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징이이잉.

지하 2층 곰팡이 냄새가 섞인 습한 공기를 가르며 낡은 팩스기가 비명을 질렀다. 뱉어내는 종이 상단에는 선명하고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대형 기획사 연합 및 지상파 방송 협의회 공동 선명서: JS 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아레스에 대한 전 채널 영구 출연 정지 및 배급 중단 통보.]

동시에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포털 사이트의 긴급 속보들이 도경의 눈동자에 차갑게 반사되었다.

[ [속보] 엔터포스 연합, "시장 질서 교란 및 방송 심의 위반 혐의 기획사 배제" 대외 선언문 발표 ] [ 지상파 3사 및 주요 음원 배급망, JS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 '출연 제재 협약' 가입 공포 ]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영광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거대 카르텔 엔터포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가장 추악하고도 신속한 방식으로 목줄을 죄어왔다.

도경은 어깨에 감긴 흰 붕대를 실룩이며 팩스 용지를 낚아챘다. 구겨지는 종이 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그의 왼쪽 귀는 먹먹한 수조 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리는 이명만을 뱉어내고 있었다. 골든핑거의 대가인 청각 과부하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더럽게 빠르게 움직이는군, 백현욱.’

도경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분노 대신 서늘한 투지가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들이 쌓아 올린 낡은 성벽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이 시대의 오만함에 균열을 내줄 차례였다.

* * *

“이게……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대표님?”

정적이 감돌던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땀에 젖은 연습복 차림의 서채아가 손에 스마트폰을 쥔 채 서 있었다. 뒤이어 들어온 이민우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상파 음악 방송 우승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날아든 청천벽력 같은 블랙리스트 소식은 아이들의 심장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도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걱정할 것 없다. 저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니까.”

“하지만 방송 출연이 막히면, 음원 배급이 끊기면 저희는 어디서 노래를 불러요? 이제 겨우 한 걸음 내딛었는데……!”

민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가문에서의 멸시를 이겨내고 오직 목소리 하나로 세상에 서려던 그의 눈에 다시금 깊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경은 서류 봉투를 툭 던지듯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태만 국장을 끌어내리려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던 쥐새끼가 누구였지?”

도경의 나지막한 질문에 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SBC 예능국의 윤 PD…… 말씀이신가요?”

“그래. TK 엔터의 백현욱 대표와 결탁해서 너희 무대의 마이크를 끄라고 지시했던 주동자. 그리고 한 국장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밀실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해 온 쓰레기지.”

도경의 손끝이 서류 봉투의 겉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동안 모아둔 윤 PD의 밀실 뇌물 수수 장부와 TK 엔터 측으로부터 받은 불법 리베이트 내역서다. 방금 전 SBC 감사팀과 사법기관, 그리고 신뢰할 만한 일간지 사회부 기자에게 송부를 마쳤다.”

민우와 채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경이 보여주는 대비책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쯤 윤 PD는 대기발령 조치와 함께 압수수색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한태만 국장은 자신의 목을 죄던 정적을 완벽하게 치워준 대가로, 우리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지상파 연합이 우리를 막으려 해도, 공영방송 내부의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카르텔의 치밀한 방해 공작을 법률과 객관적인 비리 데이터로 역타격하는 도경의 눈빛은 밤바다처럼 깊고 고요했다.

그러나 채아의 시선은 도경이 가리킨 서류 봉투가 아닌, 책상 한구석에 삐져나와 있는 다른 종이 한 장에 꽂혔다. 흰 봉투 사이로 보이는 대학병원 로고와 붉은색 의사 소견서 서명.

[진단명: 좌측 청신경 손상 및 영구적 청력 상실 위험. 극심한 신경성 과부하로 인한 실시간 청각 마비 증세 유발.]

채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석에 이끌리듯 걸어가 그 종이를 낚아챘다.

“이게…… 이게 뭐예요?”

도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감추려 했던 진단서였다.

“채아야, 내려놓아라.”

“대표님 귀가……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에요? 영구적 청력 상실이라니요! 그게 왜…… 왜 대표님한테 이런 일이 생겨요!”

진단서를 소리 내어 읽던 채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민우 역시 종이를 빼앗아 들고는 굳어버렸다.

“설마…… 지난번 생방송 때 제 성대가 갑자기 기적처럼 나았던 게, 민우의 목소리가 살아났던 게…… 전부 대표님이 대신 짊어지셔서 그런 건가요? 우리 대신 아프셨던 거예요?”

민우의 허파에서 끓어오르는 울음이 터져 나왔. 그는 주먹을 쥐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자신들이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프로듀서인 강도경은 어두운 콘솔 뒤에서 피를 흘리며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어요…… 왜 바보같이 자기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우리를……!”

채아가 도경의 소매를 붙잡고 오열했다.

도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귀에서 흐르는 웅웅거리는 소음 너머로, 아이들의 진심 어린 울음소리가 묵직하게 가슴을 때렸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아이들의 어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귀 하나쯤 안 들려도 상관없어.”

도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내 몸이 부서지고 청력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단 말이다. 너희가 무대 위에서 눈물 흘리며 강제로 해체당하고,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가는 꼴을 다시 보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낫다. 난 너희를 세계의 정점에 세우겠다고 맹세했어. 그리고 그 약속은 아직 반도 시작되지 않았다.”

도경의 단호한 선언에 채아와 민우는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 슬픔을 넘어선 지독한 결의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대표가 목숨을 걸고 길을 열어준다면, 자신들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 길을 달려가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단 하나의 화음이 그들의 침묵 속에서 완성되었다.

“지상파가 우릴 막는다면, 국경을 무력화하는 무대를 만들면 된다.”

도경이 돌아서서 연습실 구석을 가리켰다.

* * *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지하 연습실 구석.

