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웅!

육중하게 닫혀 있던 로즈 가든의 이중 청동 문이 비명 같은 마찰음을 지르며 양옆으로 사정없이 밀려났다. 문틀에 장식되어 있던 붉은 장미 꽃잎들이 후수수 떨어져 내리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어지럽혔다.

“비키시오! 황녀 전하의 신성 모독 여부와 진짜 마력 파장을 조사하라는 황제 폐하의 밀지가 내려졌소!”

매서운 가을바람과 함께 침실 안으로 불쑥 들이닥친 것은 신임 궁정 조사단장, 사일러스 발렌타인이었다. 그의 뒤로는 족히 성인 남성 세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 법한 비대하고 기괴한 연금술 장치가 은색 철제 바퀴를 덜컹거리며 따라 들어왔다. 장치 중앙에 박힌 거대한 유리 구 안에서는 핏빛처럼 붉고 불길한 마력이 끈적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녀 메리는 깜짝 놀라 쟁반에 담아 오던 따스하고 달콤한 우유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얼른 침실 구석의 음영 뒤로 몸을 숨기며, 요람 속에 누워 있는 어린 주인과 사일러스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조금 전 벨루아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는 세법 계약을 맺고 이중 스파이가 되기로 맹세한 그녀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잘게 흔들렸다.

요람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달콤한 존재가 누워 있었다.

벨루아는 몽실몽실하고 부드러운 하얀 거위 털이 가득 찬 요람 속에서, 연한 살구색 빛깔이 감도는 푹신한 아기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아기의 뺨은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우유 식빵처럼 뽀얗고 보드라웠으며, 작은 입술 사이로는 단내가 섞인 맑은 숨결이 규칙적으로 새어 나왔다. 겉보기에는 그저 우주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지키고 싶은 아기 요정의 표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포근한 이불 아래 숨겨진 벨루아의 손은 보이지 않는 마도서 '애버리스'의 가죽 표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사일러스 발렌타인. 저 집요하고 딱딱한 안경잡이가 결국 일을 저지르는구나.’

벨루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 카엘렌이 자신을 제국의 수호 요정으로 선포하고 온갖 극진한 과보호를 퍼붓기 시작하자, 황궁 내의 합리주의자들과 대공 파벌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특히나 모든 현상을 숫자가 아니면 믿지 않는 궁정 조사단장 사일러스에게, 아기 황녀가 행한 기적은 눈엣가시이자 반드시 파헤쳐야 할 사기극에 불과했을 터였다.

사일러스는 차가운 외눈 안경을 치켜올리며 요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가죽 장화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찌르릉하는 불쾌한 금속음이 울렸다.

“황녀 전하께서 일으키신 이적은 제국의 고대 문헌에 기록된 요정의 파장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가를 치르고 강제로 인출하는 어둠의 주술, 혹은 금기된 흑마법의 인공적인 변칙 파동에 가깝지요. 신성한 아우렐리아 가문의 혈통에 감히 사악한 마법의 때가 묻었다면, 이는 제국 전체를 기만하는 대죄입니다.”

그는 냉혹한 목소리로 단언하며 수레 위에 실린 마도구의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텅! 타다당!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기계 장치 끝에 달린 구리 깔때기들이 벨루아가 누워 있는 요람을 향해 일제히 포신처럼 조준되었다. 기계의 심장부에 박힌 붉은 마력 원석이 괴상한 빛을 뿜어내며 실내의 투명한 공기를 붉고 탁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적색 마력 이상 감지기’는 주변의 마력을 강제로 흡수하여 그 근원의 속성을 강제로 역추적하는 성물 검증 장치입니다. 만약 전하의 힘이 진짜 요정의 축복이라면 이 붉은빛은 푸른 정화의 빛으로 바뀔 것이나, 만약 추악한 대가를 지불한 흑마법이라면…… 이 유리 구는 검게 타들어 가며 폭발할 것입니다.”

사일러스의 안경알 위로 붉은 마력의 안개가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벨루아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거나, 본색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실제로 벨루아의 내면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저 기계, 진짜로 주변 마력을 강제 흡수해서 결을 분석하는 물건이잖아? 이대로 내 마도서의 마력 잔재가 읽히면 즉시 파멸이다.’

황녀가 흑마법을 쓴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황제 카엘렌의 그 지독한 과보호는 단숨에 서슬 퍼런 처형대의 단두대로 바뀔 것이 뻔했다. 아우렐리아 가문은 쓸모와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자산을 살려둘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벨루아는 요람 안에서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저 탐지기가 내 마력을 읽기 전에, 내가 저 탐지기의 에너지를 통째로 먹어 치운다.’

벨루아는 마음속으로 황금빛 장부를 펼쳤다. 등가교환의 제왕이자 세법 마법서인 ‘애버리스’가 그녀의 영혼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시스템 메시지: 마도서 ‘애버리스’의 특수 기능 ‘외부 에너지 수용(Absorption of External Energy)’을 설계합니다.] [지출 자원 계산 중…….] [경고: 대규모 마력 흡수 및 등가 전환을 시도할 경우, 시스템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청구 이자로 인해 시전자의 일시적인 ‘감정 상실(Apathy)’ 상태가 즉시 적용됩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기계적인 무기질의 목소리.

벨루아는 주저하지 않고 계약 승인의 도장을 찍었다. 완벽하게 안전하고 나태한 낙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따위 감정 몇 조각쯤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벨루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따스하게 요동치던 온기가 순식간에 싹 빠져나갔다.

