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을 감싸고 있던 따스한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답니다.
문틈새로 흘러들어온 검푸른 그림자가 사일러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어요. 황금빛 안광을 번뜩이며 서 있는 사내, 카엘렌 아우렐리아 황제의 등장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자아냈지요. 그의 손끝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자루를 툭툭 건드릴 때마다, 방 안의 미세한 먼지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가라앉았답니다.
사일러스는 본능적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더 깊숙이 처박았어요. 제국 최고의 마법학자라 불리는 그였지만, 제국의 정점에 선 포식자의 살기 앞에서는 한낱 유약한 학자에 불과했으니까요.
“발렌타인의 천재가 어찌하여 내 딸의 침소에서 무릎을 꿇고 기고 있는 거지?”
카엘렌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마치 거대한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 같았답니다. 그의 구두 굽이 대리석을 딛는 소리가 느릿하게 고막을 파고들었어요. 사일러스는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간신히 참아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폐하…… 신은 그저, 요정 전하의 초월적인 권능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굴복했을 뿐입니다. 이 위대한 성물을 수호하기 위해 제 미천한 학식과 가문의 증표를 바치고자 청하고 있었습니다.”
카엘렌의 매서운 시선이 사일러스의 손바닥 위에 놓인 황실 은행의 인장과 가신 증표로 향했답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어요. 황제는 세상의 그 어떤 호의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통제광이었으니까요. 학자 놈들의 얄팍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바실리우스 대공이 보낸 또 다른 교묘한 덫인지 저울질하는 그의 눈빛은 잔인할 정도로 차가웠지요.
그 일촉즉발의 순간, 침대 위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카엘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벨루아에게로 옮겨갔어요.
벨루아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답니다. 마도서 ‘애버리스’를 사용한 대가로 영혼의 감정이 일시적으로 저당 잡힌 지금, 그녀의 가슴속은 시린 얼음장처럼 고요했지요. 기쁨도, 두려움도,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무감각의 상태.
벨루아는 그저 맑고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로 카엘렌을 빤히 바라보았답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려야 할 아기다운 생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서늘한 신비로움만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어요. 하얀 뺨은 마치 정교하게 깎아 만든 대리석 인형처럼 고요했고, 입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게 닫혀 있었지요.
카엘렌은 딸의 그 기묘할 정도로 차가운 무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경외감에 사로잡혔답니다.
‘이 아이는…… 지금 지상의 번잡한 다툼을 가엾게 여기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비열한 음모와 살기 어린 대치 상황 속에서도, 벨루아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카엘렌의 눈에는 딸의 무표정이 인간의 감정을 넘어선 ‘요정의 고결한 무심함’으로 보였답니다. 은빛 머리칼이 밤바람에 한 가닥 흔들리는 모습조차 지상의 먼지를 털어내는 성스러운 몸짓처럼 느껴졌지요.
카엘렌의 손끝에서 살기가 연기처럼 흩어졌답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사일러스를 향해 차갑게 읊조렸어요.
“요정의 눈빛이 너를 가엽게 여기는구나. 감히 내 허락 없이 이 장미 정원에 발을 들인 죄는 무거우나, 내 딸이 너의 충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면 기회를 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이 목숨을 바쳐 황녀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사일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답니다.
벨루아는 무표정한 얼굴 뒤로 메마른 계산을 끝마쳤어요. 제국 최고의 마법학자를 단돈 금화 수천 닢의 마력 잔고로 낚아채어 장미 정원의 방패막이로 삼았으니, 손익계산서의 숫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지요. 비록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기쁨은 솟아나지 않았지만, 이 안전한 계약 관계야말로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평화의 초석이 될 터였답니다.
* * *
사일러스가 물러가고 깊은 밤이 찾아왔을 때, 벨루아는 침대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시녀 메리를 호출했답니다.
메리는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제 치맛자락을 꽉 움쥐며 벨루아의 발치에 엎드렸어요. 그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융단 바닥을 적시고 있었지요. 바실리우스 대공의 세작으로 황궁에 침입했던 그녀는, 이미 벨루아의 기묘한 카리스마와 마도서의 권능에 영혼까지 압도당한 상태였답니다.
“전, 전하…… 살려주십시오. 대공이 보낸 무리가 저를 매일같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아무런 보고도 올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장 저를 의심하고 제거할 것입니다.”
메리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어요. 벨루아는 아기 침대 난간을 짚고 서서, 메리가 품속 깊은 곳에 숨겨둔 마법 통신기기를 가만히 응시했답니다. 은색으로 도금된 조그만 통신구에서는 미세하게 붉은빛의 배후 통교 신호가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대공의 마법사들이 실시간으로 신호를 추적하며 메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장치였어요.
