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경고등이 지하 연구실의 콘크리트 벽면을 피처럼 적셨다.

메인 모니터 중앙에서 깜빡이는 경고 문구는 선명했다.

[위험: 외부 침입 시도 감지] [침입 경로: 양자 얽힘 기반 초고속 백도어 프로토콜] [침입자 서명: 'N_A_R_M'] [남은 보안 격벽: 1개]

노아름. 그녀가 남겨둔 덫이 기어이 작동했다. 과거 대성 전자기전 공장에서 그녀를 무력으로 제압했을 때, 시스템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미세한 주파수 흔적이 백도어로 활성화된 것이다.

진서는 자리에 앉았다. 왼손 손목시계의 기기 구동 온도를 확인했다.

34.2도. 정상 범위다. 심박수 역시 분당 65회로 평온했다. 그의 뇌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연산 장치(RAM)의 잔여 용량만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Hello, Monster라."

모니터에 타이핑된 노아름의 조롱을 진서는 건조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넥서스의 양자 코어를 완전히 손에 쥐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서의 망막 위로 파랗게 떠오른 소스코드는 다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서가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타건음이 고요한 방 안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리얼리티 디버거 가동] [시스템 상태 분석 중……]

| 자원 항목 | 현재 할당량 | 한계치 | 상태 | | :--- | :--- | :--- | :--- | | 시스템 RAM | 11.4 GB | 16.0 GB | 안정 (여유 4.6 GB) | | 주파수 대역 | 1550nm | - | 감쇠 신호 동기화 중 | | 백도어 침투율| 94.2% | 100.0% | 격벽 붕괴 직전 |

진서는 서랍을 열어 3화에서 확보했던 '미래온 아시아 지사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를 꺼냈다. 그곳에 적힌 특이 주파수 대역은 1550nm. 노아름이 침투 경로로 사용한 양자 얽힘 신호의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미래온의 해저 광망을 타고 들어왔군."

진서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걸렸다. 노아름은 미래온의 인프라를 경유해 역으로 진서의 요새를 뚫으려 했다. 그것이 그녀의 한계이자 백진서가 설계한 덫의 시작점이었다.

5화에서 그녀를 추적할 때 받아두었던 특수 주파수 흔적. 그것은 단순히 방어용 데이터가 아니었다. 상대가 침입하는 경로를 그대로 되짚어 올라갈 수 있는 '역방향 터널'의 이정표였다.

[디버깅 명령 실행: `reverse_handshake_init()`] [대상 프로토콜: 양자 얽힘 백도어 (N_A_R_M)] [소모 RAM: 2.8 GB]

뇌가 징징 울리기 시작했다. 관자놀이 부근이 묵직해지며 시야 가장자리가 잠시 흐려졌다. RAM 점유율이 순식간에 치솟았지만, 진서는 이성적으로 연산 효율을 제어했다. 필요 없는 안구 운동과 불필요한 감각 수용을 차단하여 뇌의 부하를 0.8GB 낮췄다.

"세션은 내가 닫는다, 노아름."

진서가 엔터키를 눌렀다.

***

같은 시각, 서울 외곽의 지하 주차장을 개조한 비밀 아지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수십 대의 모니터가 내뿜는 푸른 광원만이 노아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찢어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껌을 질겅 씹으며 춤추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끝났어, 괴물 자식아. 네가 아무리 대단한 반도체 공장을 처먹었어도 내 논리 구조 앞에서는 깡통이야."

노아름의 모니터에는 넥서스 시스템의 핵심 코어 데이터베이스 진입률이 98%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 격벽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이미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이 설계한 양자 얽힘 백도어는 물리적으로 추적이 불가능한 우주의 법칙 그 자체였으니까.

"이제 그 건방진 얼굴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그때였다. 99%에서 멈춘 게이지가 갑자기 붉은색으로 반전되었다.

[Warning: Buffer Overflow detected in Client Side] [경고: 역방향 세션 주입 감지]

"어? 이게 왜..."

노아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그녀는 급히 백도어 연결을 끊기 위해 단축키를 눌렀다. 하지만 먹통이었다. 키보드의 LED 불빛이 일제히 꺼지며 입력 장치 전원이 차단되었다.

"말도 안 돼. 물리 포트가 왜 잠겨?"

삐비비빅-!

아지트 벽면에 걸린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고주파 소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자랑하던 12대의 모니터 화면이 차례대로 검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화면 위로, 하얀색 텍스트가 강제로 출력되었다.

`[System Debugger: Target 'N_A_R_M' located.]` `[IP Address: 211.234.XX.XX (Virtual Tunnel Decrypted)]` `[Physical Location: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지하 2층 사설 인프라]`

"내 위치가... 뚫렸다고? 양자 암호인데?"

노아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전원 공급 장치의 메인 스위치를 내리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암전되었던 중앙 대형 모니터가 일제히 켜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백진서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감정이 완전히 소거된 무표정한 눈으로 노아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웹캠이 멋대로 구동되어 그녀의 두려움에 찬 얼굴을 진서에게 송출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모니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진서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메인 전원 스위치에 손을 대는 순간, 네 아지트에 공급되는 전류를 380V로 과부하 시킬 거다. 네 자산인 고가 서버들이 전부 타버리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움직여 봐."

"너, 너 어떻게..."