마치 봄날의 들판에 갑자기 몰아친 동토의 한파처럼, 그녀의 영혼을 구성하던 감정의 안감이 완전히 마모되어 사라졌다. 기쁨도, 긴장도,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극도의 공허함이 벨루아의 전신을 지배했다.

벨루아의 눈동자가 변했다.

방금 전까지 아기 특유의 맑고 촉촉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둡고 고요한 무채색의 눈빛만이 남았다. 그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은, 오직 차가운 지성과 계산만이 존재하는 기괴하고도 신성한 무표정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일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눈빛이지?’

갓 돌이 지난 아기의 눈에서 나올 수 없는,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초월자가 필멸자를 내려다보는 듯한 서늘한 시선이었다. 사일러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기의 무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신비롭고 압도적이어서, 그 완고한 이성주의자인 사일러스조차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 짧은 침묵의 틈을 타, 벨루아의 정신은 마도서의 장부를 빠르게 갱신했다.

[자원 수집 장부 등록 완료.] [대상: 사일러스의 탐지 도구 내 고농도 ‘적색 마력 원석’ 부품.] [가치 평가: 고순도 마력 결정체 (수치 4,500 마나 상당)] [대기 상태: 외부 에너지 수용 기능 활성화. 타겟의 방출 주파수 동조율 100%.]

벨루아는 요람 밖으로 오동통하고 하얀 아기 손가락을 가볍게 뻗었다. 겉으로는 그저 신기한 기계 장치를 만져보려는 아기의 순진한 옹알이처럼 보였으나, 그 손끝에는 보이지 않는 등가교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부…… 바우?”

벨루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혀 짧은 소리와 동시에, 사일러스의 탐지 기계가 광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기, 기계의 마력 역류 수치가 상승합니다! 단장님, 위험합니다!”

뒤에서 기계를 조율하던 조사관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일러스의 탐지 구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불길한 핏빛 마력 주파수가 요람을 향해 쏘아져 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우욱!

황녀를 고발하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들이밀어 진 붉은 탐지 주파수들이, 벨루아의 작은 손끝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우주의 먼지를 집어삼키듯, 사일러스가 자랑하던 고농도의 적색 마력이 벨루아의 손가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완벽하게 흡수된 것이었다.

“이, 무슨……!”

사일러스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단순히 마력이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탐지기 내부의 핵심 동력원이자 수천 골드를 호가하는 최고급 적색 마력 원석의 붉은 광채가 순식간에 바래지더니, 이내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원석에 내포되어 있던 모든 마력 자원이 벨루아의 마도서 장부로 고스란히 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계산 결산 완료.] [흡수 자원: 4,500 마나.] [수수료 지불 후 잔여 자원으로 기적 ‘역방향 정화 방출’을 실행합니다.]

벨루아가 삼켜버린 붉은 마력은, 마도서 ‘애버리스’의 철저한 세법 필터를 거쳐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금빛 성물 에너지로 세탁되었다.

그리고 그 정화된 에너지가 역으로 사일러스의 기계 장치를 향해 역류했다.

콰아아아앙!

기계 중앙의 유리 구가 터질 듯이 요동치더니, 그 안에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눈부신 금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침실 안의 모든 어둠과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정화되며, 은은한 백합 향기와 온화한 온기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사일러스의 탐지기는 이 터무니없는 정화 기적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기계 끝에 달린 양피지 출력기에서 드르륵 소리가 나며 종이가 화산재처럼 뿜어져 나왔다.

[측정 한계 초과 (OVERFLOW)] [신성 농도: 측정 불가능 (INFINITE)] [요정의 기적 수치: 99,999%]

글자가 빽빽하게 인쇄된 양피지가 침실 바닥에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터엉! 틱, 틱…….

마침내 과부하를 이기지 못한 기계 내부의 구리 톱니바퀴들이 툭툭 끊어지며 연기를 내뿜었고, 장치는 완전히 침묵했다.

완벽한 무력화이자,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격상의 반격이었다. 사일러스의 의기양양했던 고발 시도는 벨루아의 철저한 수치 계산식 손익분기점 앞에서 한 줌의 먼지처럼 분쇄되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방 안에서, 사일러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멈춰 서버린 기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콧등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차가운 외눈 안경이 툭 소리를 내며 옆으로 보기 좋게 비뚤어졌다. 평생을 이성과 수학적 진리만을 신봉해 온 현자의 대가리가 완전히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이…… 이것이 정녕…… 요정의 힘이란 말인가…….”

사일러스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측정 한계를 초과하여 기계를 터뜨려버린 이 압도적인 성물의 빛을 보고도 흑마법이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성 모독이자 황제에 대한 반역이었다.

벨루아는 비뚤어진 안경 너머로 절망과 경악을 동시에 띄운 사일러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감정이 소거된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 속에서, 보이지 않는 황금빛 장부의 숫자들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첫 번째 위협은 완벽하게 제거했다. 하지만 벨루아는 알고 있었다. 이 집요한 학자가 여기서 완전히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바실리우스 대공의 세작망은 더욱 정교하게 자신을 조여올 것이라는 사실을.

과연 벨루아는 이 비뚤어진 현자의 의심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황궁의 장막 속에 자신만의 완벽한 게으름의 낙원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벨루아는 서서히 감정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음 장부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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