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핏방울이 차가운 마이크 헤드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지하 연습실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비릿한 피비린내가 퍼져 나갔다. 바닥으로 쓰러진 서채아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고장 난 제습기 불빛 아래에서 파르르 떨렸다.

"채아 누나! 누나, 정신 차려 봐요!" "의사, 의사 불러야 해요! 피가…… 피가 안 멈추잖아!"

이민우를 비롯한 아레스 멤버들이 비명을 지르며 채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에서, 강도경은 심장이 발끝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10년 전,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성대가 망가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야 했던 채아의 마지막 눈물이 뇌리를 스쳤다. 똑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번 생은 그녀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온 삶이었다.

도경은 주저 없이 채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차갑게 식은 손을 움켜쥐었다.

'감응(感應), 싱크로율 강제 동조.'

머릿속에서 황금빛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골든핑거의 시각적 오라가 개방되었다. 채아의 목구멍 안쪽, 붉게 찢어지고 부풀어 오른 성대의 미세한 모세혈관들이 3D 그래픽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적색 경고등이 사정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성대 오버 스트레칭으로 인한 급성 파열 및 연골판 손상에서 기인한 전신 과부하 상태였다.

[경고: 대상의 육체적 부하를 전이받으시겠습니까? 전이율 설정 필요.]

도경은 이를 악물었다.

'100%. 전부 나한테 넘겨.'

그 순간, 도경의 척추를 타고 올라온 극심한 고통이 목덜미를 직격했다.

"끄 윽……!"

커터칼 수십 개를 통째로 삼킨 뒤 안에서 휘젓는 것 같은 작열감이었다. 성대 마디마디가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에 도경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암전되었다. 귀청을 찢는 듯한 이명이 고막을 때렸고, 이내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멀어졌다. 일시적 청각 마비였다.

도경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역류가 느껴졌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내색할 수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채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진 상태에서 시각적 오라만을 바라보았다. 채아의 목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붉은 경고등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깨끗한 황금빛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성대에 가해졌던 치명적인 염증과 통증, 그리고 무릎 연골의 피로도까지 도경의 몸 안으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어?"

채아가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목을 찢어발기던 그 끔찍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피는 멈췄고,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저……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말하지 마."

도경의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진 쇳소리였다. 목이 완전히 잠겨 한 글자를 내뱉는 것조차 지옥 같은 통증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한 척 손을 내저어 멤버들을 안심시켰다.

"채아는…… 며칠 동안 묵언 수행이다. 목에 무리 가지 않게 따뜻한 물만 마셔. 민우 너는 채아 부축해서 숙소로 데려가라."

"하지만 피디님,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얼굴색도 너무 안 좋으신데……."

민우가 울먹이는 눈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도경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민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래. 잔말 말고 데려가."

이명이 가시지 않아 제 목소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경의 단호한 눈빛에 주눅이 든 멤버들은 결국 채아를 부축해 연습실을 나섰다.

철컥, 하고 지하 연습실 문이 닫히는 순간.

도경은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목 안쪽이 부어올라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연습실 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구형 악기로 향해 있었다.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

2024년의 트렌디하고 미니멀한 비트는 지금의 2014년 대중에게는 그저 불쾌한 소음이나 빈약한 기계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시대적 미장센의 불일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미래의 1위 곡이라 해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편곡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해.'

도경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신디사이저 앞에 앉았다. 전원을 켜자 진공관이 가열되는 웅장한 기계음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상태였지만, 골든핑거의 시각적 파동 그래프가 공중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도경은 신디사이저 우측 상단에 위치한 '고유 주파수 변조 노브'를 잡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2014년의 대중이 원하는 것은 가슴을 울리는 풍성한 아날로그의 아우라다.'

그는 미래에서 가져온 2024년의 세련된 드럼 루프 위에, 빈티지 신스의 톱니형 아날로그 파동 필터(Sawtooth Filter)를 얹기 시작했다. 노브를 돌릴 때마다 공중에 떠오른 파형이 날카로운 직각에서 서서히 부드럽고 웅장한 곡선으로 휘어졌다.

윙- 웅-.

지하 연습실의 공기가 주파수의 변화에 따라 미세하게 진동했다. 도경은 귀가 완전히 먹먹해진 상태였기에, 오직 눈앞의 파형 그래프와 손끝의 진동에만 의지해 음역대를 조율했다.

2kHz에서 4kHz 사이의 중고음역대를 과감하게 깎아냈다. 이곳은 채아의 성대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진성을 낼 수 있는 '안전 구역'이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묵직하고 따뜻한 아날로그 신스 브라스 사운드로 가득 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독한 두통과 함께 이명이 서서히 걷히며, 가청 영역의 소리들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빰- 빰빰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사운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2024년의 극단적인 미니멀리즘과 2014년의 화려한 디스코 신스 팝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세련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대중적이면서도 웅장한 사운드. 대형 기획사의 수십억 원짜리 사운드 랩에서도 결코 구현해 내지 못할, 오직 시대의 경계를 허문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마스터피스였다.

