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인을 마친 한성태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액정 화면 위에 비친 그의 서명은 비뚤게 찌그러져 있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자존심이 한 청년의 손끝바닥 아래에서 완전히 뭉개진 순간이었다.

그때 제어실 메인 모니터가 거칠게 요동쳤다.

녹색으로 채워지던 복구율 그래프가 99.8%에서 멈췄다. 붉은색 노이즈가 화면 중앙을 가로질렀다. 전산 복구의 실시간 추이 곡선이 수직으로 꺾여 내려갔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이 통신망의 숨통을 다시 조여 붙잡았다.

[WARNING: 국가 극비 재난 통제망 마스터 레지스트리(ID: 0x7F9A) 내의 숨겨진 백도어 활성화] - 외부 강제 간섭 차단 실패. - 원인: 정부 내부 시스템에 심어진 미지의 상위 권한 마스터 키 작동 중.

한성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게…… 무슨 일이지? 복구된 게 아니었나?"

김성국 행정안전부 차관이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정체불명의 컴파일 코드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망막 위에 투사된 리얼리티 디버거의 시스템 창이 빠르게 로그를 분석해 올렸다.

``` [패킷 분석 결과] - 침입 소스 주파수: 14.22 GHz (양자 변조 신호) - 공격 유형: 메인프레임 물리 레지스트리 파괴 및 변조 악성코드 주입 - 타깃: 대한민국 정부 전산 허브 전역 ```

"우리가 심은 코드가 아닙니다."

진서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활강했다.

"정보원 내부에서 오랜 시간 준비된 백도어입니다. 국유화 압박을 넣기 훨씬 전부터, 누군가 마스터 레지스트리 시스템의 깊은 구멍을 파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재난망의 마스터 레지스트리는 오직 국정원과 청와대 극비 라인만 접근 가능한……."

한성태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단말기를 확인하려 했으나, 액정은 이미 검게 죽어 있었다.

지하 제어실의 백업 발전기가 거친 굉음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외부 전력망이 다시 차단되고 있었다. 악성코드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교란에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주요 변전소와 전력 분배 허브의 물리적 하드웨어를 과부하시켜 태워버리는 물리 파괴형 코드였다.

"진서 씨! 이걸 막아주시오! 계약금 5,000억 원은 이미 지불되지 않았소!"

김성국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계약서 제3조를 확인하십시오."

진서가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말했다.

"당사자가 제공한 복구 코드는 정상 작동했습니다. 현재의 장애는 정부가 관리 소홀로 누출한 ‘마스터 레지스트리(ID: 0x7F9A)의 백도어’로 인한 2차 감염입니다. 이는 면책 조항에 해당합니다."

"이봐, 백진서!"

한성태가 권총을 다시 쥐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진서가 방출한 양자 공명 주파수의 잔여 전류 때문에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총을 쥐는 데 연산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한 팀장님."

진서가 차갑게 덧붙였다.

"그 손가락이 완전히 마비되는 데는 0.3초면 충분합니다."

그 순간, 넥서스 제1 코어의 외부 방벽 너머로 거대한 불꽃이 튀었다. 영종도 일대의 다른 공공 서버 기지들이 암전되는 소리였다.

전국에서 유입되는 변조 악성코드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다. 초당 수십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변조 트래픽이 영종도 넥서스로도 들이쳤다. 넥서스는 국가 재난망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유일한 고대역폭 허브였기 때문이다.

*웅웅웅-*

넥서스 지하 기지의 냉각 팬들이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넥서스 내부의 데이터 서버들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모니터에 표시된 넥서스의 내부 시스템 온도는 안정적인 18도를 유지했다.

[넥서스 보안 장벽 상태 보고] | 항목 | 상태 | 수치 | | :--- | :--- | :--- | | 외부 트래픽 유입 | 오버플로우 경보 | 42.1 TB/s | | 양자 소스 차단벽 | 정상 작동 중 | 100% 방어 | | 내부 코어 온도 | 안정 | 18.2 °C | | 데이터 손실률 | 무결함 | 0.0000% |

다른 공공 서버들이 과부하로 타들어 가는 동안, 넥서스는 홀로 차가운 불야성을 이루며 우아하게 서 있었다.

진서는 이 혼란 속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예전에 확보해 두었던 두 가지 치명적인 무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첫 번째는 미래온 아시아 지사에서 입수한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였다. 3화에서 입수한 이 문서는 단순한 노후화 기록이 아니었다. 미래온이 아시아 전역의 트래픽을 불법으로 가로채기 위해 특정 주파수를 감쇄시키던 정밀 물리 주파수 지도였다.

"아름 씨. 대기하고 있습니까?"

진서가 인이어 마이크를 터치했다.

- "당연하지. 이 미친 트래픽 속에서도 내 백도어 흔적은 안 지워졌더라고. 역시 백진서, 내 기술을 고대로 살려놨네?"

노아름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신기를 타고 들려왔다. 5화에서 그녀가 넥서스 전신 서버에 심어두었던 양자 얽힘 기반의 초고속 백도어 프로토콜 흔적. 진서는 그것을 지우지 않고 역이용하기 위해 보존해 두었다.

"지금 즉시 미래온의 해저 케이블 신호 감쇠 주파수 대역인 8.4GHz와 11.2GHz를 동기화하십시오. 아름 씨가 심었던 양자 얽힘 경로를 게이트웨이로 삼아 역방향으로 트래픽을 쏘아 보냅니다."

- "미친 소리 하지 마. 그 대역으로 역류시키면 미래온 아시아 지사 서버가 통째로 터져 나갈 텐데?"

"그게 제 목표입니다."

진서의 눈동자 속에서 디버깅 코드가 수 만 행 단위로 컴파일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심어놓은 백도어의 소스가 그 해저 케이블을 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통로 자체를 과전류로 메워버리십시오."

- "키킥, 마음에 드네. 독한 놈. 프로토콜 동기화 완료. 쏜다!"

노아름의 키보드 타건음과 함께, 넥서스 코어에서 가공할 규모의 역전류 전송이 시작되었다.

미래온이 국가망을 장악하기 위해 뚫어놓았던 해저 광케이블의 감쇠 주파수 대역이 역으로 넥서스의 양자 에너지를 나르는 도선으로 변모했다.

*치지직!*

모니터 화면 속 세계 지도에서 동중국해를 지나는 해저 케이블 라인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강제 강화되었다. 물리적인 트래픽 납치가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외부 악성코드의 침입 경로가 완벽히 차단되었다. 넥서스는 단 한 장의 디스크 오염도 허용하지 않은 채 국경 밖의 위협을 밀어냈다.

그러나 국가망 자체의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공공 금융망과 철도 제어 시스템이 차례로 다운되기 시작했다.

"진서 씨! 제발…… 국가 금융망이 무너지면 이 나라 경제가 끝장납니다!"

김성국이 진서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진서의 비서이자 법률 대리인인 강민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정갈한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가방에서 두꺼운 가죽 바인더를 꺼냈다.

"행정안전부 차관님. 그리고 국가정보원 팀장님."

강민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방금 전 서명하신 긴급 계약서의 효력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발생하는 추가 장애는 정부 측의 마스터 키 보안 관리 유출로 인한 사고입니다. 당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2차 기술 보장 및 긴급 디버깅 서비스'를 제안합니다."

그녀가 들이민 서류 봉투 위에는 건조한 숫자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추가 기술 보장 보증금, 1조 2,000억 원. 그리고 향후 10년간 국가 재난망 보안 관제권의 넥서스 단독 독점 위탁 계약서입니다."

"1조…… 2,000억?! 게다가 국가 안보망을 일개 민간 기업에 독점 위탁하라고?!"

한성태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협박이다! 이 시국을 틈탄 국가 찬탈 행위야!"

"선택은 자유입니다."

강민희가 만년필을 테이블 위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현재 한국은행 전산망의 메인 하드디스크가 손상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시간은 3분입니다. 3분 뒤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예금 잔고 데이터가 00으로 초기화됩니다. 1조 2,000억 원으로 국가의 물리적 파산을 막을지, 아니면 애국심이라는 명예를 쥐고 동반 자살할지 결정하십시오."

"이, 이 독사 같은 년……."

한성태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진서는 그들의 언쟁을 듣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다른 문제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콰르릉!*

뇌리를 때리는 강렬한 기계음과 함께 망막의 시스템 창이 적색으로 깜빡였다.

[WARNING: 뇌 연산 장치(RAM) 과부하 경고] - 현재 사용량: 15.8 GB / 16.0 GB (98.7%) - 현상: 인지 지연 및 단기 기억 손실 위험성 임계값 도달. - 시스템 제동력 급등 적용 중.

양자 얽힘 백도어를 역추적하고 미래온의 해저 광케이블 주파수를 실시간으로 변조하는 연산은 진서의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의 한성태가 두 명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제동력이 너무 높다. 불필요한 연산 루트를 걷어내야 한다.'

진서는 오른손 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는 감정 영역의 연산 트래픽을 추가로 완전 차단하기 위해 리얼리티 디버거의 내부 소스코드를 직접 수정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연산의 최적화를 이뤄내야 했다.