벨루아는 오동통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릿속의 마도서 ‘애버리스’를 펼쳤답니다.
[시스템 메시지: 대상 ‘마법 통신기기’의 배후 신호를 탐지했습니다.] [신호 왜곡 및 우회 필터링 장벽 구축 비용: 마력 150포인트.] [현재 잔고: 12,500포인트.] [지출하시겠습니까? (Y/N)]
벨루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릿속으로 동의를 표했답니다. 장부의 숫자가 슥슥 지워지며 새로운 숫자가 기록되었어요.
그와 동시에 메리가 쥐고 있던 통신구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마력의 막이 씌워졌답니다. 이제 대공이 보내는 질문과 메리가 보내는 응답은 모두 벨루아의 마도서 필터를 거쳐 철저하게 왜곡될 터였지요.
벨루아는 아주 느릿하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메리에게 지시를 내렸답니다. 비록 감정은 메말라 있었지만, 머릿속의 전략은 그 어느 때보다 명석하게 굴러가고 있었어요.
“말해.”
“네, 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요정의…… 기적이 폭주해서.”
벨루아는 짤막한 단어들을 조합해 메리에게 속삭였답니다. 아기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명령의 무게는 메리의 영혼을 옭아매기에 충분했지요.
“벨루아가…… 아주 약해졌다고. 마력이 다 타버려서, 누워만 있다고.”
메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답니다. 대공에게 요정의 기적이 교란되어 황녀가 무력해졌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라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되면 대공은 방심할 것이고, 벨루아를 향한 직접적인 물리적 위협을 늦추는 대신 자신들의 거처인 대공저로 그녀를 유인하려 들겠지요.
“알겠…… 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대공에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제 목숨은 이제 전하의 것입니다.”
메리는 통신구를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공의 마법사들에게 거짓 보고를 전송하기 시작했답니다. 붉은 통교 신호가 왜곡되어 대공의 저택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벨루아는 차가운 입꼬리를 살짝 올렸어요.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암약하던 세작망의 한 축이, 이제는 벨루아의 완벽한 이중 첩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답니다.
* * *
사흘 뒤, 장미 정원의 아침은 유난히도 화사하고 싱그러운 햇살로 가득했답니다.
다가올 건국 기념 연회에 벨루아를 정식으로 참석시키기로 결정한 카엘렌 황제는, 이른 아침부터 거대한 보석 상자를 들고 딸의 침소를 찾았어요. 그의 뒤로는 화려한 비단 제복을 입은 시종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지요.
“나의 사랑스러운 요정아.”
카엘렌은 침대맡에 앉아 벨루아의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답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오직 딸을 바라볼 때만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찼어요. 그는 시종에게 손짓하여 보석 상자를 열게 했지요.
상자가 열리는 순간, 방 안 전체가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답니다.
상자 안에는 은은하게 잘 익은 복숭아 향이 사방으로 퍼지는, 만지면 말랑말랑한 솜사탕처럼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장미 빛깔의 둥근 결정체가 놓여 있었어요. 황실의 비장고에서 꺼내온 최고급 아티팩트, ‘루벨라이트 성화구’였답니다.
“대공의 저택은 뱀들이 드글거리는 음습한 곳이지. 그곳의 탁한 공기가 감히 나의 고결한 요정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정화의 보석을 준비했다. 이것이 너를 모든 독과 사악한 저주로부터 완벽하게 지켜줄 것이다.”
카엘렌은 이 정화구가 딸을 위한 완벽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의 표정으로 주접을 떨었답니다.
하지만 벨루아의 보랏빛 눈동자는 보석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 안에 내재된 엄청난 마력의 가치에 고정되어 있었지요.
‘어머나, 이건 진짜 비싼 거잖아.’
벨루아는 아장아장 걸어가 오동통한 두 손으로 루벨라이트 성화구를 꼭 안았답니다. 그리고 카엘렌에게 품에 안긴 보석을 꼭 쥐고 자는 척을 하며, 속으로는 침을 꼴깍 삼켰어요.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서자마자, 벨루아는 즉시 머릿속의 마도서 ‘애버리스’를 소환했답니다.
[시스템 메시지: 초고농도 순수 마력 결정 ‘루벨라이트 성화구’를 감지했습니다.] [물질 분류함에 투입하여 마력 자원으로 환산하시겠습니까?] [환산 가치: 순수 마력 50,000포인트.]
‘오만 포인트라니! 대박이다!’
벨루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답니다. 그녀는 지체 없이 정화구를 마도서의 물질 분류함에 밀어 넣었어요.
