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개인의 천재성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때,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한성태의 목소리가 귓전을 낮게 긁었다. 그의 숨결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묻어났다. 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리석 기둥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성태의 살기는 구체적인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진서의 망막 위에 한성태의 프로필과 단말기 제원이 실시간 데이터 스트림으로 흘러내렸다.

[대상: 한성태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소속)] [보유 장비: 국방 안보용 위성 전용 단말기 (K-GNS 연동)] [패킷 상태: 마스터 레지스트리 유출 단서 검출 완료]

국가 안보.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단어였다. 진서는 마음속의 감정 수치를 이성적으로 억눌렀다. 손목시계의 기기 온도를 확인했다. 36.2도. 정상 범위였다. 진서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천재성이 없었다면, 미래온의 시스템 오류로 국가 통신망 자체가 암전되었을 겁니다. 한 요원님." "말장난은 통하지 않아, 백진서 씨."

한성태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색 가죽 지갑이 보였다. 국정원 신분증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미래온의 해저 광케이블 망은 단순한 민간 설비가 아니야. 국가의 비상 동신 규약에 묶여 있는 핵심 인프라지. 당신이 그걸 사적으로 통제하려 드는 순간, 그건 테러와 다름없는 행위로 규정될 수 있어."

협박의 수위가 올라갔다. 동시에 진서의 귓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삐이이-. 고주파의 소음이 우측 측두엽을 관통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픽셀 단위로 깨지기 시작했다. 붉은색 경고창이 망막 전면에 강제로 팝업되었다.

[경고: 시스템 연산 장치(RAM) 사용량 급증] [현재 점유율: 98.2% (15.71 GB / 16.00 GB)] [위험: 뇌 신경망 과부하(Overhead) 감지] [경보: 세그멘테이션 폴트(Segmentation Fault) 발생 가능성 매우 높음]

법정에서 미래온의 복잡한 특허 코드를 실시간으로 디버깅하고, 한성태의 국방 안보 단말기를 해킹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연산이 발생한 결과였다. 물리적인 뇌의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진서는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시야가 불투명한 회색 필터를 끼운 것처럼 흐려졌다. 한성태의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백진서 씨?"

한성태가 이상을 감지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성적인 판단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었다. 단기 기억 장치에 일시적인 세그먼트 손상이 발생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이 법정 복도라는 사실조차 3초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한성태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당신의 그 대단한 시스템을 국가에 헌납하고 영토 내의 안전을 보장받는 게 좋을 거야. 거부한다면……."

말소리가 끊겼다. 진서의 눈앞에 노이즈가 가득 찼다. 아날로그 TV의 채널이 끊겼을 때 나타나는 회색 모래 폭풍이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발열감이 두개골 내부를 채웠다. 연산 능력이 상실되면, 현실 개조 능력은커녕 뇌사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그때였다.

탁.

단호한 손길이 진서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익숙한 가죽 냄새와 차가운 감촉. 강민희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진서의 몸을 자신의 어깨로 지탱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갑고 신속했다.

"한성태 요원님."

강민희의 목소리가 복도의 공기를 얼렸다.

"제 의뢰인에 대한 임의동행이나 협박성 발언은 변호사법 및 국가정보원법 직권남용 금지 조항에 의거해 즉각 고발 조치하겠습니다. 지금 이 대화 내용은 전부 제 녹음 장치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강 변호사. 지금 국가 안보를 두고 장난치는 걸로 보이나?" "국가 안보를 빌미로 민간 기업인을 영장 없이 압박하는 것이 대한민국 법률 위에 존재하는 국정원의 방식입니까? 비켜서십시오. 제 의뢰인은 현재 극심한 과로로 인해 응급 처치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강민희는 망설임 없이 진서를 이끌었다. 그녀의 어깨가 진서의 하중을 견뎌내느라 미세하게 떨렸지만,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성태는 어두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물리적인 제지를 가하지 못했다. 법정 복도의 CCTV 카메라들이 일제히 작동하고 있었고, 강민희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의 녹음 아이콘이 붉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시죠, 백 대표님."

강민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진서는 간신히 발을 내디뎠다. 다리의 감각이 무뎌져 마치 허공을 걷는 듯했다. 시야의 90%가 검은색 암전 상태로 변해 있었다. 남은 10%의 터널 시야 속에서 강민희의 단호한 옆얼굴만이 이정표처럼 빛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시간은 진서에게 영겁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철제 벽면이 코드로 분해되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환각이 보였다. 진서의 호흡이 가빠지자 강민희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차가움이 진서의 타들어 가는 신경망에 미약한 진정 효과를 주었다.

"차량으로 이동합니다. 대표님의 개인 연구실 주소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세단에 진서가 탑승했다. 강민희는 신속하게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부드럽게 울리며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진서는 뒷좌석에 상체를 묻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계속해서 고막을 때렸다.

