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 너머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실리우스 대공 저택의 검은 성곽은 마치 밤하늘을 찢고 돋아난 거대한 괴수의 이빨 같았답니다. 차갑고 습한 북부의 바람이 마차의 창틀을 두드릴 때마다, 웅장하면서도 기괴한 성벽의 그림자가 벨루아의 뺨 위로 짙게 드리워졌어요.
황실 전차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얼음 향기였지요.
“나의 고결한 요정아. 이 추잡하고 음습한 곳에 너의 가녀린 발을 디디게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카엘렌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서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듯, 벨루아를 소중하게 품에 안아 들었답니다. 단단하고 따스한 그의 품에서는 은은한 침향과 굳건한 마력의 온기가 흘러나와 벨루아의 작은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어요.
“우웅…….”
벨루아는 통통하고 부드러운 뺨을 황제의 어깨에 비비며 이불 속에 누운 아기 고양이처럼 웅얼거렸답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아빠의 품이 좋은 무해한 아기 요정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지요.
‘대공 저택의 기사들, 총 마흔두 명. 마력 반응은 하급에서 중급 수준. 하지만 저기 서 있는 대공의 몸 주변에 흐르는 마력은 꽤 축축하고 끈적한데?’
성문 앞에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도열한 대공가의 기사들이 서 있었고, 그 중심에는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바실리우스 대공이 서 있었답니다. 그는 황제를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도, 카엘렌의 품에 안긴 벨루아를 향해 탐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어요.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시여, 그리고 하늘이 내리신 요정 황녀 전하를 이 누추한 대공저에 모시게 되어 가문 대대의 영광이옵니다.”
바실리우스 대공의 목소리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웠지만, 그 안에는 벼려진 칼날 같은 적의가 숨어 있었지요. 대공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단단히 닫혀 있던 연회장으로 향하는 전용 정원의 문이 활짝 열렸답니다.
“황녀 전하의 눈부신 걸음을 축복하기 위해, 본 대공이 특별히 북부의 진귀한 겨울 꽃들로 화단을 가꿔 두었나이다. 부디 이 아름다운 꽃길을 거닐며 요정의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문이 열림과 동시에, 사방으로 화려하게 만개한 겨울 장미와 백합들이 그 자태를 드러냈어요. 하얗고 푸른 꽃잎들이 얼음처럼 투명하게 빛나며 환상적인 정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요. 귀족들은 그 화려함에 탄성을 질렀답니다.
하지만 벨루아의 아기자기한 이마가 미세하게 찌푸려졌어요.
달콤하고 향긋한 꽃향기 사이에, 아주 미세하지만 썩은 과일처럼 들큼하고 기분 나쁜 향이 섞여 전해졌기 때문이었지요.
‘이건…… 그냥 꽃이 아니야.’
그 순간, 벨루아의 뇌리에서 붉은빛의 마력 장부가 스르륵 펼쳐졌답니다. 등가교환의 결산 마도서 ‘애버리스’가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여 눈앞에 투명한 회계 장부를 띄운 것이었지요.
[경고: 치명 독소 성향의 변이 마력 감지.] [물질명: 카바르의 숨결 (지포스 계열의 신경 독소)] [출처: 사일러스 발렌타인이 탐색하던 ‘붉은빛의 마력 이상 감지 마도구’의 표적 물질과 일치.] [정화에 필요한 등가 비용: 마력 연료 300포인트 혹은 시전자의 ‘기쁨’ 감정 24시간 동결.]
벨루아는 속으로 혀를 찼답니다. 사일러스가 황궁 구석구석을 뒤지며 찾고 있던 그 불길한 독소 반응이, 바로 이 화려한 환영 화단 밑바닥에 검게 깔려 있었던 것이었어요. 대공은 요정 황녀의 이적이 진짜인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혹은 이 자리에서 벨루아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기 위해 영리하게 정화되지 않는 독을 심어둔 것이 분명했지요.
‘마력 연료를 쓰기엔 장부의 잔고가 아까워. 그렇다면 이자 지출은 감정으로 한다!’
벨루아는 주저 없이 ‘애버리스’의 장부에 서명을 마쳤답니다.
[결산 완료: 등가 지출로 인해 24시간 동안 시전자의 ‘기쁨’ 및 ‘애정’ 감정이 마도서에 저당 잡힙니다.]
