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명하게."

한태만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송곳 같았다.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국장실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그가 내민 특약 서약서의 글자들은 잉크 냄새를 풍기며 강도경의 시야를 압박해 왔다.

실시간 시청률 15%.

2014년 현재, 지상파 주말 예능에서도 일요일 황금 시간대가 아니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수치였다. 실패하는 순간 5억 원의 배상금과 함께 아레스와 자신은 영구 출연 정지라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대형 기획사인 TK 엔터테인먼트의 횡포에 방송사 국장이라는 권력까지 더해져 도경의 목을 죄어오는 형국이었다.

한태만은 도경의 안색을 살폈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거나,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삼류 매니저의 모습을 기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도경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국장님."

도경이 한태만의 만년필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전율 때문이었다.

사각, 사각.

망설임 없는 필치로 서약서 하단에 ‘JS 엔터테인먼트 대표 강도경’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이 서명이 제 무덤이 될지, 아니면 국장님을 차기 제작본부장 자리로 올려놓을 황금 동반 승진 티켓이 될지, 이번 주 생방송에서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한태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경은 서약서를 반으로 접어 품에 넣은 뒤, 국장실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등 뒤로 한태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으나, 도경의 시선은 이미 그 너머의 전장을 향해 있었다.

***

SBC 음악 방송 ‘쇼! 유스 파이브’ 생방송 당일.

대기실 복도는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아이돌들과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태프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 화려함의 틈바구니에서 아레스 멤버들은 구석진 복도 한편에 서서 목을 풀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 소속 신인들이 번쩍이는 개인 대기실을 차지한 반면, 흙수저 기획사인 JS 엔터테인먼트에게 허락된 공간은 화장실 앞 간이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긴장하지 마."

리더 서채아가 동생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무대 의상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가락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골든핑거의 능력으로 성대 파열의 부상을 도경에게 전이시킨 덕에 목소리는 완벽하게 회복되었으나, 무대에 대한 압박감까지 대신 앓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인 보컬 이민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헤드폰을 귀에 밀착시킨 채 가이드 음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가문에서 받았던 멸시와 가난을 이 목소리 하나로 부수어 버리겠다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도경은 아이들의 어깨를 한 번씩 꽉 쥐어준 뒤, 방송국 지하 1층에 위치한 메인 음향 조정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SBC의 베테랑 음향 감독인 황 실장이 거대한 콘솔 앞에 앉아 귀찮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저기, 황 감독님."

도경이 다가서자 황 실장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턱짓을 했다.

"JS 엔터? 미안한데 오늘 라인업이 꽉 차서 리허설 음향 밸런스는 기본 세팅으로 간다. 대기업 애들 컴프레서 먹이기도 바빠."

대형 기획사인 TK 엔터테인먼트의 외압이 이미 이곳까지 뻗쳐 있음이 분명했다. 기성 메이저 곡들의 빵빵한 저음에 묻혀, 아레스의 무대를 허접한 소음처럼 뭉개버리려는 속셈이었다.

도경은 품 안에서 묵직한 철제 모듈 하나를 꺼내 놓았다.

칠이 벗겨지고 모서리가 닳아 빠진,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에서 직접 뜯어낸 고유 주파수 변조 노브 장치였다. 지하 연습실 곰팡이 냄새 속에서 밤새도록 납땜질을 하며 개조한, 도경의 비밀 병기였다.

"이걸 메인 아웃풋 3번 채널 바이패스 라인에 연결해 주십시오."

황 실장이 코웃음을 쳤다.

"장난해? 요즘 누가 이런 구닥다리 아날로그 필터를 써? 요즘 트렌드는 칼같이 떨어지는 디지털 리미터야. 이런 거 연결했다가 주파수 깨지면 책임질 거야?"

"안 깨집니다."

도경이 주머니에서 지상파 방송 통신 심의 가이드라인 책자와 전날 밤 분석한 주파수 파형 그래프를 꺼내 콘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현재 SBC 송출 장비의 고주파 대역은 16kHz에서 롤오프가 일어납니다. 요즘 유행하는 대형 기획사들의 디지털 댄스곡들은 이 대역이 과적합되어 시청자들의 귀에 극심한 피로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 2010년형 빈티지 노브를 통과한 아날로그 배음은 200Hz에서 4kHz 대역의 중저음을 극대화합니다. 방송 심의 규정 제41조 음향 송출 기준 데시벨 이하를 완벽히 준수하면서도, 안방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 타사 곡들보다 두 배 이상 따뜻하고 꽉 찬 소리로 들리게 만드는 주파수 변조 필터입니다."