도경은 땀에 젖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거라면…… 된다."

***

사흘 뒤, 연습실.

성대 보호를 위해 사흘간 강제 휴식을 취한 채아와 아레스 멤버들이 다시 연습실에 모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과 불안감이 가득했다. 데뷔 무대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주. 하지만 타이틀곡의 보컬 녹음조차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피디님, 정말 가이드 음원이 바뀐 건가요?"

민우가 조심스럽게 묻자, 도경은 대답 대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멤버들의 숨소리가 동시에 멎었다.

"……어?"

채아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전의 곡이 얇고 날카로운 얼음송곳 같았다면, 새로 편곡된 곡은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가슴을 웅장하게 때리는 강력한 비트를 품고 있었다. 거칠면서도 따뜻한 아날로그 신스 사운드가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이건…… 완전히 달라요. 목에 힘을 주지 않아도, 비트가 목소리를 앞으로 밀어내 주는 느낌이에요."

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이드 멜로디에 맞춰 가볍게 목을 풀었다. 놀랍게도 높은 음역대를 부를 때 느껴지던 성대의 이물감이나 통증이 전혀 없었다. 도경이 설계한 주파수의 공백 안으로 그녀의 음색이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완벽하게 스며들었다.

"이민우, 너는 이 타이틀곡의 프리코러스 부분에서 가성을 섞어 베이스 라인을 받쳐줘. 서채아, 너는 고음부에서 억지로 지르지 말고, 이 신스 브라스 소리에 목소리를 얹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뱉어라. 곡의 화음이 네 성대를 보호해 줄 테니까."

도경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레스 멤버들은 전율을 느꼈다.

그들은 직감했다. 이 곡은 단순히 좋은 노래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장점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오직 '아레스'만을 위해 정교하게 조각된 신전이었다.

"우리…… 할 수 있어요."

채아의 눈에 다시 한번 투지가 불타올랐다. 단 3주라는 시간의 압박 속에서, 기적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

3주 뒤, 여의도 SBC 방송국 본관 앞.

지독한 폭염 속에서도 방송국 앞은 팬들과 차량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경은 땀을 닦으며 가죽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가방 안에는 아레스의 데뷔 싱글 음원 파일이 담긴 USB와 함께, 무대 연출 및 카메라 워킹 동선이 상세히 기록된 '출연 신청 수정본' 서류가 들어 있었다.

오늘 지상파 음악 방송 <쇼! 뮤직 챔피언>의 담당 PD인 한태만 국장을 만나 이 서류를 제출하고 최종 출연 확정을 받아내야 했다. 3주 동안 뼈를 깎는 연습 끝에 완성된 아레스의 무대를 세상에 선보일 첫 관문이었다.

본관 로비로 들어서려던 찰나, 뒤편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JS 엔터 강도경이 맞나?"

도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최고급 이탈리아제 수트를 빼입은 중년 사내와 거구의 매니저 서너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중년 사내의 가슴팍에는 국내 최대 기획사인 'TK 엔터테인먼트'의 총괄 디렉터 명패가 빛나고 있었다. 백현욱의 심복이자, 업계에서 약소 기획사들을 밟아 뭉개기로 악명이 높은 김태섭 실장이었다.

"아직 파산 안 하고 살아 있었네? 사채업자들이 밤마다 찾아갈 텐데, 방송국 드나들 여유는 있나 봐?"

김 실장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도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에 선 거구의 매니저들이 도경을 위압적으로 에워쌌다.

"비키시죠. 바쁜 몸이라."

도경이 차갑게 응수하며 옆으로 비껴가려 했다. 그러나 김 실장의 눈짓 한 번에, 덩치 큰 매니저가 도경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툭-!

도경의 손에서 가죽 가방이 떨어지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가방이 열리고 아레스의 인생이 담긴 출연 신청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매니저가 비아냥거리며 구두발로 서류를 짓밟았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흙먼지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딴 쓰레기 같은 종이 쪼가리 들고 한태만 국장 만나러 온 모양인데, 꿈 깨라. 오늘부로 아레스라는 망돌의 출연 신청은 기각되었으니까."

김 실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도경을 내려다보았다.

"백현욱 대표님이 전하라고 하시더군. 흙수저는 흙바닥에서 구르는 게 어울린다고. 감히 TK의 영역인 지상파 무대에 발을 들이려 해?"

매니저가 바닥에 떨어진 USB와 서류 뭉치를 거칠게 주워 올렸다. 그리고는 로비 한구석에 놓인 대형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었다.

서걱-!

그들은 도경의 눈앞에서 아레스의 출연 신청 수정본을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게 우주의 법칙이지. 안 그래?"

김 실장이 낄낄거리며 도경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도경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려갔다. 터질 듯한 분노가 가슴을 채웠지만, 그의 머리는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고 명석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진 서류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법과 규정을 무시하고 힘으로 짓밟으려는 카르텔의 방식. 도경은 이들이 결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 오만한 거인들의 발목을 부러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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