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엘렌의 황금빛 눈동자에 서늘한 독기가 걷히며 이상한 경외감이 어리기 시작했답니다.
방금 전까지 피비린내 나는 살기를 뿜어내던 제국의 폭군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거친 숨결이 아주 조심스럽게 가라앉았지요. 찬바람이 쌩쌩 불던 방 안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풀어 오르고, 바닥에 하얗게 흩뿌려져 있던 비소 가루가 눈부신 금빛 모래로 변해 반짝이는 광경은 그 자체로 거룩한 이적이었어요.
카엘렌은 굳어버린 손가락을 천천히 뻗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금빛 모래 한 줌을 가만히 받아내었답니다. 손바닥에 닿은 모래알들은 까슬까슬하기는커녕,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따스한 온기를 품고 사르르 녹아내렸지요.
“이것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답니다.
황제의 머릿속에는 아우렐리아 제국의 오래된 전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제국이 건국될 당시,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초대 황제의 검을 정화하고 대지에 축복을 내렸다는 고대 요정의 보살핌. 황실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화이자, 지금껏 그 누구도 실제로 목격하지 못해 그저 허구로만 치부되던 그 경이로운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었지요.
카엘렌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벨루아에게 닿았답니다.
그의 시선 끝에 걸린 벨루아는 너무나도 고요했지요. 보통의 아기라면 무시무시한 폭압에 겁을 먹고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벨루아는 그저 맑고 깨끗한 은빛 눈동자로 아버지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어요.
사실 벨루아의 머릿속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답니다.
‘아, 머리 아파. 영혼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아.’
등가교환의 제법 마도서 ‘애버리스’를 사용해 기적을 인출한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지요. 방금 일으킨 거대한 정화 마법의 수수료로 벨루아의 내면에 고여 있던 온갖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일시적으로 저당 잡히고 만 상태였답니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마저도 하얀 눈밭 아래 묻힌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영혼의 안감이 얇게 마모되어 나간 자리에는 오직 기계적인 냉정함과 생존을 위한 철저한 계산기만이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지요.
벨루아는 제 뺨을 만지는 카엘렌의 커다란 손길을 느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답니다. 이 지독한 무표정과 고요함은 역설적이게도 카엘렌에게 깊은 확신을 심어주고 말았어요.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존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이 이 작은 몸 안에 깃들어 있구나.’
카엘렌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광적인 집착의 불꽃이 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답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내 피를 이어받은 나약한 후계자가 아니었어요. 제국을 지배하는 황실의 권위를 절대적인 반석 위에 올려놓을, 고대 신화의 진실한 수호 요정이었지요.
“벨루아.”
카엘렌이 아주 낮고 깊은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답니다. 그의 손가락이 벨루아의 보드라운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요.
“너는 내게 찾아온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자산이다. 그 누구도 너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며, 너의 털끝 하나조차 이 아비의 허락 없이는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리라.”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감격으로 젖어 드는 대신, 더욱 차갑고 정교하게 빛나기 시작했답니다. 쓸모가 검증된 소중한 보물을 완벽한 통제 아래 두고 지키겠다는 지독한 독점욕이었지요.
벨루아는 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어요.
‘나를 가두고 제국의 상징으로 써먹으시겠다? 안전한 건 좋지만 숨 막히는 감옥은 사양이야. 내가 원하는 건 일하지 않고, 위협받지 않으며, 평생을 게으르고 안락하게 누릴 완벽한 평화라고.’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기 위해 벨루아는 얼어붙은 이성 속에서 겨우 한 줌의 감정을 쥐어짜 내어 아기다운 연기를 시작했답니다. 아무리 차갑게 식은 영혼이라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솜씨 좋은 광대가 되어야 마땅했으니까요.
벨루아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이며, 꼬물거리는 손가락으로 카엘렌의 소맷자락을 꾹 붙잡았답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칭얼거렸지요.
“웅…… 아빠아. 벨루, 요기…… 요기 장미 꼬까방에 꽁꽁 숨을래요.”
아직 혀가 짧아 웅얼거리는 영유아의 발음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사는 명확했답니다.
“나쁜 바람…… 시려요. 벨루, 꼬까방 밖으로 안 나갈래. 무서운 사람들이 벨루 쳐다보는 거 시러요. 아빠가 다 막아조요.”
자신을 안락한 장미 정원(로즈 가든)에 완벽하게 격리해 달라는, 철저하게 계산된 거래의 요구였답니다. 밖으로 나가 정쟁에 휩싸이거나 요정의 이적을 증명하느라 피곤해지는 대신, 이 화려한 정원 안에서 평생을 놀고먹겠다는 벨루아만의 은밀한 계약서였지요.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카엘렌의 필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답니다.
‘아이가 외부의 부정한 기운과 정적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극도로 꺼리고 있구나. 신성한 요정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정원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카엘렌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며,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었답니다.
“그래, 나의 작은 요정님. 네 뜻대로 하마. 이 정원을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만들어 주지.”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단을 향해 우렁차게 호령했답니다.
