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게 우주의 법칙이지. 안 그래?"

김태섭 실장이 낄낄거리며 손가락으로 도경의 뺨을 툭툭 쳤다.

가죽 구두 굽 아래에서 짓밟힌 아레스의 데뷔 신청 서류가 흙먼지와 함께 짓뭉개져 있었다. 반으로 찢긴 채 쓰레기통 안으로 처박힌 종이 뭉치는 볼품없이 구겨진 낙엽과 다름없었다. 거구의 TK 엔터테인먼트 매니저들이 도경의 어깨를 꽉 쥐고 사방을 가로막은 채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어금니가 맞물리며 턱뼈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흘 전, 서채아의 성대 파열 부상을 골든핑거의 능력으로 고스란히 전이받은 여파였다. 침을 삼킬 때마다 가시를 삼키는 것 같았고, 귓가에는 아직도 미세한 이명이 삐- 하는 소리로 고막을 긁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도경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뺨을 치는 김태섭의 손가락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쓰레기통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법칙이라."

도경의 목소리가 낮게 긁혀 나왔다. 찢어진 성대 탓에 거친 쇳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 법칙, 오늘부로 바뀔 거 같은데."

"뭐? 이 새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김태섭이 인상을 쓰며 도경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 대리석 복도 너머로 구두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능국 행정실 방향에서 대여섯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걸어오는 사내. 빗어 넘긴 백발과 권위적인 눈빛, 가슴팍에 빛나는 SBC 방송국 예능국장 보직 패가 그의 신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SBC 예능국의 절대 권력자, 한태만 국장이었다.

김태섭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는 얼른 도경에게서 손을 떼고 옷깃을 만지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이쿠, 한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예심 심의 때문에 들렀는데 여기서 뵙네요."

한태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서가 건네는 서류철을 훑어보며 그저 턱 끝을 한 번 까딱했을 뿐이었다. 거대 기획사인 TK 엔터의 실장이라 해도, 지상파 예능국의 최고 권력자 앞에서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을에 불과했다.

"응, 김 실장. 이번 주 신인 무대는 준비 잘되고 있겠지?"

"그럼요. 저희 백 대표님이 특별히 신경 쓰신 리드머 그룹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김태섭이 허리를 굽히며 아양을 떨었다. 그 틈을 타, 그는 눈짓으로 매니저들에게 도경을 구석으로 밀어내라고 지시했다. 덩치 큰 매니저들이 도경의 진로를 막아서며 뒤로 밀치려 했다.

스윽.

도경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게중심을 앞으로 쏟으며 매니저의 어깨 사이를 칼처럼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태만 국장의 정면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한 국장님."

도경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한태만의 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도경을 제지하려 손을 뻗었다. 김태섭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미친 망돌 매니저가 예능국장에게 직접 덤벼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약속 없는 외부인은 행정실을 거치라고 했을 텐데."

한태만이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으로 도경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도경의 낡은 가죽 가방과 흙먼지가 묻은 바지자락에 머물렀다. 전형적인 3류 기획사의 매니저 몰골. 한태만의 눈에 귀찮음이 서렸다.

"JS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강도경입니다."

도경은 품 안의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김태섭이 깜짝 놀라 "저 새끼가 미쳤나! 국장님, 잡으세요!"라고 소리쳤지만, 도경이 꺼낸 것은 칼이 아니었다. 푸른색 고급 레더 파일에 깔끔하게 제본된 서류 한 부였다.

그것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껍데기 출연 신청서가 아니었다. 도경이 어젯밤, 2024년의 방송가 시스템과 시청률 분석 데이터를 2014년의 방송국 생리에 맞추어 철저하게 재구성한 '시청률 보증 조건부 계약서'였다.

"SBC 화요일 심야 예능 음악 방송, 최근 4주간 평균 시청률 2.1%. 동시간대 지상파 3사 중 최하위입니다."

도경이 서류를 한태만의 눈앞에 정확히 펼쳐 보였다.

"뭐라고?"

한태만의 눈썹이 꿈틀했다. 시청률은 현재 그의 목을 죄고 있는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건이었다. 차기 제작본부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화요일 심야 시간대의 부진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경비원 안 부르고 뭐 해!"

김태섭이 삿대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도경은 흔들리지 않고 날카로운 숫자를 뱉어냈다.

"이 계약서에 서명해 주십시오. 아레스를 이번 주 생방송 무대에 올려 주신다면, 단 1회의 출연만으로 해당 코너의 분 분 시청률을 최소 6.5%까지 끌어올리겠습니다. 만약 도달하지 못할 시, 향후 SBC의 모든 예능 제작 협찬금의 두 배를 위약금으로 지불하고, 저희 그룹의 지상파 영구 출연 정지 처분을 달게 받겠습니다."

복도에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태섭은 턱이 빠질 듯한 표정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6.5%라니. 심야 음악 방송에서 대형 기획사의 컴백 무대도 찍기 힘든 시청률이었다. 그것을 이제 막 데뷔하려는 흙수저 신인이 장담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미친놈이 분명하군. 국장님, 이런 삼류 사기꾼의 말을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김태섭이 혀를 차며 한태만을 부추겼다.

