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빛을 뿜어내는 고대의 탐지 장치가 발끝을 향해 포복하듯 기어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고. 마도서 ‘애버리스’의 등가교환 법칙에 의거, 기적 인출에 따른 수수료가 즉시 청구됩니다.] [청구 자산: 시전자의 일시적 감정선 전체.] [지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수수료 상환 완료.]

머릿속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서늘한 기계음과 함께, 눈앞이 찌르르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뇌리를 가득 채우던 지독한 긴장감도, 사일러스를 향한 불타는 적개심도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마치 마음속에 자리했던 모든 감정의 안감이 통째로 뜯겨 나간 것처럼, 가슴속에는 오직 텅 빈 정적만이 맴돌았다.

벨루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을 잃은 채, 그대로 중심을 잃고 툭 고꾸라졌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이마를 찧을 것 같던 아기 황녀의 몸을 받아낸 것은, 질겁하며 손을 뻗은 카엘렌의 단단한 품이었다.

“벨리!”

철혈의 황제답지 않게 갈라진 비명이 정원의 고요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카엘렌은 품에 안긴 자그마한 온기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며, 사일러스를 향해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 눈빛은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볼 때보다 훨씬 더 사납고 잔혹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더러운 장난감을 치우지 못할까, 발렌타인! 내 딸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더 닿는 순간, 네 놈의 가문 전체를 반역죄로 다스려 피의 강을 보게 만들 것이다!”

카엘렌이 뿜어내는 서슬 퍼런 살기에 사일러스의 탐지 장치가 덜덜 떨리며 붉은빛을 잃고 꺼져 버렸다. 냉철한 분석가인 사일러스조차 황제의 진심 어린 살의 앞에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요.

그것이 벨루아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하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한 장면이었다.

***

사흘 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하고 은은한 장미 향기였다.

사방이 온통 분홍빛 실크 붕대로 감싸인 듯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벨루아는 푹신하고 포근한 거위 털 침구 속에서 꼬물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몸의 감각은 온전히 돌아와 있었다.

침실 주변을 장식한 레이스 커튼 너머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아 방 안을 몽글몽글한 금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갓 구워내어 고소하고 바삭한 버터 냄새를 풍기는 따끈따끈한 크루아상과, 상큼하고 달콤한 딸기 잼이 담긴 앙증맞은 은식기가 놓여 있었다.

그림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벨루아의 가슴속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아, 이게 바로 그 이자 납입 상태라는 거구나.’

마도서 애버리스가 청구한 수수료의 대가로, 벨루아의 감정 회로는 일시적으로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갑고 기계적인 상태. 머릿속은 오직 차가운 수치와 손익계산서로만 가득 차 있었다.

“벨리! 정신이 드는구나!”

침대 곁에서 밤을 새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초췌한 몰골의 카엘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평소의 흐트러짐 없는 황제의 모습은 간데없고, 턱가에는 푸르스름한 수염거스러미가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다.

그는 시녀들이 가져온 쟁반에서 서둘러 약사발을 건네받았다. 꿀을 듬뿍 타서 달콤하고 진득한 향이 나는 갈색 약탕이었지만, 그 너머로 풍기는 약초의 씁쓸한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자, 어서 이 약을 마시거라. 네 고결한 영혼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 대륙을 뒤져 구해온 귀한 약재들이란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목을 축여줄 터이니, 한 모금만 넘기려무나.”

카엘렌은 숟가락으로 약을 정성스레 식히며 벨루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평소 같았으면 아빠의 과도한 주접에 속으로 혀를 차며 귀여운 아기 연기를 선보였을 벨루아였다. 침을 흘리며 방긋 웃거나, 아빠 품에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을 텐데.

지금의 벨루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얼굴 근육이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유리구슬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벨루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얼음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카엘렌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꿀꺽, 약 한 모금을 아무런 감흥 없이 삼킨 아기 황녀의 입술은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카엘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딸의 그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빛이, 마치 세속의 모든 번뇌를 초월한 신성한 존재의 준엄한 심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벨리…… 화가 난 것이냐? 이 어리석은 아비가 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감히 발렌타인의 사냥개들이 네 몸에 손을 대려 한 것에 분노하는 게로구나.”

카엘렌의 목소리에 깊은 초조함과 안달복달하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벨루아의 침묵과 감정 없는 눈빛은, 그에게 있어서 세상 그 어떤 질책보다도 무겁게 다가왔다.

“내 당장 그 건방진 사일러스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네 앞에 무릎 꿇리겠다! 감히 요정의 안식을 방해한 죄를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마!”

방 안의 시녀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의 폭발적인 분노가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눈치였다.

벨루아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아빠. 난 그냥 감정 수수료를 내서 얼굴이 안 움직이는 것뿐인데.’

하지만 이 서늘한 무표정이 카엘렌에게 예상치 못한 신비감과 경외감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벨루아의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굳이 오해를 풀어서 손해를 볼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수호 요정이라는 신성한 지위를 더욱 굳건히 다질 기회였다.

벨루아는 일부러 고개를 나른하게 옆으로 돌리며, 창밖의 하얀 구름을 무심히 응시했다. 마치 세속의 하찮은 소동 따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는 듯한 초연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카엘렌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오, 신성한 기적을 부리느라 영혼의 일부를 천상에 두고 온 것이 틀림없구나……. 내 기필코 네 정원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로 만들어 주마. 누구도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카엘렌은 시녀들에게 엄명을 내린 뒤, 정무를 처리하고 사일러스를 압박하기 위해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그의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 멀리 사라질 때까지, 방 안에는 팽팽한 정적이 감돌았다.

