요. 피디님이 계시고 우리가 함께 부를 노래가 있다면, 이 지하 연습실은 우리한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강력한 요새예요.”

식판 하나를 두고 나누는 밥 한 끼였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유대감은 차가운 지하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도경은 가슴 안쪽에서 뭉클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10년 전, 이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해 은퇴와 해체로 내몰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아이들은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고, 도경은 그들의 방패가 되어 무대를 열어주고 있었다.

“그래. 이 요새에서, 우리는 세상을 뒤흔들 무기를 만들 거다.”

도경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연습실 구석, 먼지 쌓인 천막 아래 놓여 있던 낡은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를 바라보았다.

이제 역공을 시작할 때였다.

식사를 마친 후, 도경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연습실 구석에 버려져 있던 낡은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였다. 2화에서 발견했던 이 악기에는 독특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일본의 전설적인 엔지니어가 한정판으로 개조해 장착했던 ‘고유 주파수 변조 노브 장치’였다.

2024년의 최신 미적 트렌드는 극단적인 미니멀 사운드와 정교한 비트의 배치다. 하지만 이를 2014년의 리스너들에게 그대로 들려주면 빈약한 기계음이나 불쾌한 소음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크다. 시대적 미장센의 불일치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깨야만 했다.

“이 빈티지 노브의 아날로그 따뜻함이 필요해.”

도경은 신디사이저의 아날로그 변조 노브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구형 칩셋 특유의 굵직하고 따뜻한 중저음 주파수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도경은 실시간으로 해외 최정상 사운드 엔지니어들의 인맥망과 유선 연동 시스템을 활용했다. 미래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 미국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천재 엔지니어의 개인 서버 주소로 가이드 패킷을 송출했다.

“2024년의 고해상도 미니멀 비트를 이 2010년형 아날로그 노브의 저음역대 주파수로 필터링한다. 그러면 아날로그의 꽉 찬 질감과 미래의 세련된 공간감이 동시에 살아나.”

*지지직, 웅-*

헤드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사운드는 경이로웠다. 묵직하게 가슴을 때리는 아날로그 킥 드럼 위로, 미니멀하면서도 귀를 간지럽히는 세련된 신스 라인이 정교하게 얹어졌다. 10년의 시간을 초월해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극상의 로컬라이징 편곡이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도경은 주머니에서 또 다른 USB를 꺼냈다. 그 안에는 일전에 확보해 두었던 치명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바로 SBC 방송사 내에서 한태만 국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암약하던 경쟁자 윤 PD의 밀실 뇌물 수수 동향 보고서였다. 아레스의 생방송 무대 마이크를 의도적으로 꺼버리는 악질적인 방송 테러를 사주한 주동자가 바로 윤 PD와 TK 엔터테인먼트의 백현욱 대표라는 물적 증거가 고스란히 담긴 패킷 데이터였다.

도경은 한태만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조용히 메일을 전송했다.

[국장님, 방송사 내의 썩은 가지를 쳐낼 칼을 보내드립니다. 마이크 테러의 배후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누가 국장님의 자리를 노리고 카르텔과 결탁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수화기 너머로 한태만 국장의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 …강도경 피디,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나?

“룰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퇴장을 선물해야죠. 국장님의 자리를 지키고, 아레스의 무대를 보장해 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계약입니다.”

- 알겠네. 이번 서바이벌 최종 관문은 내가 직접 심의하고 관리하지. 윤 PD 그 인간은 오늘부로 끝이야.

통쾌한 사이다가 머릿속을 관통했다.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몰려던 거대 카르텔의 한 축인 윤 PD가 완벽하게 침몰하는 순간이었다. 백현욱 역시 든든했던 방송사 내의 사냥개를 잃고 뼈아픈 타격을 입을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SBC 예능국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넥스트 스타>의 최종 관문 미션 봉투가 연습실로 배달되었다.

도경과 멤버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봉투를 뜯어 미션 곡의 악보와 데모 CD를 확인한 순간, 연습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건…….”

민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미션 곡은, 대중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하고 난해한 미래지향적 비트의 곡이었다. 극단적으로 쪼개지는 폴리리듬과 인간의 성대로는 도저히 라이브로 소화하기 힘든 불규칙한 초고음역대의 보컬 라인.

가창력 논란을 완전히 잠재워야 하는 지상파 서바이벌의 마지막 관문에서, 아레스에게 가혹할 정도로 무겁고 리스크가 큰 파멸적인 미션 곡이 떨어진 것이다.

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백현욱과 카르텔이 파놓은 마지막 외나무다리 덫이었다. 이 난해한 비트의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탑이 단숨에 무너질 위기였다.

과연 아레스는 이 기괴한 미션 곡을 무대 위에서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도경의 손끝이 다시금 차갑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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