순식간에 벨루아의 영혼 안쪽에서 따스하고 몽글몽글하던 감정의 실타래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런 감흥도, 즐거움도, 심지어 아빠를 보며 느끼던 미미한 안도감조차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차가운 얼음장 같은 무감각함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답니다.
그와 동시에, 벨루아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 귀엽게 짓고 있던 아기 특유의 발랄한 미소가 완전히 걷혔어요.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가라앉았고, 뺨의 붉은 기운마저 가시며 마치 대리석으로 조각한 고대 신상의 얼굴처럼 차갑고도 고고한 무표정이 내려앉았지요.
“…….”
벨루아가 조용히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답니다.
그러자 화단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피어오르던 검은 독기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붙잡힌 것처럼 순식간에 흩어지며 아주 맑고 눈부신 금빛 모래바람으로 치환되어 사방으로 흩날렸어요. 독소가 완전히 정화되어 무해한 마력의 잔재로 변해버린 것이었지요.
이 믿기지 않는 이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바실리우스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답니다.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카엘렌 황제에게서 일어났지요.
카엘렌은 품에 안긴 벨루아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었답니다. 방금 전까지 제 품에 매달려 웅얼거리던 사랑스러운 딸이, 한순간에 제국의 그 어떤 군주보다도 차갑고 두려운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본 것이었어요. 그 무표정은 단순한 아기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가 지니는 신성한 위엄 그 자체였지요.
“나의 영특한 요정아…….”
카엘렌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답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광적인 경외감과 주접스러운 감동이 번져갔어요.
“네가 이 비열한 자들의 사악한 수작에 진노하였구나. 감히 인간의 얄팍한 속임수로 너의 고결함을 시험하려 들다니, 대공은 제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황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살기가 대공 저택의 정원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답니다. 대공은 황제의 기세에 눌려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어요.
벨루아는 감정이 마모된 아주 차분한 상태로 속으로 생각했지요.
‘아빠, 그건 오해인데…… 뭐, 내 안전을 지키는 데는 이 오해가 훨씬 이득이니까 상관없나.’
황제의 철저히 계산된 과보호와 광적인 주접 덕분에, 벨루아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대공의 첫 번째 도발을 완벽하게 무력화할 수 있었답니다.
***
대공저의 화려한 연회장은 이미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금실로 정교하게 자수를 놓은 붉은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테이블 위에는 달콤한 시나몬 향이 감도는 구운 사과 타르트와 바삭한 칠면조 구이, 그리고 수정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가 가득 차 있었지요.
귀족들은 겉으로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잔을 부딪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온통 황제의 품에 안겨 입장하는 벨루아에게 쏠려 있었답니다.
“저 아기가 정말로 요정의 기적을 부린다는 그 황녀인가?” “흥, 그래봤자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일 뿐이지. 황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연극을 꾸미는 것이 분명해.”
구석진 테이블에 모여 앉은 몇몇 귀족들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우아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어요.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벨루아의 예민한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지요.
벨루아는 카엘렌의 품에 안겨 연회장 전체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답니다.
그녀가 속으로 ‘장부 열람’을 읊조리자, 연회장 내부의 풍경이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어요.
벨루아의 시야 속에서, 연회장에 모인 모든 인물의 머리 위에 반짝이는 회계 전표 형태의 환영들이 정렬되어 떠오른 것이었지요. 그것은 일종의 ‘의도와 자금 흐름의 장부’였답니다.
이 놀라운 정보력의 원천은 바로 시녀 메리였어요.
벨루아는 이미 지난밤, 메리가 숨겨두었던 대공가의 비밀 마법 통신기기를 해킹하는 데 성공했었지요. 메리를 완벽하게 이중 스파이로 포섭하여, 대공에게는 “황녀가 기적을 쓸 때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하게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대공가와 내통하는 귀족들의 은밀한 통교 신호와 그들의 치부, 뇌물 장부의 데이터들을 모조리 애버리스의 장부로 이체받아 둔 상태였지요.
‘어디 보자…… 저기서 가장 크게 비웃고 있는 대머리 후작님은?’
벨루아의 눈동자가 반짝였답니다.
