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핏빛 장미 화환이 벨루아의 코앞까지 다가왔어요. 지독하고 매캐한, 비릿한 철분 냄새가 섞인 독기가 공기를 타고 사납게 흘러들었지요. 대공의 비열한 눈빛이 번들거렸답니다.
“어디, 진정한 요정의 격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시지요, 황녀 전하.”
대공의 걸음은 이미 카엘렌 황제의 바로 앞까지 이르고 있었어요. 붉은 가시넝쿨이 밤하늘의 뱀처럼 벨루아의 이마를 노리며 서서히 내려왔답니다.
연회장의 공기는 마치 단단한 얼음판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었어요. 귀족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황제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 황녀를 바라보았지요.
카엘렌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흉포하게 일렁였답니다.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이 허리춤에 찬 검자루를 꽉 움켜쥐었어요. 당장이라도 대공의 목을 베어버릴 듯한 살기가 황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지요.
하지만 제국의 고대 법률과 요정 협약은 엄격했어요. 요정의 힘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황녀가 진짜 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 테니까요. 카엘렌은 어금니를 악물며 벨루아를 품에 더 단단히 안아줄 뿐이었답니다.
벨루아는 아장아장 걷는 무해한 아기의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는 아주 바쁘게 주판알을 굴리기 시작했어요.
‘바실리우스 대공, 이 늙은 여우가 드디어 미쳐서 날뛰는구나.’
대공이 이토록 당당하게 독 장미를 들이밀 수 있는 이유를, 벨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답니다.
며칠 전, 벨루아는 이중 스파이로 포섭한 시녀 메리를 시켜 대공에게 비밀스러운 마법 통신구 신호를 보내도록 지시했었어요. 황녀가 최근 일어난 기적들로 인해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쇠약해진 상태라는 가짜 정보였지요.
대공은 그 배후 통교 신호를 철석같이 믿고, 오늘 밤 확실하게 벨루아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제국에서 가장 치명적이라는 사독(蛇毒)을 품은 ‘핏빛 장미의 영혼’을 가져온 것이 분명했어요.
벨루아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답니다.
‘멍청하긴. 스스로 덫에 걸어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리 덫을 놓았다 한들, 코앞까지 다가온 저 독기는 진짜였어요.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녹아내릴 듯한 끈적하고 검붉은 안개가 벨루아의 뺨을 향해 뻗어왔지요.
벨루아는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아기용 장부 가방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어요. 가방 안쪽 깊은 곳에는 일전에 마법학자 사일러스가 남겨두었던 붉은빛의 마력 이상 감지 마도구 부품이 들어 있었답니다.
사일러스는 벨루아의 기적이 사기극이라 의심하며 마력을 탐지하려 했었지만, 벨루아는 도리어 그 정밀한 기계 부품을 슬쩍 빼돌려 귀중한 마력 자원으로 보관해 두고 있었지요. 붉게 점멸하는 정교한 태엽과 마력 유도선이 얽힌 부품은, 그 자체로 고순도의 정제된 마력을 가득 머금고 있는 훌륭한 계산 자원이었어요.
‘지금이야. 애버리스, 정산해.’
벨루아의 마음에 응하듯, 뇌리 속에서 낡고 묵직한 마도서 ‘애버리스’의 장부가 펼쳐졌답니다. 짤랑거리는 차가운 금화 소리가 귓가를 스쳤어요.
[보유 자원: 사일러스의 이상 마력 감지 부품 (가치 등급: 상) / 대공의 사독(蛇毒) 에너지 질량] [요청 기적: 비화성(非火性) 불꽃 실드 전개 및 독소의 유기물 영양 전환] [계산 완료. 수수료를 청구합니다.]
머릿속에서 냉혹한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벨루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따스하게 피어오르던 안도감과 통쾌함 같은 인간적인 감정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어요.
기적이 커질수록 영혼의 안감을 이자로 저당 잡는 마도서의 대가였지요. 기쁨도, 비웃음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진 벨루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가라앉았답니다.
감정을 잃어버린 벨루아의 얼굴은,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신비로운 무아(無我)의 상태로 변해 버렸어요.
웅성거리던 귀족들은 벨루아의 그 기묘한 표정 변화를 보고 단숨에 압도당해 침묵했답니다. 그것은 마치 속세의 미추와 생사를 초월한 고귀한 신적 존재가 강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으니까요.
“아아…….”