노아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우주 최강의 천재 해커를 자처해 왔다. 미래온의 철통같은 보안망도 장난감 다루듯 헤집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영토라 믿었던 아지트의 모든 시스템이 단 한 사람의 손가락 끝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네가 5화에서 내 시스템에 심어둔 주파수 흔적."

진서가 손목시계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그 양자 얽힘 프로토콜은 겉보기에 완벽했지만, 송수신 시 발생하는 1550nm 주파수의 미세한 위상 변화를 감추지 못했지. 나는 그 위상 차이를 컴파일러 오류로 규정하고 디버깅했다.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문은 내게 네 안방으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된 거다."

"디버깅... 했다고? 물리 주파수의 위상차를 코드로 조작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노아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해킹이 아니었다. 물리 세상의 법칙을 직접 수정하는 신의 영역이었다.

"가능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결과가 증명하니까."

진서가 자판을 툭 쳤다. 그러자 노아름의 스마트폰 화면이 켜지며 실시간 자산 변동 내역이 표시되었다.

[경영 대장 시스템 연동 완료] [대상: 노아름 (Black Hat Hacker)] [보유 비트코인 자산 가치: 1,420,000,000 원] [소유권 이전 프로세스 대기 중……]

"어, 내 지갑..."

노아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다크웹에서 의뢰를 수행하며 모아둔 전 재산이었다. 진서의 손가락 하나면 그 자산들이 합법적인 채권 채무 관계로 위장되어 그의 계좌로 전송될 판이었다.

"협박하는 거야?"

노아름이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았다. 눈가에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천재로서의 자존심이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협박이 아니라 비즈니스 제안이다."

진서의 음성은 차가웠다.

"나는 신뢰하지 않는 인간과는 동업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저한 계약 관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노아름, 네 실력은 쓸모가 있다. 넥서스의 양자 코어 데이터 설계 권한을 주지. 내 밑에서 일해라."

"내가 왜? 네 노예가 되라고?"

"노예가 아니라 정식 기술직이다."

진서가 화면에 계약서 한 장을 띄웠다.

[넥서스 테크 제국 - 기술 보안 총괄 계약서] - 직책: 양자 코어 보안 아키텍트 - 연봉: 기본급 5억 원 + 프로젝트 성공 보수 (자산 기여도의 2%) - 의무 조항: 시스템 무단 백도어 설치 금지, 데이터 유출 시 즉각적인 자산 전액 몰수 및 민형사상 면책 동의 - 페널티: 계약 위반 시 뇌 신경망 주파수 역변조 디버깅 동의 (영구적 인지 장애 유도)

노아름은 계약서의 페널티 조항을 읽고 몸을 떨었다. 인지 장애 유도. 다른 사람이라면 허풍이라 치부했겠지만, 방금 물리 포트를 원격으로 잠가버린 진서의 능력을 본 이상 그것이 실제 가능한 기술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양자 코어 데이터 설계 권한'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천재적인 개발자 본능을 자극했다. 그것은 세상 어떤 해커도 만져보지 못한, 완성된 양자 보안 요새의 심장부였다.

"내가... 그걸 만질 수 있게 해준다고?"

노아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약을 이행하는 동안에는 완벽한 권한을 보장한다. 단, 1바이트라도 계약 범위를 벗어나는 움직임이 감지되면 즉시 연결은 차단(Connection Timeout)된다. 선택해라. 3초 주지."

진서가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3."

"..."

"2."

"할게! 한다고! 서명할 테니까 내 지갑 건드리지 마!"

노아름이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그녀의 모니터에 인감도장과 지문 인식을 요구하는 팝업창이 떴다. 그녀는 패배감에 젖은 채, 마우스 키가 작동하자마자 디지털 서명을 완료했다.

[계약 완료] [경영 대장 시스템 반영 완료]

| 자산 항목 | 이전 상태 | 현재 상태 | 변동 수치 | | :--- | :--- | :--- | :--- | | 인적 자원 | 미확보 | 노아름 (양자 아키텍트) | S급 기술 인력 확보 | | 보안 안정도 | 62% | 99.8% | 내부 백도어 완벽 제거 |

진서의 눈앞에 보상 메시지가 선명하게 인쇄되었다. 최강의 크래커였던 노아름을 넥서스의 방패로 흡수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내부적인 보안 취약점은 완전히 사려졌다.

진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 연결되어 있는 화면 속 노아름에게 머물렀다.

"첫 번째 임무다. 미래온 아시아 지사의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보고서. 1550nm 주파수 대역의 실제 물리적 분기점이 어디인지 파악해."

그 말에 노아름이 붉어진 눈시울을 소매로 훔치며 훌쩍였다. 그녀는 완전히 기가 죽은 표정으로 진서를 바라보았다.

"그거... 굳이 안 찾아도 내가 이미 알고 있어."

"말해."

노아름이 코를 훌쩍이며 모니터 너머로 진서의 눈치를 살폈다.

"차현우... 그 인간이 오늘 저녁에 움직여. 미래온이랑 손잡고 아시아 요충지에 있는 오프라인 해저 메인 전송망 제어권을 직접 물리적으로 장악하려고 할 거야. 이미 사설 보안 팀이 영종도 해안선 분기점으로 출발했어."

진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현우. 그가 드디어 넥서스의 하드웨어 인프라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 물리적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시간 오후 5시 40분. 해가 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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