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깊은 어둠이 장막의 요새 ‘로즈 가든’을 무겁게 내려누르고 있었을 때였답니다.
사방이 숨죽인 고요 속에서, 벨루아는 폭신하고 부드러우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도는 실크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누워 있었지요. 아장아장 걷는 무해한 아기인 척 하루를 보낸 탓에 몹시 피곤할 법도 했지만, 벨루아의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끼이익.
소리도 없이, 굳게 닫혀 있던 벨루아의 방문이 아주 느리게 미끄러지듯 열렸답니다.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주황색 촛불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시리도록 차갑고 푸르스름한 달빛과, 그보다 더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한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였지요.
벨루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답니다.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제국의 폭군 황제이자, 벨루아의 아빠인 카엘렌 아우렐리아였어요. 그의 뒤편으로 칠흑처럼 어두운 갑옷을 입은 ‘금빛 갈기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이 소리 없이 긴 복도에 도열하는 모습이 언뜻 비쳤답니다.
카엘렌은 천천히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왔어요. 그의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침대 커튼을 젖혔지요.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금빛 눈동자가 아기 침대 속의 벨루아를 정면으로 내리눌렀답니다. 그 눈빛은 낮에 보여주었던 과장된 다정함이나 주접스러운 온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어요. 차디찬 강철 검날처럼 예리하고,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집요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벨루아는 그 살벌한 시선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지만, 겉으로는 그저 깜빡이며 동그란 눈으로 아빠를 올려다보았답니다.
그것은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부녀간의 첫 번째 서늘한 눈맞춤이었어요.
카엘렌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답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마력의 압박감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어요.
“벨루아.”
낮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요.
“너는 참으로 기묘한 아이다.”
카엘렌의 손가락이 벨루아의 뺨 스치듯 다가왔어요. 하지만 그 손끝에는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황금빛 검기가 은은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답니다. 일국의 황제이자 대마법사인 그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기적’을 그대로 믿을 리가 없었지요. 그는 지금 은밀하게 벨루아의 영혼과 마력의 흐름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벨루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답니다.
바로 그때, 벨루아의 시야 앞에 가늘고 투명한 금빛 페이지가 다시 한번 바스락거리며 펼쳐졌어요. 등가교환의 마도서 ‘애버리스’의 장부였지요.
[※ 경고: 시전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고밀도의 마력 압박이 감지되었습니다.] [※ 청구서 발행: 현재 시전자의 감정 동결 상태(이자 납입)가 유지 중입니다. 슬픔과 두려움의 감정이 차단되어, 시전자는 극도의 냉정함을 유지합니다.]
마도서의 경고대로, 벨루아는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감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답니다. 슬픔도, 공포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기계가 된 것만 같았어요. 전생의 배신으로 굳어진 불신증과 마도서의 감정 동결 이자가 맞물려, 벨루아는 오직 머릿속으로 차갑고 정밀한 손익계산서만을 두드리기 시작했지요.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아빠.’
벨루아는 속으로 비웃었답니다.
아무리 대단한 폭군 황제라도, 마도서 애버리스가 계산하는 등가교환의 법칙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자산’에 불과했으니까요. 벨루아는 통통하고 하얀 아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방 안의 가치 있는 것들을 훑어보았답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은색 촛대, 벽면에 걸린 화려한 보석 액자, 그리고 낮에 카엘렌이 하사했던 주머니 속의 반짝이는 순은화들.
‘전부 장부에 등록해.’
벨루아의 마음속 외침과 함께, 마도서의 장부 위에 잉크 글씨가 빠르게 적혀 내려갔어요.
[보유 자산 등록 완료: 순은화 10잎, 은제 촛대 1기, 사파이어 장식 액자 1점.] [총 가치 환산: 마력 지수 450 포인트.] [기적 인출 대기 중: 물리적 마력 상쇄 및 속성 변환.]
카엘렌의 손끝이 벨루아의 부드러운 뺨에 닿기 직전이었답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검기가 아기의 여린 피부를 찢어발길 듯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어요. 기사단장조차 단숨에 베어낼 수 있는 치명적인 힘이었지요.
하지만 벨루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답니다.
‘지출해.’
벨루아가 속으로 가볍게 명령하는 순간,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은제 촛대의 표면이 노을빛처럼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소리도 없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어요. 은화 주머니에서도 반짝이는 기운이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검게 변색되었지요.
그리고 그 대가로 인출된 ‘기적’이 벨루아의 온몸을 감쌌답니다.
쉬이이익.
카엘렌의 사나운 검기가 벨루아의 뺨에 닿는 순간, 그것은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향긋한 봄바람으로 변해 버렸어요.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따스하고 달콤한 미풍이 방 안을 부드럽게 한 바퀴 휘감았지요. 벨루아의 보드라운 우윳빛 아기 잠옷 자락이 미풍에 가볍게 흔들렸답니다.
카엘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어요.
그는 자신의 검기가 이토록 완벽하게, 그것도 일말의 마력 충돌 흔적조차 없이 전혀 다른 성질의 온기로 ‘변환’되어 소멸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마법의 공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힘. 그것은 인간의 마법이 아니라, 오직 신화 속 요정들만이 부릴 수 있다는 기적의 영역이었지요.
“이것이…… 너의 힘인가?”
카엘렌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서늘한 긴장감이 서렸답니다.
