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일러스의 콧등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차가운 외눈 안경이 툭, 소리를 내며 옆으로 보기 좋게 비뚤어졌다.

평생을 이성과 수학적 진리만을 신봉해 온 현자의 대가리가 완전히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양피지 조각들은 마치 한겨울의 폭설처럼 황녀의 침실 바닥을 하얗게 뒤덮었다. 기계가 뱉어낸 마지막 연기가 퀘퀘한 구리 냄새를 풍기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 이것이 정녕…… 요정의 힘이란 말인가…….”

사일러스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검게 그을린 탐지기의 잔해를 붙잡고 있었지만, 이미 기계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측정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 기적의 수치 앞에서, 그가 쌓아 올린 모든 학문적 오만은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때, 침실의 묵직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녀의 처소에서 소란을 피우느냐!”

황실 직속 금빛 갈기 기사단의 단장이 이끄는 기사들이 성큼성큼 들이닥쳤다. 그들의 갑옷이 부딪치며 내는 차가운 쇠소리가 사일러스의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 기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학자를 가차 없이 양쪽에서 붙잡아 올렸다.

“이, 이것을 보시오! 이 수치를 보란 말이오! 기계가…… 기계가 터졌단 말입니다!”

사일러스가 허공에서 바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기사들의 얼굴에는 한 줌의 자비도 없었다. 그들에게 사일러스는 그저 신성한 황녀의 정원에 침입해 불경한 쇳덩이를 터뜨린 미치광이 학자에 불과했다.

“황녀 전하의 안위에 해를 끼치려 한 혐의로 즉시 압송한다. 장미정원 밖으로 매쳐라!”

단장의 단호한 명령과 함께 사일러스는 다리가 공중에 뜬 채 그대로 질질 끌려 나갔다. 그가 떨어뜨린 외눈 안경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잘게 부서졌다. 그 소리가 침실에 기묘한 마침표를 찍었다.

소란이 잦아든 방 안으로, 마침내 묵직하고도 위압적인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의 지배자이자 폭군인 황제, 카엘렌 아우렐리아였다.

그는 사일러스가 끌려 나간 자리에 남은 양피지 잔해들을 무심하게 밟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검은 제복 위에 걸쳐진 붉은 망토가 피처럼 바닥을 쓸었다. 그의 매서운 적안이 침실 구석구석을 훑었다. 기계가 터지며 남긴 백합 향기와 온화한 온기가 여전히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카엘렌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벨루아를 내려다보았다.

벨루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부드러운 살구색 실크로 짜인, 보슬보슬하고 가벼운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향긋한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아주 호사스러운 아기 옷에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옷차림과 달리, 벨루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도서 애버리스가 거두어 간 서늘한 '수수료' 때문이었다.

정화의 기적을 사용한 대가로 벨루아의 영혼에서 기쁨과 두려움, 애정 같은 온기 어린 감정들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마모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깊고 차가운 호수의 얼음판처럼 투명하고도 무감각했다. 아기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울음이나 공포, 혹은 아빠를 향한 반가움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엘렌은 그 차가운 무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통의 부모라면 아이의 이상한 상태에 겁을 먹었겠지만, 의심 많고 잔혹한 이 황제의 뇌 회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카엘렌의 눈동자가 경이로움으로 가늘게 떨렸다.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눈빛이군.”

카엘렌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전율이 담겨 있었다.

“속세의 소란 따위는 한낱 먼지처럼 여기는 저 서늘한 초연함. 오직 고결한 요정의 핏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성한 권태로다.”

벨루아는 속으로 혀를 차고 싶었다. '권태는 무슨 권태야. 그냥 영혼의 통장 잔고가 털려서 아무 느낌도 안 나는 건데.' 하지만 감정이 저당 잡힌 상태라 그런 냉소적인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아주 건조한 숫자의 나열처럼 무미건조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백자로 빚은 인형처럼 고요했다.

카엘렌은 한쪽 무릎을 꿇어 벨루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커다란 손이 벨루아의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혹여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듯한, 그의 평소 성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진한 손길이었다.

“나의 작은 요정님. 불경한 자들의 의심이 그대를 번거롭게 하였구나. 이 아비가 제국의 종교와 법률에 따라 그대의 신성함을 위협하는 모든 쥐새끼들을 남김없이 솎아낼 터이니, 그대는 그저 이 낙원에서 게으르고 평화롭게 숨 쉬기만 하면 된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벨루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광적인 소유욕과 집착이 엉겨 붙어 있었다. 벨루아의 '이적'은 이미 황실의 권위를 세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성물이자, 카엘렌이 독점해야 할 최고의 자산이었다.

카엘렌은 품에서 작고 앙증맞은 금빛 방울을 꺼내 벨루아의 아기 침대 옆에 놓아두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이 방울을 울리거라. 그 즉시 황궁의 모든 기사가 그대의 발치에 엎드릴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벨루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벨루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마침내 얼어붙었던 영혼의 안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지출되었던 감정의 이자가 반환되는 신호였다. 벨루아의 손가락 끝이 꼼지락거리며 따스한 온기를 되찾았다. 뺨 위로 몽글몽글한 분홍빛 홍조가 다시 돌기 시작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특유의 자본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생존 본능이 요동쳤다.