그러나 한태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노련한 눈동자가 도경의 서류 첫 장에 적힌 문구들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SBC 심야 음악 프로그램 타겟 시청층(20~30대 여성) 분석 및 SNS 바이럴 트래픽 연동 계획서]

2014년의 방송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인 'SNS 실시간 트래픽 연동'과 '주파수 대역별 음역 자극을 통한 채널 고정 효과'라는 분석 데이터가 정교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수치와 통계로 무장한, 거부하기 힘든 제안서였다.

"자네, 정말로 이 수치를 보증할 수 있나?"

한태만의 목소리에서 방관자적인 태도가 사라졌다. 권력욕이 가득한 정치가의 눈빛이 도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제 목숨을 걸어도 좋습니다. 어차피 잃을 게 없는 기획사입니다. 하지만 국장님께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것만으로, 경쟁자인 윤 본부장 대행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차기 제작본부장 자리를 굳히실 수 있습니다."

도경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직 한태만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저희를 사냥개로 쓰십시오. 실패하면 버리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 공은 온전히 국장님의 것입니다."

한태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지극히 계산적이고 야심 가득한 미소였다.

그는 도경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김 실장."

"예, 예? 국장님!"

김태섭이 당황하여 대답했다.

"이번 주 아레스의 무대를 편성해라. 임시 슬롯 하나 비어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기다 집어넣어."

"국장님! 그건 심의 절차에도 어긋나고, 저희 TK 쪽 아티스트 무대 동선이랑 겹쳐서 곤란합니다!"

김태섭이 다급하게 항변했으나, 한태만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SBC의 편성을 결정하는 건 예능국장인 나다. TK 엔터가 우리 방송국 편성권까지 쥐고 흔들려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군말 말고 따라. 강 프로듀서라고 했나? 약속은 문서로 남긴다. 내일 오전까지 날인된 확약서를 내 방으로 가져오도록."

한태만은 서류를 챙겨 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서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복도에 남겨진 김태섭의 얼굴은 붉다 못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경을 가리켰다.

"너…… 감히 대기업의 밥그릇에 재를 뿌려?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지상파 무대가 실력만으로 굴러가는 줄 알아?"

도경은 대답 대신 쓰레기통 옆에 떨어져 있던 아레스의 찢어진 서류 뭉치를 천천히 주워 올렸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내며 김태섭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게 법칙이라고 하셨죠."

도경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 쓰레기통이 누구 자리가 될지, 지켜보십시오."

도경은 뒤돌아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김태섭이 고함을 지르고 씩씩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던 도경은 2층과 3층 사이의 어두운 계단참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 틈새로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윤 PD님. 이번에 저희 쪽에서 준비한 성의입니다. 한 국장 그 양반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실무 제작진이 무대 세팅이랑 음향을 꼬아버리면 시청률이고 뭐고 끝장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 조금 전 한태만 국장의 눈 밖에 났던 TK의 매니저 중 한 명이었다.

"허허, 김 실장이 신경을 많이 썼구만. 안 그래도 한 국장이 아레스인지 뭔지 하는 듣보잡들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골치 아팠는데 말이야. 라이브 마이크 볼륨을 최하로 낮추고 백킹 트랙만 크게 틀어버리면 가창력 논란으로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SBC 예능국의 윤 PD였다. 한태만 국장의 정적이자, TK 엔터테인먼트의 돈줄을 받아먹으며 카르텔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인물.

도경은 품 안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볼펜을 눌러 적어 내려갔다.

[윤 PD, TK 매니저 송민호. 14시 15분. 지상파 로비 비상구 계단참. 뇌물 수수 및 아레스 생방송 음향 조작 모의 현장 목격.]

도경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고양이처럼 빛났다.

'결국 이 썩은 고리를 끊지 않으면 무대는 완성되지 않는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아레스가 해체로 내몰렸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상파 무대에서의 '가창력 조작 논란'이었다. 당시에는 거대 기획사의 음모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도경은 수첩을 덮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적들이 쳐놓은 덫을 오히려 그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로 만들어 줄 생각에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

지하 2층.

JS 엔터테인먼트의 눅눅한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찌는 듯한 열기와 매캐한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형 제습기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낼 뿐, 사면 거울에 서린 뿌연 김을 전혀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거울 속에서, 온몸이 땀으로 젖어 걸레처럼 변한 세 명의 소년들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리더 서채아, 메인 보컬 이민우, 그리고 서브 보컬 한결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시 가자!"

서채아가 무릎 연골판의 통증을 참아내며 멤버들을 독려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도경이 대신 부상을 전이받아 준 덕분에 기적처럼 맑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채아 누나, 잠깐만……."

이민우가 허벅지를 짚으며 주저앉았다. 그의 목에서는 이미 피비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보컬 패드 연습용 마이크 헤드에는 그의 입술에서 묻어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민우야, 일어서. 강 형이 우리 무대 따오려고 방송국에서 뺨 맞아가며 뛰어다니고 있어. 우리가 여기서 쓰러지면, 그 형은 갈 곳이 없어."