그는 벨루아를 내려다보았어요. 아기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늘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쉬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아기의 얼굴에는 공포도, 원망도 없었어요. 그저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고 신비로운 무표정만이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벨루아의 계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이 정도로는 부족해. 완벽하게 굴복시키고, 내 안전을 영원히 보장받아야 해.’
벨루아는 침대 모퉁이, 낮에 시녀가 떨어뜨리고 간 아주 미세한 가루의 흔적을 포착했답니다. 그것은 시녀가 자신을 독살하려 할 때 썼던 치명적인 비소 독가루의 잔해였어요. 비록 시녀는 끌려갔지만, 방구석에는 여전히 은밀하고 비열한 배신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카엘렌 역시 그 독가루의 냄새를 맡았는지, 그의 잘생긴 미간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답니다. 가문 내부의 배신자가 남긴 흔적은 폭군 황제에게 있어 가장 불쾌한 오점이었으니까요.
벨루아는 마도서의 장부를 다시 넓게 펼쳤어요.
‘저 독가루와, 내 품에 있는 아티팩트의 마력을 등가교환하겠어.’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황제가 하사한 특제 정화 아티팩트가 조용히 공명하기 시작했답니다. 벨루아는 아티팩트의 영구적인 마력 수치를 과감하게 깎아내려 장부에 적어 넣었어요.
[자산 소모: 정화 아티팩트 마력 50% 지출.] [대상 변환: 치명적 유독 물질(비소).] [기적 결과: 금빛 모래로의 성질 환원.]
파지직!
방구석 어두운 틈새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독가루의 흔적이,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답니다.
카엘렌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곳으로 향했어요.
그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지요. 벨루아가 작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독 가루들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중에서 아주 천천히 용해되며, 반짝이고 서정적인 금빛 모래알로 변해 흘러내렸어요.
스르륵, 사각.
금빛 모래들은 마치 요정의 가루처럼 방 안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카엘렌의 발치 위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답니다.
죽음을 부르는 가장 비열한 독이, 세상을 정화하는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금빛 기적으로 바뀐 순간이었어요.
카엘렌은 굳어 버렸답니다.
제국 최강의 무인이자 잔혹한 학살자로 이름을 떨치던 그였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이 초월적인 성질 변환의 기적 앞에서는 그 어떤 의심도 제기할 수 없었지요. 이것은 마법적인 눈속임이 아니었어요. 그의 예리한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답니다. 이 아기는 진짜다. 제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아우렐리아 가문을 수호하기 위해 강림한 성스러운 요정의 화신이 분명하다고 말이어요.
기사단이 대동된 살벌한 심문의 현장은, 순식간에 요정의 기적을 찬미하는 성스러운 신전처럼 변해 버렸답니다.
벨루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봤지? 아빠. 나는 건드릴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까 평생 나를 건드리지 말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먹여 살려야 할 거야.’
감정이 동결된 차가운 이성 속에서, 벨루아는 완벽한 승리의 방정식을 완성하고 있었답니다.
카엘렌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서늘한 살기와 의심의 독기가 완전히 걷혀 가기 시작했어요. 그 대신,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상한 경외감과, 그보다 더 거대하고 일그러진 광적인 소유욕이 소리 없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답니다.
그것은 이 기적의 요정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손아귀에 쥐고 완벽하게 통제하며 과보호하겠다는 폭군의 집착이었어요.
카엘렌은 천천히 무릎을 꿇어 벨루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답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열렸지요.
“나의 작고 거룩한 요정님.”
카엘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대지를 뒤흔들 만큼 묵직했답니다.
“너의 이 고귀한 이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아우렐리아의 피에 흐르는 잔혹한 저주마저 이토록 아름답게 어루만지는구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벨루아가 입고 있는 **우윳빛의 보들보들하고, 새하야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솔솔 풍기는 실크 잠옷**의 깃을 정돈해 주었답니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조심스러웠지만, 벨루아는 그 너머에 도사린 무시무시한 통제욕을 똑똑히 읽어낼 수 있었어요.
카엘렌의 눈동자는 감격으로 젖어 드는 대신, 더욱 차갑고 정교하게 빛나기 시작했지요.
‘이 아이는 단순한 핏줄이 아니다. 제국의 건국 신화를 증명하고, 황권을 반석 위에 올릴 유일무이한 신성(神性)이다.’
폭군 황제의 머릿속 계산기는 벨루아의 마도서 못지않게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이 기적을 대공 가문을 비롯한 정적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의 입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황실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드높일 수 있을 터였지요.
“내 너를 위해 이 정원을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사치스러운 낙원으로 만들 것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스치는 바람조차 너의 허락 없이는 이곳에 들지 못하리라.”
카엘렌이 나직하게 선언하자, 그의 발끝에서부터 붉은 장미 덩굴 모양의 화려한 마법 표식이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답니다. 그것은 장막의 요새 ‘로즈 가든’의 방어 결계를 최고 단계로 끌어올리는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이었어요.
이제 벨루아는 이 방에서 황제의 허락 없이는 깃털 하나조차 밖으로 내보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완벽한 안전이 보장된 낙원이자,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감옥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답니다.
벨루아는 속으로 혀를 찼어요.
‘안전을 원하긴 했지만, 이렇게 숨 막히는 과보호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마도서 애버리스의 ‘감정 동결’ 이자가 치러지고 있는 덕분에, 벨루아의 가슴은 여전히 한겨울의 호수처럼 잔잔했답니다. 두려움도, 짜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