[위험: RAM 용량 초과] [메모리 릭(Memory Leak) 누적 가속화] [경고: 120초 이내에 강제 가비지 컬렉션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전두엽 신경 회로의 영구적 손상 발생]

진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뇌의 온도가 40도를 넘어서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두면 뇌세포가 열변성으로 파괴된다. 강민희는 백미러로 진서의 상태를 확인하며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그녀는 진서가 단순한 과로가 아닌, 무언가 물리 법칙을 벗어난 초현실적인 충격을 겪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성은 오직 의뢰인의 생존과 계약의 유지를 위해서만 구동되고 있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차가 도심의 빌딩 숲을 지나, 진서가 비밀리에 구축해 둔 대성 전자기전 인근의 개인 연구실 건물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곳은 외부의 전파가 완벽히 차단된 인프라 격리 구역이었다. 강민희는 차를 세운 뒤, 뒷좌석 문을 열고 진서를 부축했다. 진서의 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진서를 연구실 내부의 가죽 소파에 눕혔다.

연구실 내부의 수많은 모니터가 차가운 청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서는 소파에 누운 채 상체를 간신히 일으켰다. 그의 망막에 비친 현실의 코드는 이미 깨진 텍스트와 세그먼트 쓰레기(Garbage) 데이터로 가득 차 있었다.

"강 변호사……." "말씀하지 마십시오." "노트북…… 전원을 켜고…… 내 손을…… 키보드 위에……."

진서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소리처럼 힘이 없었다. 강민희는 지체 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고성능 씽크패드 노트북을 가져와 전원을 켰다. 그리고 진서의 차가운 양손을 키보드 자판 위에 올렸다. 진서의 손가락끝이 파르르 떨렸다.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 키보드의 접점을 두드렸다.

'시작한다.'

진서는 마지막 남은 의지를 쥐어짜 내어 리얼리티 디버거의 콘솔 창을 뇌 속에서 활성화했다. 자신의 뇌 신경망을 하나의 호스트 컴퓨터로 규정하고, 디버깅 코드를 주입해야 했다. 뇌의 메모리 영역을 강제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실패하면 뇌사였다.

[프로세스 인스펙터 가동] [대상: 백진서 뇌 주소 영역 (0x00000000 ~ 0x7FFFFFFF)] [점유 프로세스 분석 중……]

| 프로세스 ID | 프로세스명 | 메모리 점유율 | 상태 | | :--- | :--- | :--- | :--- | | PID 101 | 리얼리티 디버거 코어 | 72.5% | 구동 중 | | PID 102 | 미래온 특허 역분석 엔진 | 18.2% | 좀비 프로세스 | | PID 103 | K-GNS 패킷 분석기 | 7.5% | 대기 중 | | PID 104 | 중추 신경 감각 제어기 | 1.8% | 과부하 |

미래온의 특허 코드를 역분석했던 프로세스가 메모리를 완전히 반환하지 않고 좀비 상태로 남아 메모리 누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에 한성태의 단말기 패킷을 훔쳐보던 분석기까지 메모리를 좀먹고 있었다. 진서는 이빨을 짓누르며 코드를 타이핑하듯 뇌 속에서 명령어를 실행했다.

`kill -9 102` `kill -9 103`

[명령어 실행 실패: 프로세스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Timeout)]

"으윽……!"

진서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거부 반응으로 인해 코와 귀에서 붉은 혈흔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강민희는 손을 떨며 손수건으로 진서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녀의 눈빛에 처음으로 짙은 긴장감이 서렸다. 하지만 그녀는 방해하지 않았다. 진서가 이 사투에서 이겨내야만 자신들의 계약도, 미래온을 향한 복수도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강제 종료로는 안 돼.' '중추 신경 제어 코드를 직접 수정해야 한다.'