“지금 즉시 전령을 보내라! 제국 최정예인 ‘금빛 갈기 기사단’의 제1, 제2대대를 이곳 로즈 가든의 외곽 경계에 전면 배치한다. 황제의 직속 명령 없이는 그 어떤 고위 귀족도, 심지어 대공 가문의 그 누구라 할지라도 이 정원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고 한 걸음이라도 들여놓는 자가 있다면, 그 목을 즉시 베어 정원 앞마당에 걸어라!”
문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의 숨소리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답니다. 제국 최고의 무력 집단이자 황실의 상징인 금빛 갈기 기사단을, 고작 첫 돌을 겨우 지난 아기 황녀의 정원 경비로 통째로 투입하겠다는 황당하고도 무시무시한 명령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폭군 황제의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답니다. 오직 자신의 소중한 요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제국의 국방력을 스스럼없이 사유화하는 과보호의 극치였어요.
벨루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답니다.
‘좋아, 아주 완벽해. 이제 귀찮은 놈들이 나한테 접근할 일은 눈곱만큼도 없겠네.’
황제의 무시무시한 명령 덕분에 로즈 가든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사치스러운 요새로 거듭나게 되었답니다. 피비린내 나는 철혈 황제가 칭얼대는 딸의 한 마디에 제국 최고 기사단을 정원 외곽에 전면 배치하는 이 통쾌한 광경은, 벨루아가 바란 완벽한 평화의 첫 단추였지요.
카엘렌이 기사들에게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잠시 방을 비운 사이, 벨루아는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답니다.
아직 아기라 마음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았지만, 벨루아의 예리한 감각은 방 안의 기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지요. 구석진 곳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시녀, 메리가 눈에 들어왔답니다.
메리는 바실리우스 대공 가문에서 보낸 세작이었어요. 방금 전 벨루아가 독살 위기를 모면하고 기적을 부리는 장면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인물이기도 했지요. 메리의 밀가루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공포와 경외심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답니다.
벨루아는 아장아장 걷는 시늉을 하며 메리의 처소로 통하는 쪽문 쪽으로 다가갔답니다.
“메리이…… 벨루, 졸려요.”
벨루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메리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답니다. 메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지요.
“황, 황녀 전하! 소인이 어찌 전하를 모셔야 할지…….”
“벨루, 꼬까방 됴아. 메리 방도 볼래.”
벨루아는 메리를 앞장세워 그녀의 작은 침소로 들어갔답니다. 겉보기에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시녀의 방이었지만, 벨루아의 예리한 시선은 곧바로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로 향했지요.
그 상자 틈새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붉은빛의 마력 반응.
전생의 배신으로 단련된 벨루아의 불신증과 철저한 손익 계산 능력이 경보를 울렸답니다.
‘저건 평범한 물건이 아니야. 바실리우스 대공 놈과 몰래 연락하는 통신기기군.’
벨루아는 메리가 물을 떠 오기 위해 잠시 뒤를 돈 찰나를 놓치지 않았답니다. 꼬물거리는 작은 손을 뻗어 침대 틈새에 숨겨져 있던 붉은 마법 석판을 잽싸게 낚아챘지요.
**새빨갛고, 표면이 거칠거칠하며, 은은하게 매캐한 유황 냄새가 풍기는 마법 석판**은 대공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답니다. 벨루아는 이 위험한 장치를 자신의 넓은 실크 잠옷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고, 마도서 애버리스의 장부에 기입해 조용히 봉인해 버렸어요.
마도서의 힘으로 철저히 밀봉된 석판은 이제 대공 가문에서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붉은 빛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먹통이 되었답니다. 메리가 황실의 정보를 빼돌릴 유일한 수단이 벨루아의 조그만 손아귀에 완벽하게 압수된 것이지요.
메리가 따뜻하고 달콤하며 보들보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유 한 컵을 들고 돌아왔을 때, 벨루아는 이미 침대 위에 천사처럼 누워 쌔근쌔근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답니다. 메리는 자신의 보물 같은 통신 석판이 사라진 줄도 모른 채, 그저 요정 황녀의 신비로운 잠든 얼굴을 보며 경외감에 찬 한숨을 내쉴 뿐이었어요.
얼마 후, 방으로 다시 들어온 카엘렌은 침대에 누워 있는 벨루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답니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국의 공식 조서 서판이 들려 있었지요.
창밖으로는 로즈 가든의 붉은 장미들이 달빛을 받아 더욱 붉고 화려하게 흐드러져 있었답니다. 카엘렌은 그 장미들을 바라보며, 아주 차갑고도 거대한 결심을 굳혔지요.
“내일 아침, 제국 전역에 선포하리라.”
카엘렌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려 퍼졌답니다.
“아우렐리아의 축복이자, 제국을 수호할 유일한 요정 황녀가 강림하셨음을.”
벨루아를 공식적인 요정 황녀로 선언하고, 그녀를 노리는 모든 적대 세력들을 반역자로 규정해 피의 숙청을 시작하겠다는 폭군의 선언이었지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던 벨루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답니다.
‘어라……? 일이 생각보다 너무 커지는데……?’
완벽하게 게으르고 안전한 삶을 원했던 벨루아의 계획이, 폭군 아빠의 겉잡을 수 없는 집착과 주접으로 인해 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