도경의 손가락이 그래프의 특정 지점을 명확히 짚었다.

"이걸 쓰시면 오늘 방송 음향 사고 위험은 제로입니다. 오히려 감독님이 믹싱한 사운드가 올해 최고의 고음질 무대로 기록되겠죠. 법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연결해 주시겠습니까?"

황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개 로드 매니저 나부랭이가 방송사 송출 장비의 스펙과 물리학적 주파수 대역을 이토록 완벽하게 꿰뚫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제시된 데이터는 완벽했다. 반박할 핑계가 없었다.

"……괴상한 놈이군."

황 실장이 투덜거리며 케이블을 받아 쥐었다. 그가 빈티지 노브 장치를 콘솔의 서브 믹서에 접속하는 순간, 탁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아날로그 특유의 미세한 험 노이즈가 기분 좋은 온기를 품고 장비 전체로 퍼져나갔다.

무기로 쓸 칼은 갈아 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

"다음 무대는 신인 그룹, 아레스(Ares)입니다!"

MC의 멘트와 함께 스튜디오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객석을 메운 팬들은 대부분 앞서 무대를 마친 대형 기획사 아이돌들의 팬들이었다. 그들은 야광봉을 내려놓은 채 냉담한 시선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TK 엔터테인먼트의 입김으로 이미 커뮤니티에는 아레스에 대한 조직적인 무관심과 비하 여론이 퍼져 있던 터였다.

어둠 속에서 아레스의 다섯 멤버가 대형을 잡았다.

무대 아래, 프롬프터 모니터 옆에 선 도경이 심호흡을 했다. 그의 안구 신경 뒤쪽에서 황금빛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튀었다.

'골든핑거, 미래 음원 싱크로율 감응. 발동.'

순간, 도경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두운 무대 위로 기하학적인 황금색 격자무늬가 그려졌다. 멤버들의 발밑에는 실시간으로 이동해야 할 가장 완벽한 안무 동선이 빛나는 발자국 형태로 나타났고, 그들의 가슴팍 위에는 보컬의 주파수와 호흡 템포를 시각화한 반짝이는 파동 그래프가 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대가가 도경의 몸을 덮쳤다.

콰아아앙!

귓속에서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금속성 이명이 폭발했다.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주변의 소리가 일순간 완벽한 진공 상태처럼 사라졌다. 일시적인 청력 마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멤버들이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며 겪어야 할 허벅지 근육의 찢어지는 듯한 피로도와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과부하가 도경의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도경의 셔츠를 적셨다. 무릎이 꺾이려 했지만, 도경은 프롬프터 거치대를 꽉 움켜쥐며 버텼다.

이 정도 고통쯤은, 과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해 스스로를 증오했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경은 인이어 마이크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베어 나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멤버들의 인이어로 또렷하게 흘러들었다.

"채아, 지금 발밑의 황금선 보이지? 왼쪽으로 반 보만 더 이동해. 민우는 도입부 드럼 베이스 들어올 때 턱 당기고 호흡 70%만 유지해."

도경의 지시와 함께, 2010년형 빈티지 신스의 변조 노브를 거친 첫 비트가 스튜디오 전체를 강타했다.

쿵!

그것은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2024년의 미니멀하고 트렌디한 비트를 2014년의 아날로그 감성에 맞춰 벼려낸, 심장을 묵직하게 때리는 디스코 신스팝의 파동이었다.

앞서 무대를 장식했던 다른 그룹들의 곡들이 차갑고 찌르는 듯한 싸구려 디지털 소음이었다면, 아레스의 반주는 스튜디오의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묵직하고 깊이 있는 벨벳 같은 사운드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의 고개가 일제히 들렸다. 무관심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이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귀를 사로잡는 따뜻하고 압도적인 음색에, 현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숨이 차올라도, 난 멈추지 않아."

이민우의 보컬이 정적을 찢고 흘러나왔다.

허파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한 치열한 연습의 결과물이, 도경이 잡아준 완벽한 주파수 대역을 타고 온전히 관객들의 고막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난과 멸시를 이겨낸 소년의 처절함과 진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도경의 눈에는 민우의 성대 파동 그래프가 완벽한 황금빛 구형을 그리며 팽창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야, 민우야. 3옥타브 레까지 긁어 올려. 네 목소리로 이 무대를 찢어버려!"