스르륵, 보석의 겉면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광채가 벨루아의 손끝을 타고 마도서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답니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장미 빛깔을 띠고 있어 카엘렌이나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알맹이는 이미 마도서의 즉각 변환 에너지로 완벽하게 치환된 상태였지요.
이로써 대공이 연회장에서 꾸밀지 모르는 그 어떤 초대형 음모라도 단숨에 상쇄하고 역공을 펼칠 수 있는 엄청난 비상 자금이 확보되었답니다. 장부의 잔고가 가득 차오르는 모습을 보며 벨루아는 몽글몽글한 안도감을 느꼈어요. 역시 돈과 마력은 쌓아둘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바로 그때, 시녀 메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은쟁반 위에 올려진 화려한 봉투를 바쳤답니다.
“전하, 바실리우스 대공이 보낸 정식 연회 초대장입니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대공 가문의 독수리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검은색 종이 봉투였지요. 벨루아는 흥미롭다는 듯 아기 손을 뻗어 초대장을 만지려 했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어요.
삐이익—!
[경고! 미확인 변칙 독극물 감지!] [초대장 표면에 미세하게 도포된 ‘블랙 위도우의 눈물’을 발견했습니다.] [접촉 시 신경계를 마비시키고 마력 흐름을 차단하는 지체성 독극물입니다.]
벨루아는 짐짓 모르는 척, 통통한 손가락 끝으로 초대장의 모서리를 콕 찍었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메리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벨루아는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어요. 대공 놈이 감히 요정의 힘을 시험하겠답시고 초대장에 대량의 음모 마력 독극물을 묻혀 보낸 것이 분명했지요. 만약 평범한 아기였다면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고열에 신음하며 쓰러졌을 터였답니다.
그러나 벨루아에게는 이 가해의 손길이 그저 공짜 충전재에 불과했지요.
[시스템 메시지: 독극물 ‘블랙 위도우의 눈물’을 자원으로 흡수합니다.] [해독 및 마력 변환 중…….] [자원 변환 완료: 순수 마력 500포인트가 추가 적립되었습니다.]
‘어머, 고마워라. 독을 보냈더니 마력을 공짜로 주네?’
벨루아의 뺨에 살짝 생기가 돌았답니다. 대공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치명적인 독약이 마도서의 필터를 거치자마자 달콤한 에너지 음료처럼 변환되어 그녀의 장부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지요.
벨루아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한층 더 맑아진 눈동자로 초대장을 이리저리 흔들며 놀았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리는 황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면모에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어요. 독마저도 장난감처럼 다루는 요정 황녀의 지배 아래 들어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 * *
마침내 건국 기념 연회가 열리는 날이 밝았답니다.
장미 정원의 시녀들은 벨루아를 치장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어요. 오늘 벨루아가 입은 옷은 촉촉한 아침 이슬을 머금은 백합처럼 눈부시게 하얗고,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부드러운 실크 소매에, 달콤한 바닐라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아기 드레스였답니다. 머리에는 은빛 모래처럼 반짝이는 작은 티아라가 얹혀 있었지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벨루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 완벽하고 무해한 요정 아기의 외양 뒤에, 대공 가문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마도서의 장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겠어요.
“가자, 나의 요정아. 제국의 모든 이들이 너의 고결한 모습을 우러러볼 것이다.”
카엘렌 황제가 벨루아를 품에 안아 들었답니다. 그의 단단한 팔 안에서 벨루아는 편안하게 몸을 기댔어요.
정원 밖에는 황실의 상징인 금빛 사자가 새겨진 거대하고 안락한 마차(전차)가 대기하고 있었지요. 마차의 내부는 폭신한 양털 시트와 따스한 온풍 마법으로 가득 차서, 벨루아가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기에 딱 좋았답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벨루아는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았어요.
마차가 황궁의 삼엄한 경계망을 벗어나 도심을 가로지르고, 점점 더 황량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구역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답니다. 차창 밖의 풍경이 화사한 장미 정원에서 삭막하고 어두운 회색빛 건물들로 변해갔지요.
그리고 마침내, 전차가 거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답니다.
벨루아는 작은 손으로 마차의 유리창을 살짝 닦아내고 밖을 응시했어요.
그녀의 눈앞에, 저 멀리 짙은 안개 속에서 사악한 짐승의 이빨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실리우스 대공 저택의 검은 성곽이 그 웅장하고도 기괴한 자태를 드러냈답니다. 성문 앞에는 붉은 눈을 번뜩이는 대공가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황실 마차를 기다리는 바실리우스 대공이 서 있었지요.
벨루아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답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도서 ‘애버리스’의 장부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가며, 어둠 속에서 붉은빛의 숫자들이 서서히 명멸하기 시작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