[결산 장부 - 브론테 후작] [- 지출 이력: 북부 국경 수비대 식량비 횡령 (40,000 골드)] [- 최근 거래: 대공가로부터 영지 세금 감면을 약속받고 황실 마차의 이동 경로 유출 가담]
벨루아는 이 차갑고 명확한 수치들을 보며 작게 입꼬리를 올렸어요. 감정이 마모되어 차분해진 덕분에, 그들을 향한 조롱의 대사를 고르는 것이 한결 더 정밀하고 냉혹해졌지요.
벨루아는 카엘렌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아기 특유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답니다.
“바부…… 뗘뗘…….”
“음? 나의 요정아, 무엇이 필요하느냐? 저 더러운 인간들의 얼굴이 보기 싫은 것이냐?”
카엘렌이 즉각 반응하며 귀를 기울였어요. 연회장의 이목이 순식간에 황제와 황녀에게로 집중되었지요.
벨루아는 브론테 후작을 향해 하얗고 통통한 손가락을 정확히 겨누었답니다. 그러고는 혀가 짧은 아기 말투로, 하지만 연회장 전체에 또렷하게 울려 퍼질 만큼 명확한 단어들을 내뱉었어요.
“저기 빤땩이 아딲시…… 군대 밥 요따만하게 뚀우고, 대공댱한테 돈 받아뗘 마차 길 갈켜줘따! 장부에 다 이뗘!”
“……!!”
순식간에 연회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답니다.
브론테 후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어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졌지요. 붉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바닥을 적셨답니다.
“그, 그것이 무슨……! 황녀 전하께서 아직 어려 아기 말씀으로 헛소리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브론테 후작이 다급하게 변명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카엘렌 황제의 눈빛은 이미 얼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지요. 황제는 벨루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작을 바라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답니다.
“나의 요정은 제국의 모든 흐름을 꿰뚫어 보는 성스러운 존재다. 감히 그 주둥이로 요정의 신탁을 부정하려 드는가?”
카엘렌이 가볍게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금빛 갈기 기사들이 순식간에 브론테 후작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어요.
“황제 폐하! 억울하옵니다! 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말을 믿으시다니요!”
“끌고 가라. 당장 저놈의 영지와 가문 장부를 샅샅이 털어 한 닢의 세금이라도 오차가 있다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황제의 추상 같은 명령에 브론테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답니다.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숙였어요. 요정 황녀가 아기의 몸으로 자신들의 가장 은밀한 죄악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의 오만하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극도의 공포만이 그 자리를 채웠지요.
벨루아는 품 안에서 아주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답니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장부를 숨겨? 내 앞에서는 제국의 그 어떤 비밀도 전부 숫자로 환산되어 기록될 뿐이야.’
메리를 통한 이중 첩자 포섭과 마도서의 정보 수집력이 만들어낸 완벽한 판정승이었지요. 대공의 파벌은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장 든든한 우군 중 하나를 잃고 완전히 위축되어 버렸답니다.
***
연회장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그때, 저 멀리서 붉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어요.
바실리우스 대공이었답니다.
그의 손에는 기묘할 정도로 붉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가시넝쿨로 엮인 장미 화환이 들려 있었지요. 화환의 중심에는 검붉은 독기가 안개처럼 스며 나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어요.
사일러스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다급하게 마력 감지 도구를 만지작거렸지만, 이미 대공의 걸음은 황제의 앞까지 닿아 있었답니다.
“황녀 전하의 신비로운 신탁에 진심으로 감탄하였나이다.”
대공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핏빛 장미 화환을 높이 치켜들었어요.
“이것은 우리 북부 대공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핏빛 장미의 영혼’이라 불리는 성물이옵니다. 오직 제국을 수호하는 진정한 요정님만이 이 화환의 가시를 견디고 축복을 내릴 수 있다고 전해지지요.”
대공의 눈빛에 광기 어린 독기가 서렸답니다.
그는 화환을 벨루아의 머리 위로 천천히 내리누르듯 다가왔어요. 화환에 엉겨 붙은 치명적인 독기가 벨루아의 뺨을 향해 뱀처럼 혀를 낼름거리며 다가오는 순간이었지요.
“어디, 진정한 요정의 격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시지요, 황녀 전하.”
대공의 음산한 목소리가 벨루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