'하아, 살았네. 아빠의 주접은 갈수록 진화하는구만. 하지만 덕분에 신비감은 제대로 심어줬어.'

벨루아는 침대 머리맡에 누워 있는 작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다음 장부의 페이지를 넘길 차례였다. 사일러스의 탐지기는 날려버렸지만, 이 음모의 배후인 바실리우스 대공을 완전히 뿌리 뽑지 않으면 평생 등 따습고 배부른 게으름뱅이 라이프는 요원했다.

벨루아는 침대 옆의 금빛 방울 대신, 베개 밑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작은 붉은 마법 석판을 꺼냈다. 시녀 메리에게서 일전에 가차 없이 차압해둔, 대공가와의 비밀 통신기기였다.

“메리.”

아주 작고 앙증맞은 목소리였지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리에게는 저승사자의 부름과도 같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아주 조금 열리더니 메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얇은 시녀복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끝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메리는 사일러스가 어떻게 비참하게 끌려 나갔는지 똑똑히 목격한 터였다.

“전,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메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기어 왔다. 그녀는 벨루아의 손에 들린 붉은 마법 석판을 보자마자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자신의 목숨줄이 저 꼬마 황녀의 조그만 손가락 귀퉁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벨루아는 석판을 톡톡 두드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메리. 대공 할아부지한테 편지 보낼 시간이야.”

“네, 네……? 편지라니요…….”

메리가 겁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루아는 아기다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장부를 결산하는 노련한 회계사처럼 매서웠다.

“대공 할아부지가 사일러스 아저씨 기계 터진 거 알면 아주아주 화가 나겠지? 그러니까 메리가 이쁘게 보고서를 써서 보내야 해.”

벨루아는 메리의 손을 끌어당겨 석판 위에 얹었다. 메리는 제국 최정예 기사단도 감지하지 못한 대공가의 비밀 통신기기가, 이 고작 한 살 겨우 넘은 아기의 손바닥 안에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공포를 느꼈다. 대공이 자랑하는 철저한 보안망이, 실상은 벨루아의 손익계산서 위에서 장난감처럼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 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벨루아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황녀의 요정 기적은 진짜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일러스의 정밀 탐지기마저 그 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과부하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황녀가 지닌 정화의 힘은 완전무결하여, 현존하는 그 어떤 독물이나 마법적 타격도 통하지 않는 성스러운 영역에 도달해 있습니다.’”

메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석판 위에 마력을 흘려 글자를 새겼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크게 울렸다.

“전, 전하…… 이렇게 보내면 대공 전하께서 황녀님을 완전히 포기하실까요……?”

메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벨루아는 콧방귀를 뀌고 싶었지만 꾹 참고, 메리의 이마를 조그만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바보야. 대공 할아부지는 욕심쟁이라서, '절대 안 뚫리는 방패'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든 뚫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걸?”

그것이 바로 벨루아가 노리는 역정보의 함정이었다.

대공이 황녀의 '요정의 완전무결성'을 어떻게든 뒤흔들기 위해 연회 자리에서 직접 무리한 공작을 펼치도록 유도하는 것. 완벽한 방패라는 소문을 믿고, 대공이 스스로의 파멸을 재촉할 치명적인 창을 꺼내 들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여기에 한 줄 더 추가해.”

벨루아의 눈동자가 영악하게 빛났다.

“‘다만, 고대 제국 비사에 따르면, 요정의 정화 능력조차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제국 내에서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희귀한 독, 피빛 장미의 독기뿐입니다. 만약 향후 개최될 황실 연회에서 이 유독 장미를 황녀에게 직접 접촉할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요정의 가짜 기적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메리의 손끝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는 벨루아가 파놓은 함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공이 이 정보를 미끼로 물어 연회 자리에서 직접 가해 공작을 펼친다면, 그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반역 행위가 될 터였다. 게다가 황제 카엘렌의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 독을 살포하려 들 테니, 대공가는 제 발로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된다.

“자, 다 적었으면 전송 신호를 보내.”

벨루아가 속삭였다.

메리는 침을 삼키며 석판의 붉은 보석을 눌렀다. 징, 하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붉은 마법 광채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신호가 국경 너머로 날아갔다.

가장 철저하고 비밀스러워야 할 대공가의 세작망 기밀이, 실상은 이 꼬마 황녀의 침대 위에서 완벽하게 조율된 대본에 따라 배송된 순간이었다.

***

같은 시각, 제국 서부의 어둡고 습한 대공 저택.

바실리우스 대공은 어스름한 촛불 아래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중, 품 안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붉은 석판을 꺼내 들었다. 석판의 표면 위로 메리가 보낸 비밀 보고가 붉은 글씨로 떠올랐다.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대공의 주름진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일러스의 탐지기가 터졌다는 대목에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을 냈지만, 보고의 마지막 문단에 이르자 그의 탐욕스러운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광기가 서서히 차올랐다.

“피빛 장미…….”

대공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정의 완전무결성을 깨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심복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지금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국 전역의 암시장을 뒤져서라도 '피빛 장미'를 확보해라! 단 한 송이라도 좋으니 내 손에 쥐여야 한다!”

대공의 탐욕스러운 명령이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꼬마 황녀가 파놓은 거대한 장부의 덫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대공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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