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제국의 가장 깊고 은밀한 어둠 속에서 바실리우스 대공이 보낸 눈먼 까마귀들이 암시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답니다. 오직 황녀의 숨통을 끊어 놓을 단 하나의 예외이자 전설 속의 맹독, ‘피빛 장미’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그들이 핏발 선 눈으로 음침한 그림자를 쫓는 동안, 정작 폭풍의 눈인 로즈 가든의 침실은 솜사탕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평화로 가득 차 있었어요.
침대 모퉁이에 낙엽처럼 웅크린 시녀 메리는 제 손에 든 붉은 석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답니다. 대공에게 거짓 정보를 전송한 마법 통신기기는 이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싸늘하게 식어 침묵하고 있었지요. 메리는 제 거친 심장 소리가 바깥에 대기 중인 기사들에게까지 들릴까 봐 두 손으로 꼬옥 가슴을 눌렀어요. 자신이 대공의 세작이라는 엄청난 비밀이, 이 조그만 아기 침대 위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들통나고 도리어 대공가를 파멸로 몰고 갈 치명적인 덫으로 쓰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메리의 등 뒤로 식은땀이 가늘게 흘러내렸답니다.
“잘했어, 메리.”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와 함께 벨루아가 조그만 입술을 열었답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메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잘게 떨었어요. 벨루아의 목소리가 평소 황제 앞 부리던 아기다운 옹알이가 아니라, 마치 깊고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서늘한 신탁 같았기 때문이지요.
벨루아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있었답니다. 부드럽고 뽀송한 살구색 실크 잠옷을 입고, 은빛 레이스가 촘촘히 박힌 앙증맞은 소맷단 사이로 하얗고 포동포동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기 천사였어요. 달콤하고 따스한 우유 향기가 솔솔 풍기는 보드라운 담요를 덮은 작은 요정.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답니다.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대공을 속였다는 일말의 유쾌함조차 완전히 지워진 무결한 무표정이었지요.
그것은 마도서 ‘애버리스’를 사용해 대공을 낚는 거대한 기적의 연출을 완성한 대가였답니다. 기적의 규모가 크고 정교할수록 영혼의 안감을 수수료로 저당 잡히는 냉혹한 제약. 일찍이 카엘렌 황제마저도 숨을 죽이게 만들었던 그 신비롭고도 오싹한 무표정이 다시금 벨루아의 어린 얼굴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벨루아는 지금 제 가슴속이 차디찬 얼음 장부처럼 텅 비어 버린 것을 느꼈답니다. 전생의 배신으로 다져진 불신증 위에 감정의 상실까지 더해지니, 세상만사가 오직 차가운 수치와 손익계산서로만 보였어요.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지만, 벨루아는 오히려 흡족했답니다. 감정이 배제된 상태야말로 가장 완벽하고 냉철하게 생존 계획을 설계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때, 굳게 닫힌 창문 틈새로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스며들었답니다.
스스슥, 하는 기묘한 마찰음과 함께 장미 덩굴이 우거진 테라스 너머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어요. 침실의 은은한 마법 조명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사일러스 발렌타인이었지요.
제국 최고의 이성이라 자부하던 학자의 몰골은 몹시 초라했답니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은발은 헝클어져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평소 지적인 광채를 뿜어내던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깊은 자책감과 혼란으로 피로하게 얼룩져 있었어요.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마력 탐지기가 폭발했을 때, 혹여나 이 신성한 아기 황녀의 영혼에 작은 흠집이라도 내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며칠 밤을 낮처럼 지새웠던 것이지요.
“황녀 전하…….”
사일러스는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벨루아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소가죽 가방과 함께 침수된 흔적이 역력한 빛바랜 종이 뭉치가 쥐여 있었어요. 그것은 그의 고향이자 현재 제국 남부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해 지역의 피해 보고서이자, 역병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약초 유통망의 비참한 적자 장부였지요.
벨루아는 감정이 마모되어 투명한 유리알처럼 변한 눈동자로 사일러스를 가만히 응시했답니다. 평소의 벨루아라면 황궁의 실세인 그를 포섭하기 위해 "우웅?" 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품에 안겼겠지만, 지금은 그저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침묵만을 유지할 뿐이었어요.
그 압도적인 무표정과 마주한 사일러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답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지요. 아기의 얼굴에서 풍기는 이 형언할 수 없는 신성함과 초연함은, 그가 평생 쌓아 올린 학문적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습니다.
“제 오만이…… 감히 전하의 신성함을 시험하려 들었습니다. 탐지기가 터진 후 전하께서 사흘 동안 깨어나지 못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 학문적 탐욕이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사일러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답니다. 그는 자책감에 짓눌려 제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흩어진 종이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었지요.
벨루아의 시선이 느리게 아래로 향했답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동자가 바닥에 서서히 내려앉은 장부의 글자들을 포착했어요.
[남부 수해 영지 전염병 확산 보고서] [소요 약초: 아스트라이아 초(草) 5,000근] [유통망 결손 금액: 금화 4,000닢. 남부 수송로 침수로 인한 운송 단가 폭등. 조달 불가능 판정.]
그 순간, 벨루아의 머릿속에서 마도서 '애버리스'의 황금빛 페이지가 거센 바람을 만난 것처럼 스스로 스르륵 넘어가기 시작했답니다.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머릿속에 정교한 수치와 등가교환의 공식들이 일사분란하게 나열되었어요.