도경의 손끝이 낡은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0년형 빈티지 신디사이저(KORG SV-1)였다. 2화에서 발견한 이후, 도경이 밤낮으로 분해하고 개조해 두었던 비장의 무기였다.

“이 고유 주파수 변조 노브 장치를 봐라.”

도경이 신디사이저 우측에 임의로 납땜해 붙인 진공관 노브를 가리켰다.

“지금 지상파 방송사들은 엔터포스의 압력으로 우리 음원을 송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지.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는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개방된 영토다. 우리는 공중파 안테나가 아닌, 글로벌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에 실시간 라이브 무대를 송출한다.”

도경의 설명에 민우가 신디사이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표님, 인터넷 스트리밍은 음질 열화가 심하잖아요. 우리 곡의 미니멀한 비트와 섬세한 보컬이 뭉개지면 대중들이 소음으로 받아들일 텐데요.”

“그래서 이 빈티지 노브가 필요한 거다.”

도경이 노브를 돌리자, 진공관에 붉은 불빛이 들어오며 나직한 웅성거림 같은 주파수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이 기기는 디지털 압축 전송 과정에서 손실되는 특정 음역대를 아날로그 배음으로 보완해 준다. 2024년의 미니멀한 감각을 2014년의 리스너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최적의 로컬라이징 튜닝 장치지. 스트리밍으로 들어도 마치 바로 앞 콘서트홀에서 듣는 듯한 입체감을 선사할 거다.”

사이버 공간 전체를 자신들의 무대로 만들겠다는 도경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대형 기획사의 수십억짜리 사운드 랩이 부럽지 않은, 땀방울과 기술의 결정체가 지하 2층 곰팡이 냄새 나는 공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준비해라. 오늘 밤, 전 세계를 향한 아레스의 진짜 데뷔 쇼케이스가 시작된다.”

* * *

같은 시각, TK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백현욱은 비서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JS 녀석들, 지상파 3사 블랙리스트에 음원 배급망까지 막혔으니 이제 고사하는 일만 남았군. 아무리 날고 기는 재능이 있어도 방송에 안 나오면 잊히는 법이지.”

“예, 대표님. 엔터포스 연합사들도 이번 조치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1인 기획사 따위가 시장 질서를 흔드는 꼴은 다들 보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백현욱은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강도경. 대세를 거스른 대가는 파멸뿐이다.”

그러나 백현욱이 승리의 잔을 들이켜는 순간, 그들이 장악했다고 믿었던 미디어의 판도가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리고 있었다.

* * *

[LIVE] 아레스(Ares) - 'The Beginning' Global Showcase

유튜브 채널에 불이 켜졌다. 별도의 사전 홍보도 없었고, 방송사의 화려한 자막도 없었다. 오직 거친 노출 콘크리트 벽면과 낡은 빈티지 신디사이저, 그리고 마이크 세 대 세워진 JS 엔터의 지하 연습실이 무대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운드는 차원이 달랐다.

둥-! 둥-!

빈티지 신디사이저의 노브를 거친 도경의 일렉트로닉 비트가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이어폰과 스피커를 찢고 들어갔다. 압축 전송의 한계를 비웃듯, 진공관 특유의 따뜻하고도 가슴을 울리는 저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와, 음질 미쳤다…… 이어폰 꼈는데 귀 바로 뒤에서 노래 부르는 것 같아.” “이 노래 뭐야? 2014년에 이런 세련된 비트가 가능하다고?” “방송국 놈들이 아레스 출연 정지시켰다며? 쫄아서 막은 거였네 ㅋㅋㅋ”

채팅창이 폭발적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대 중앙에서 민우의 보컬이 터져 나왔다. 찢어질 듯한 고음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그의 라이브는 골든핑거의 조율을 거쳐 완벽한 주파수로 스트리밍 공간을 가득 채웠다. 리더 채아의 절도 있으면서도 기하학적인 안무 동선이 카메라 렌즈를 압도했다.

방송사의 기득권 카르텔이 쳐놓은 낡은 장벽은, 국경과 채널의 경계가 없는 신세대 플랫폼의 자율성 앞에서 가소롭게 부서져 내렸다.

“이거 대박이다! 다들 링크 복사해서 퍼트려!” “트위터 실트 올리자! #Ares_Unstoppable” “지상파 안 봐도 됨. 이게 진짜 라이브다!”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요된 홍보가 아닌, 순수한 전율에 매료된 대중의 힘이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모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아레스의 쇼케이스 생방송 주소가 무작위로 확산되었다.

접속자 수는 1만에서 5만, 이내 10만을 넘어 30만 명을 돌파했다.

조정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도경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지상파의 영구 정지 처분이라는 거대한 바위로 물길을 막으려 했던 카르텔은, 자신들이 막은 물길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자신들을 덮치고 있음을 아직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서버 상태를 모니터링하던 기술 팀장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대, 대표님! 이것 좀 보십시오.”

도경이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트래픽 유입 경로를 나타내는 세계 지도 그래픽 위로, 특정 지역에서 기하학적인 수치로 솟구치는 붉은색 막대그래프들이 보였다.

단순한 아시아권이나 국내의 자발적 공유가 아니었다.

미국 동부와 북유럽 일대, 특히 K-POP의 미래 트렌드를 수집하며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비밀 매니아 포럼 '노스탤지어'의 서버 게이트웨이를 기점으로, 비정상적일 만큼 정교하고 거대한 규모의 트래픽이 아레스의 스트리밍 채널로 무섭게 수렴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고의로 연출한 것처럼, 혹은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레스의 무대를 세계적인 전장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도경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역주행의 신호탄인가, 아니면 또 다른 거대한 음모의 시작인가.

귓가에 다시금 징하는 이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경의 시선이 붉게 타오르는 모니터 그래프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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