카엘렌 황제는 딸의 차가운 무표정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성스러움에 숨을 들이켰어요. 그의 의심 많은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지요.
‘이것이 진정한 요정의 모습인가. 감정조차 허락되지 않는, 오직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고결한 성물……!’
바로 그 순간, 대공의 가시 장미 화환이 벨루아의 머리에 닿으려던 찰나였답니다.
화아악!
벨루아의 전신에서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부시게 푸르고 투명한 불꽃이 실드처럼 둥글게 피어올랐어요.
어스름한 연회장을 환하게 밝히는 푸른 불꽃은 타오르되 그 어떤 것도 태우지 않았지요. 오히려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대공의 핏빛 장미를 감싸 안았답니다.
“이, 이 무슨……!”
대공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뒤로 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어요.
푸른 불꽃이 붉은 가시넝쿨에 닿는 순간, 끈적하고 비릿한 독기들이 눈 녹듯 사라지며 장부에 기입된 대로 ‘유기물 영양’으로 완벽하게 치환되기 시작했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붉고 흉측하던 가시들이 둥글고 부드러운 초록색 잎사귀로 변해갔어요. 그리고 핏빛 장미들은 순식간에 뽀얀 우유 향이 감도는, 물방울을 머금은 싱그러운 백장미로 만개하였지요.
연회장 가득히 퍼져 나가던 지독한 독가루 대신, 입안을 달콤하게 적시는 부드러운 우유와 싱그러운 풀꽃 향기가 귀족들의 코끝을 간지럽혔답니다.
“말도 안 돼…… 제국의 사독이, 어떻게 단숨에 정화된단 말인가!”
사일러스는 안경을 치켜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자신이 들고 있던 마력 측정기의 수치가 완벽하게 무해한 ‘영양 수치’로 변환된 것을 보고 턱을 벌렸어요. 벨루아의 품 안에서 빛을 잃고 바스러진 자신의 마도구 잔해를 보며, 그는 벨루아가 행한 기적의 메커니즘에 경탄을 금치 못했지요.
대공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더 이상 살인 병기가 아니었답니다. 그저 갓 피어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백장미 화환일 뿐이었어요.
벨루아는 감정이 마모되어 차갑게 식은 눈으로 대공을 가만히 응시했답니다. 아무런 분노도, 원망도 담기지 않은 그 무감각한 시선이, 오히려 대공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공포로 다가왔지요.
대공은 비틀거리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어요.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답니다.
“이, 이것은…… 기적이다. 성물의 축복이야!”
연회장 구석에 서 있던 대공 지지 파벌인 브론테 후작 가문의 귀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어요.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지요.
“대공이 준비한 제국령 최악의 사독이…… 단숨에 우유 향 백장미로 바뀌었어!”
“요정 황녀 전하다! 진짜 요정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거야!”
귀족들이 단체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일어서는 소리가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답니다. 대공의 편에 서서 황제를 몰아내려던 음모론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어요.
카엘렌 황제는 백장미로 변한 화환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대공을 매섭게 쏘아보았답니다.
“바실리우스 대공. 요정의 격은 충분히 증명된 것 같군. 이제, 그대가 준비한 이 ‘선물’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황제의 낮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벨루아는 속으로 조용히 장부를 덮었답니다. 대공의 파멸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바실리우스 대공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사정없이 흔들렸답니다. 그의 잘 가꿔진 콧수염 위로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툭, 떨어졌지요. 대공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제의 서슬 퍼런 기세를 받아내며, 다급하게 연회장 한구석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어요.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구석진 기둥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시녀 메리가 서 있었답니다.
“폐, 폐하! 속으시면 안 되옵니다! 저 아기는 요정이 아니라, 제국을 기만하는 사악한 마녀이거나 괴물임이 틀림없사옵니다!”
대공이 쉰 목소리로 절규하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거칠게 꺼내 들었어요. 그것은 흑철로 정교하게 세공된, 붉은 보석이 박힌 마법 통신기기였지요.
“여기 증거가 있나이다! 황궁 내부에서 저를 위해 일하던 시녀가 보낸 밀고서이옵니다! 황녀가 최근 일어난 기적들로 인해 마력을 모조리 소모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고, 저 비천한 시녀 메리가 똑똑히 보고하였나이다!”
대공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백 장이 넘는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메리에게 쏠렸어요.
메리는 갑작스러운 주목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채, 무릎을 꿇고 사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답니다. 그녀의 얇은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렸지요.