도경이 속으로 외쳤다.

민우의 고음이 스튜디오 천장을 뚫을 듯이 솟구쳤다. 믹싱 콘솔의 황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날로그 필터를 거친 고음은 찢어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마치 오페라 하우스의 독창처럼 공간 전체를 풍성하게 채우며 울려 퍼졌다.

리더 서채아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멤버들이 황금빛 동선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자로 잰 듯한 칼군무를 선보였다. 땀방울이 조명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기성 대형 기획사의 정형화된 안무에서는 볼 수 없는, 생명력을 불태우는 듯한 뜨거운 청춘의 드라마가 무대 위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관객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역바이럴도, 대기업의 무관심 선동도, 이 압도적인 실력과 귀를 녹이는 사운드 앞에서는 무력했다. 화장실 앞 차가운 복도에서 묵묵히 서로의 손을 잡고 버텨냈던 아이들의 연대가, 마침내 무대 위에서 하나의 완벽한 화음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노래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자, 객석에서 참지 못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타 가수의 야광봉을 들고 있던 팬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아레스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무대 옆 모니터에 표시되는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7.2%…… 9.8%…… 12.5%……!

한태만 국장이 장담했던 마의 장벽을 향해, 붉은색 선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지막 아웃트로의 신스 베이스가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잦아들 무렵, 시청률 수치판에 선명한 숫자가 박혔다.

[15.4%]

기적이 일어났다. 대기업의 방해 공작과 방송사의 불공정 계약이라는 거대한 벽을, 오직 실력과 정교한 편곡의 힘으로 부수어 버린 순간이었다.

무대가 끝나자 스튜디오는 터질 듯한 기립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 멤버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도경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귀에서 흐르는 머지않아 멈출 이명 속에서도, 아이들의 울음 섞인 웃음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

생방송이 끝난 지 불과 한 시간 뒤.

지하 연습실로 돌아가는 낡은 카니발 안에서 이민우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형."

민우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우리 곡이…… 멜론 실시간 차트에 들어왔어요. 30위예요. 진짜로 차트 인을 했어요……!"

차에 타고 있던 스태프들과 멤버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30위. 기획사 부도 위기에 처했던, 방송 출연조차 막혀 있던 흙수저 아이돌이 지상파 데뷔 무대 단 한 번으로 일궈낸 기적적인 순위였다.

메이저 기획사들의 수십억 원짜리 마케팅과 음원 사재기 카르텔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대중의 귀를 사로잡은 아날로그 사운드의 힘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도경은 백미러로 서로를 껴안고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는 그들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결심이, 마침내 첫 결실을 본 것이다.

그때, 도경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SBC 예능국의 한태만 국장이었다. 도경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흥분과 당혹감이 뒤섞인 한태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 프로듀서! 자네 도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시청률 15.4%라니…… 예능국 전체가 지금 발칵 뒤집혔네! 당장 내 방으로 와서 다음 주 스케줄을……."

"약속은 지켰습니다, 국장님."

도경이 차분하게 말을 자르고 백미러를 보았다.

"계약서대로 JS 엔터테인먼트의 영구 출연 정지는 무효입니다. 다음 주 무대는 더 완벽하게 준비하죠."

전화를 끊는 도경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겨우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거대 카르텔 TK 엔터테인먼트의 백현욱 대표가 이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니발이 지하 연습실 건물 앞에 멈춰 선 순간, 조용히 차트 추이를 모니터링하던 서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어? 이게 뭐야?"

채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극도의 불안감이 차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형, 이거 보세요. 포털 사이트에 이상한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도경이 채아의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화면 가득, 붉은색 글씨로 도배된 실시간 검색어 1위의 헤드라인이 도경의 눈동자에 박혔다.

[단독] 신인 그룹 '아레스', 데뷔 무대 직후 실시간 차트 폭등…… 조직적 음원 사재기 및 유령 계정 조작 의혹 제기. [연예가 수첩] 듣보잡 기획사 JS 엔터의 기적? 멜론 차트 비정상적 트래픽 감지, 누리꾼들 "해명해라" 분통.

TK 엔터테인먼트 백현욱 대표가 정교하게 설계한, 성공의 순간을 가장 잔인한 나락으로 바꾸어 버릴 역바이럴 공작의 서막이었다.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레스의 목을 겨눈 거대한 음모의 칼날이 다시금 그들의 숨통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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