‘사일러스 발렌타인. 제국 최고의 천재 마법학자이자 중립 파벌의 수장. 그를 완전히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은 향후 대공과의 결전에서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된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고향 남부 영지의 수해와 전염병. 유통망의 적자 수치는 금화 4,000닢에 불과하다.’
벨루아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작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답니다. 현재 마도서 잔고에는 그동안 카엘렌 황제에게 받은 온갖 값비싼 보석들과 마력석의 가치가 차고 넘치게 기록되어 있었지요.
‘기적 발동 조건 확인. 유통망의 적자 수치를 마도서의 잔고로 대납하고, 해당 약초의 공간 전송 및 대량 복제를 인출한다.’
벨루아가 조용히 손을 뻗었답니다. 포동포동하고 하얀 아기 손가락이 사일러스의 장부 위에 살포시 얹어졌어요.
“아차아…….”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옹알이였으나, 벨루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정화시키는 거대하고 순수한 황금빛 마력이었답니다.
사일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렸지요.
벨루아의 손가락이 닿은 장부 위의 '적자 4,000 gold'라는 붉은 글씨가 눈부신 황금빛으로 화하더니,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답니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던 글씨들이 이내 깔끔한 서체로 '결제 완료(Paid)'라는 문구로 재조합되었어요.
그와 동시에, 침실의 넓은 대리석 바닥 위로 기이하고 정교한 기하학적 마법진이 스스로 그려지기 시작했답니다. 지독한 비소 독을 봄바람으로 바꾸었던 그 상냥하고도 거대한 질서의 힘이 방 안을 가득 채웠어요. 싱그러운 풀 내음과 풋풋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지요.
스슥, 스스슥!
공간 자체가 가볍게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푸른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신비로운 서리꽃 모양의 약초들이 허공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답니다. 남부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비약이자, 현재 제국 전역의 약방을 뒤져도 단 백 근조차 구하기 힘들다던 극귀한 '아스트라이아 초'였어요.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정화되어 생명력이 뚝뚝 떨어지는 극상품의 상태로 말이지요.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푸른 약초 더미를 보며, 사일러스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듯 석상처럼 굳어 버렸답니다.
“이, 이럴 수가…… 학술적으로 공간 전송 마법은 등가의 마력 소모뿐만 아니라 좌표의 정밀한 연산이 필요한 극 고위 마법인데…… 어떻게 이토록 막대한 양의 생명력을 지닌 식물을 아무런 공식도 없이 조율하신단 말입니까? 그것도 제국의 법률과 장부를 직접 수정하면서까지……!”
“공짜는, 없어.”
벨루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답니다.
그 서늘하고도 신비로운 목소리에 사일러스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어요. 감정이 배제된 벨루아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사일러스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지요.
그 순간, 사일러스의 품 안에 있던 수해 지역 연락용 마법 통신구가 격렬하게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답니다. 사일러스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통신구를 꺼내 들자, 남부 영지 지부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 [지, 지부장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방금 전, 영지 중앙 창고에 수천 근의 아스트라이아 초가 가득 흘러넘치듯 전송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유통망을 옥죄던 연체 적자 장부가 전부 황금빛 마력으로 씻겨 내려가며 결제 완료 처리되었습니다! 영지민들이 신성한 요정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축복입니다!]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영지민들의 환호성과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일러스는 마침내 제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마법적 현상이 아니었어요. 세상의 법칙과 수치, 경제적 결손을 실시간으로 메우고 등가의 기적을 현실로 환산해 내는 초월적인 권능.
제국 최고의 이성이자 철저한 분석가라 자부하던 사일러스의 세계관이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이었지요. 자신이 신뢰하던 마법학적 공식도, 차가운 합리성도 이 완벽하고 실재하는 구원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했답니다.
사일러스는 바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벨루아의 아기 침대 난간을 꽉 움켜쥐었답니다. 그의 눈에서 경외감과 깊은 굴복이 담긴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어요.
“전하…… 당신은 단순한 요정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제국의 일그러진 장부를 바로잡고 구원하러 온 진정한 기적의 주재자이십니다.”
그는 품 안에서 자신의 전 재산이자 평생의 연구 자금이 기록된 황실 은행의 인장과 발렌타인 가문의 가신 증표를 꺼내어 바쳤답니다.
“제 모든 연구 자금과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지식을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학자에게 전하의 곁을 지키며 그 위대한 질서를 배울 기회를 주십시오.”
벨루아는 감정이 마모된 상태에서도 머릿속으로 조용히 주판알을 튕겼답니다. 제국 최고의 천재 마법학자를 단돈 금화 수천 닢의 마도서 잔고로 완벽하게 낚아 올렸으니,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기쁨을 느껴야 할 가슴은 여전히 차디차게 식어 있었지요. 벨루아는 냉랭한 무표정으로 사일러스를 내려다보며, 아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답니다. 감정이 배제된 그 미소는 도리어 소름 끼치도록 신비롭고 고결해 보여, 사일러스의 영혼을 깊숙이 사로잡았어요.
사일러스는 숨이 막히는 듯한 경외감을 느끼며 고개를 더욱 바닥에 밀착시켰답니다.
“이 사일러스 발렌타인, 목숨을 바쳐 황녀 전하의 장미 정원을 수호하는 비공식 고문이 되기를 청하나이다. 대공이 감히 전하를 해치려 든다면, 제 모든 학술적 네트워크와 마법적 권한을 동원해 그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문바깥에서 묵직하고 차가운 발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카엘렌 황제였어요. 사일러스가 미처 몸을 숨기기도 전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황제의 황금빛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