서채아의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도경은 연습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져 있던 낡은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고유 주파수 변조 노브를 천천히 돌렸다.

치이익- 웅-

낡은 기계가 깨어나며 아날로그 특유의 묵직하고 따뜻한 전류음이 연습실의 차가운 공기를 채웠다.

도경의 머릿속에서 골든핑거의 황금빛 오라가 일렁였다. 2024년의 미니멀한 일렉트로닉 비트가 이 낡은 신디사이저의 아날로그 질감과 부딪치며, 2014년의 리스너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독창적인 '레트로 디스코 펑크' 사운드로 재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삐-!

머리를 관통하는 극심한 청각 과부하가 찾아왔다. 도경은 귓가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노브를 고정했다.

"다들 하던 연습 멈추고 이쪽으로 와."

도경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도경의 안색은 창백했고, 목에는 붉은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강 형…… 목이 왜 그래요?"

이민우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 가벼운 감기니까."

도경은 아무렇지 않게 목을 가다듬으며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눌렀다.

쿵, 쿵, 쿵, 쿵.

묵직한 아날로그 베이스 비트가 지하 연습실의 바닥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면서도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강력한 2014년형 로컬라이징 사운드였다.

"이게…… 우리 곡이에요?"

서채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래. 시대의 트렌드를 앞서가는 게 아니라, 당대의 리스너들의 심장을 직접 타격하는 비트다. 너희들이 이 비트 위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관절이 부서져라 춤춰야 해."

도경은 기계의 주파수 노브를 더욱 세밀하게 조정했다.

"SBC 생방송 무대가 잡혔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멤버들의 눈빛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시청률이다. 대기업의 카르텔이 우리를 짓밟으려고 방송국 놈들과 짜고 음향을 조작할 거다. 라이브 마이크 볼륨을 줄이고, 우리 가창력을 쓰레기로 만들려고 하겠지."

도경의 눈에 서릿발 같은 안광이 스쳤다.

"하지만 그들이 조작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압도적인 사운드와 라이브로 귓구멍을 뚫어버릴 거다. 이 빈티지 신스의 주파수 대역은 지상파의 구형 음향 장비가 임의로 깎아낼 수 없는 독점적 파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기계가 우리를 막아서면, 목소리로 그 기계를 부숴버리면 돼. 할 수 있겠어?"

"합니다."

서채아가 가장 먼저 주먹을 꽉 쥐었다.

"목이 찢어져서 다신 노래를 못 부르게 되더라도, 무대 위에서 전부 쏟아내겠습니다."

이민우 역시 핏자국이 묻은 마이크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패배자의 불안감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무대를 향한 지독한 갈망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좋아. 밤새 편곡 마무리한다. 내일 아침까지 완전한 동선을 몸에 익혀."

도경은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다시 누르며, 자신의 몸으로 전이되어 오는 멤버들의 피로도와 신체적 과부하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등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덮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대가조차 되지 못했다.

***

다음 날 오전 9시.

도경은 약속대로 SBC 예능국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화려한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한태만 국장이 차가운 눈빛으로 도경을 흘겨보았다. 그의 책상 위에는 도경이 어제 제안했던 계약서의 정식 공문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한태만의 손에 들린 만년필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강 프로듀서."

한태만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력자 특유의 비장함과 잔인함이 섞여 있었다.

"어제 자네가 제안한 서류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네. 20~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한 SNS 트래픽 분석은 꽤나 정교하더군. 하지만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말뿐인 장담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한태만이 서류철 하나를 도경의 앞으로 툭 던졌다.

그것은 어제 도경이 제출한 계약서가 아니었다. SBC 법무팀의 직인이 찍힌, 완전히 새로 작성된 '특약 서약서'였다.

도경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첫 줄을 읽는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SBC 예능국과 JS 엔터테인먼트 간의 특별 출연 계약 서약서] - 실시간 생방송 당일, 그룹 '아레스'의 무대 코너 시청률이 15%를 달성하지 못할 시, JS 엔터테인먼트는 방송 제작비 및 광고 손실액 총 5억 원을 즉시 배상한다. - 또한, 대표자 강도경 및 소속 아티스트 전원은 향후 지상파 3사의 모든 예능 및 교양 프로그램에 영구 출연 정지 처분을 받으며, 기획사 등록 면허를 자진 취소한다.

15%.

어제 도경이 제안했던 6.5%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지상파 주말 예능에서도 치기 힘든 마의 장벽이었다. 그것은 기회를 주겠다는 제안이 아니었다. 실패하는 즉시 도경과 아레스의 숨통을 법적으로 완벽하게 끊어버리겠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어떤가?"

한태만이 만년필 끝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비열하게 웃었다.

"자네가 말한 시청률 보증이 진짜라면, 이 정도 조건에는 기꺼이 서명할 수 있겠지? 서명하지 않으면, 어제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아레스의 출연은 영구 기각이네."

도경의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끝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 서명 한 번에 아레스의 목숨과 자신의 모든 미래가 걸려 있었다. 실패하면 파산이 아니라, 영원한 매장이었다.

한태만의 눈빛이 도경을 압박해 들어왔다. 국장실 안의 공기가 숨 막힐 듯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