***

카엘렌이 떠나고 시녀들이 방 정리를 위해 물러가자, 침실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벨루아의 전속 시녀이자, 바실리우스 대공의 세작인 메리였다.

메리는 구석에 서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어깨는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품속 깊은 곳에는 대공과 비밀리에 신호를 주고받는 마법 통신기기가 숨겨져 있었다. 벨루아는 메리의 옷자락 틈새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푸른 마력 반응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저 통신기로 대공에게 내 상태를 시시각각 보고하고 있었겠지.’

벨루아는 침대 위에서 부드러운 하얀 실크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걸음걸이였지만, 메리의 눈에는 그 걸음 하나하나가 거대한 포식자의 지배력처럼 다가왔다.

스윽.

벨루아가 조용히 손을 뻗자, 그녀의 눈앞에 투명한 황금빛 장부가 반공중에 떠올랐다. 오직 벨루아의 눈에만 보이는 마도서 애버리스의 회계 장부였다.

[보유 잔여 마력: 1500.] [계약 대상: 메리 (대공가의 세작).] [청구 내역: 영혼의 채권 사슬 낙인 발동.] [지출 수치: 마력 300 상환.]

벨루아의 작은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황금빛 사슬이 흘러나와 메리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흐윽……!”

메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목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지지며, 살갗 안쪽으로 기괴한 문자 형상의 낙인을 새겨 넣고 있었다. 그것은 대공의 그 어떤 마법으로도 해제할 수 없는, 영혼에 직접 귀속되는 절대적인 채권 사슬이었다.

벨루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메리를 내려다보았다. 감정 수수료 지불로 인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아기 같은 웅얼거림이 아닌,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이성적인 어조로 울려 퍼졌다.

“메리. 네 가문이 대공에게 진 빚이 정확히 3천 골드였던가?”

메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가 정말로 세 살배기 아기 황녀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목덜미를 죄어오는 숨 막히는 고통과, 영혼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 어떤 의문도 사치였다.

“하, 황녀 전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대공은 네 가족을 인질로 잡고 가짜 구명금을 미끼로 너를 이곳에 밀어 넣었지. 네가 쓸모없어지는 순간, 네 가족은 물론이고 너 역시 가장 먼저 버려질 쓰레기에 불과해.”

벨루아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수치와 계산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잔혹했다.

“대공의 통제력이 무서울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네 영혼을 통째로 압수할 내 계약 사슬이 더 무서울까? 계산해 봐, 메리. 어느 쪽이 네 생존율을 더 높여줄지.”

벨루아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작은 보석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카엘렌이 선물한 눈부신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고액의 황금 채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벨루아는 그중에서 정확히 3천 골드에 해당하는 가치의 금빛 채권 한 장을 꺼내 메리의 코앞에 툭 던졌다.

바스락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메리의 눈동자에 비쳤다.

“이걸로 네 목숨값과 네 가족의 구명금을 대신 지불해 주지. 내 밑에서 스파이 노릇을 확실히 한다면, 이 돈은 온전히 네 것이 될 거야. 하지만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대공에게 내 진짜 정보를 흘린다면…….”

벨루아는 메리의 목덜미에 새겨진 낙인을 가리켰다.

“그 즉시 네 영혼은 연체 이자로 환수되어 영원히 사라질 거야. 영혼이 마모되어 빈 껍데기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내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메리는 바닥에 머리를 거세게 찧으며 오열했다. 대공의 비열한 기만책 따위는 벨루아가 보여준 압도적인 세법 계약과 초현실적인 공포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제 대공이 아니라, 눈앞의 이 기괴하고도 신성한 아기 요정에게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이 쥐어져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충,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 목숨과 영혼을 모두 전하께 바치겠사옵니다! 대공에게는 전하께서 여전히 요정의 힘을 잃고 누워 계신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메리가 바들바들 떨며 황금 채권을 품에 안고 굴복했다.

대공의 교활한 기만책인 메리가 역으로 벨루아의 철저한 수치 계산식 손익분기점 앞에 완벽히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완벽한 이중 스파이가 탄생하는 통쾌한 결실이었다.

벨루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여전히 마모된 감정 탓에 입꼬리는 미미하게만 떨릴 뿐이었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승리감만큼은 확실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로즈 가든의 삼엄한 정문 너머에서 대지를 흔드는 둔탁하고 거대한 마찰음이 침실 안까지 울려 퍼졌다.

벨루아의 고요하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정원 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와 기사들의 격앙된 외침. 그리고 그 소음들 사이로, 은색 철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임 궁정 조사단장으로 임명된 사일러스 발렌타인이었다.

그는 붉은빛을 뿜어내는 거대하고 기괴한 마력 수작 도구를 수레에 실은 채, 금빛 갈기 기사단의 제지를 뚫고 로즈 가든의 정문으로 거침없이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비키시오! 황녀 전하의 신성 모독 여부와 진짜 마력 파장을 조사하라는 황제 폐하의 밀지가 내려졌소!”

사일러스의 차가운 안경알 뒤로 탐욕스러운 분석가의 눈빛이 번뜩였다.

과연 벨루아는 정원 한복판까지 들이닥친 이 끈질긴 분석가의 칼날 같은 검증을 피해, 자신의 낙원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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