진서는 뇌의 메모리 관리자 역할을 하는 가비지 컬렉터(Garbage Collector)의 소스 코드를 강제로 호출했다. 리얼리티 디버거의 렌즈가 진서의 뇌신경 시냅스를 나노 단위로 쪼개어 보여주었다. 수억 개의 시냅스 사이로 흘러 다니는 전기 신호들이 엉망으로 꼬여 있었다. 그 꼬인 실타래를 향해, 진서는 디버깅 주입 코드를 밀어 넣었다.

```cpp void Brain_Garbage_Collection() { for (int i = 0x100000; i < 0x7FFFFF; i++) { if (Memory_Map[i].status == ORPHANED) { free(Memory_Map[i].address); Memory_Map[i].status = AVAILABLE; } } System.Regulate_Core_Temperature(36.5); } ```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실제 키보드 타이핑 소리가 연구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민희는 진서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기적적인 속도에 숨을 죽였다. 뇌의 발열을 강제로 제어하고, 버려진 메모리 주소를 회수하는 매크로가 가동되었다.

[가비지 컬렉션(GC) 강제 가동 중……] [진행률: 10%…… 40%…… 70%……] [경고: 일시적인 인지 장애 및 단기 기억 왜곡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두통이 극에 달했다. 마치 뇌를 거대한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리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진서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소파의 가죽 시트를 손톱이 깨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고통의 수치가 정점을 찍은 순간.

탁.

마지막 엔터 키가 눌렸다.

[가비지 컬렉션 완료] [회수된 메모리 용량: 4.85 GB] [현재 RAM 점유율: 48.3% (7.72 GB / 16.00 GB)] [상태: 매우 안정적] [뇌 내부 온도: 36.6도 (정상 복구 완료)]

순간, 진서의 온몸을 짓누르던 지옥 같은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차가운 얼음물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쏟아지는 듯한 극도의 카타르시스가 전신을 관통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회색 모래 폭풍이 순식간에 걷히고, 연구실의 선명한 모니터 화면들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심박수 역시 분당 72회로 안정화되었다.

진서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엄하기까지 한 정적이 연구실 내부를 채웠다.

"대표님."

강민희가 손수건을 거두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시스템이 정상 복구되었습니다."

진서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건조하고 이성적인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셔츠 깃에 묻은 핏자국을 무심히 털어냈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강민희를 바라보았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강 변호사. 이번 건은 계약 조항 외의 신체적 구호 조치였으니, 다음 정산 때 보상금을 추가로 산정해서 지급하겠습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보상금 산정은 계약서 특약 사항 조항에 맞춰 처리해 주십시오."

강민희 역시 언제 걱정했냐는 듯, 평소의 냉철한 변호사 업무 모드로 즉각 복귀했다. 두 사람 사이에 감상적인 위로나 감사의 표현은 오가지 않았다. 철저한 계산과 실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인 컴퓨터 앞으로 걸어갔다. 대성 전자기전 공장의 무선 칩셋 가동 상태를 점검하고, 미래온의 특허 무효화 이후의 후속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의 경영 대장 시스템이 실시간 자산 변동을 갱신했다.

| 자산 항목 | 이전 상태 | 현재 상태 | 변동 수치 | | :--- | :--- | :--- | :--- | | 특허 자산 가치 | 0 원 | 42,000,000,000 원 | + 420 억 원 (미래온 특허 무효화 반사 이익) | | 물리 인프라 | 가동 준비 중 | 정상 가동 승인 | 대성 공장 생산 라인 확보 완료 |

420억 원의 자산 가치 상승. 미래온의 핵심 특허를 법적으로 깨부수고 대성 전자기전의 생산 라인을 온전히 확보한 결과물이었다. 진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것으로 미래온의 아시아 무선 인프라를 수탈하기 위한 하드웨어적 기반은 완벽하게 다져졌다.

진서는 책상 서랍을 열어 3화에서 획득했던 '미래온 아시아 지사의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를 꺼냈다. 종이 표면에 인쇄된 수치들이 진서의 디버거 렌즈를 통해 디지털 코드로 정렬되었다.

[미래온 해저 광망 특정 주파수 감쇠 구역 검출] [특이 주파수 대역: 1550nm 양자 얽힘 신호 흔적 잔존]

"이 신호 감쇠 주파수를 이용하면, 미래온이 아시아 전역에서 무단으로 독점하고 있는 해저 트래픽을 합법적으로 가로챌 수 있어."

진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이 다음 단계였다. 미래온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무선 광망 인프라를 완전히 흡수하는 것.

그때였다.

삐비빅-!

메인 컴퓨터의 대형 모니터 화면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음이 연구실의 차가운 벽면을 때렸다. 진서의 눈동자가 평정을 잃고 빠르게 미동했다. 화면 중앙에 떠오른 경고창은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다.

[위험: 외부 침입 시도 감지] [침입 경로: 양자 얽힘 기반 초고속 백도어 프로토콜] [침입자 서명: 'N_A_R_M' (노아름)] [경고: 넥서스(Nexus) 시스템 핵심 양자 코어 데이터베이스 접근 차단 중……] [남은 보안 격벽: 1개]

노아름이었다. 진서가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고 생각했던 천재 해커 노아름. 그녀가 남겨두었던 특수 주파수 흔적이, 넥서스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백도어로 활성화되어 시스템의 핵심 코어를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조롱하듯 텍스트가 한 줄씩 타이핑되며 나타났다.

`[Hello, Monster. 네가 만든 요새의 열쇠는 내가 가져갈게.]`

진서의 눈빛이 극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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