귀족들은 대공의 폭로에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황녀의 정화 기적을 보고 감탄하던 마음에 다시금 의구심의 불씨가 지펴지는 순간이었어요.
하지만 카엘렌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벨루아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마도서 ‘애버리스’의 대가로 감정을 저당 잡힌 벨루아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얼음 호수처럼 빛날 뿐이었어요. 슬픔도, 두려움도, 심지어 대공을 향한 비웃음조차 깨끗이 지워진 그 무결한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고 신비로웠지요.
카엘렌 황제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딸의 비정상적인 고요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답니다.
아기의 작은 손가락은 평소처럼 아빠의 옷자락을 꼭 쥐지도 않은 채, 힘없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어요. 뺨은 평소의 발그레한 핏기를 잃고 새하얀 대리석처럼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지요.
황제의 이성이 차갑게 분노로 끓어올랐어요.
‘벨루아가…… 제국을 수호하는 신성한 힘을 무리하게 사용하느라,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고 있구나.’
황제의 착각은 깊고도 단단했답니다. 딸이 자신과 제국을 지키기 위해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요정의 대가’를 치르며 무감각한 성물의 상태로 변해버렸다고 확신한 것이지요. 황제의 금빛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대공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졌어요.
“바실리우스. 감히 내 딸이 제국의 평화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리는 동안, 네놈은 가짜 정보를 운운하며 이간질을 시도하는군.”
“폐, 폐하! 진짜이옵니다! 저 시녀를 심문해 보십시오! 저 통신기기에 남은 마법 신호가 대공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사일러스 경이 확인하면 알 것 아닙니다!”
대공이 악에 받쳐 소리쳤어요.
사일러스는 황제의 묵직한 시선이 닿자, 말없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메리의 앞으로 걸어갔답니다. 그의 손끝이 메리가 떨어뜨린 붉은 통신기기를 향해 뻗어 나갔지요.
바로 그때였어요.
바닥에 엎드려 울먹이던 메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옷자락 속에 숨겨두었던 또 다른 푸른빛 마법 통신기기를 바닥에 세차게 내던졌답니다.
쨍그랑!
맑은 파편 소리와 함께, 푸른 통신기기에서 은은한 마력의 장막이 허공에 펼쳐졌어요. 그리고 그 장막 위로,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굵직하고 탐욕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답니다.
[—메리, 황녀의 상태는 어떠하냐? 쇠약해진 틈을 타 내일 연회에서 ‘핏빛 장미의 영혼’으로 숨통을 끊어놓을 터이니, 네놈은 황녀의 침소 주변 경비를 교란해 두어라. 성공하면 네 가족의 목숨은 살려주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바실리우스 대공의 목소리였어요.
“아……!”
대공의 입이 턱 벌어졌답니다.
메리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어요.
“황제 폐하! 대공 전하께서 제 부모님과 동생들을 인질로 잡고, 황녀 전하를 독살하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리셨나이다! 차마 요정 황녀 전하를 해칠 수 없어 가짜 정보를 보내 대공을 유인하였사오니, 제발 제 가족들을 구해주시옵소서!”
완벽한 이중 첩자의 역공이었지요. 벨루아가 미리 메리의 통신기기를 해킹하고 마법 신호를 조작해 둔 덕분에, 대공의 자백이 담긴 음성이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진 것이랍니다.
귀족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어요. 대공을 지지하던 파벌의 의원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서둘러 대공과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섰지요.
대공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답니다. 자신이 완벽하게 설계한 덫에 도리어 목덜미를 물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눈에 광기 어린 독기가 가득 차올랐어요.
“이…… 요사스러운 년들이 나를 감히!”
대공이 품 안에서 흑철 통신기기를 떨어뜨리며,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검고 칙칙한 마석을 꺼내 들었답니다.
그 순간, 사일러스가 들고 있던 마력 측정기가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을 울리며 붉은 낙뢰 같은 불꽃을 튀겼어요. 대공이 쥐고 있는 마석은 제국의 금기인 ‘심연의 마력’을 담은 폭발성 아티팩트였던 것이지요.
“나 혼자 죽지는 않는다! 황실의 대를 여기서 끊어놓으리라!”
대공이 미친 듯이 웃으며 마석을 꽉 쥐는 순간, 연회장의 바닥이 거칠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답니다.
과연 벨루아는 이 절체절명의 폭발 위기 속에서, 감정이 마모된 상태로 두 번째 기적을 이끌어내어 대공의 마지막 발악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