```cpp // 뇌 연산 최적화 패치 (Emergency Patch v3.1) #define EMOTION_SIGNAL_LIMIT 0x00 #define LOGIC_OVERCLOCK_ENABLE 0x01

void Brain_Optimize() { disable_interrupts(SENSORY_EMPATHY); boost_cache(LOGICAL_REASONING, RAM_ALLOC_MAX); } ```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뇌 속의 신경망 회로가 물리적으로 재배치되는 극심한 통증이 정수리를 관통했다.

진서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이빨을 악물고 통증을 수치로 치환해 억눌렀다.

[시스템 상태 업데이트] - RAM 사용량 최적화 완료: 15.8 GB -> 11.2 GB - 인지 제동력 정상 범위 회복. - 평정 페이스 확보 완료.

진서의 눈동자가 다시 유리알처럼 맑고 건조하게 돌아왔다. 관자놀이의 핏자국을 소매로 닦아낸 그가 테이블 위의 태블릿을 가리켰다.

"남은 시간 1분 40초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완벽한 초이성적 기계의 목소리였다.

김성국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성태의 권총집을 밀쳐내고 만년필을 낚아챘다.

"서명하겠소! 서명할 테니 제발 차단해 주시오! 국가 재난망을 넥서스에 독점 위탁하겠소!"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최종 계약서에 국가 공인 인감이 찍혔다.

[시스템 안내] - 국가 재난망 보안 독점 위탁 계약 체결 완료. - 추가 서비스 대금: 1조 2,000억 원 입금 대기 중. - 경영 대장 시스템: 실시간 누적 자산 업데이트.

[누적 자산 가치: 6조 1,200억 원]

짜릿한 수치의 카타르시스가 진서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6조 원의 자산.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넥서스가 없으면 통신조차 불가능한 기술적 종속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전국의 정부 서버 허브가 불타오르는 와중에, 정부 보안 허브 장비의 메인 하드디스크들이 물리적 과열로 인해 하나씩 터져 나가고 있었다.

*펑! 펑!*

원격 모니터링 화면 속 대전 정부 통합 전산 센터의 내부 온도 센서들이 차례로 블랙아웃되었다. 마지막 남은 메인 허브 장비의 온도가 98도까지 치솟았다. 이 하드가 깨지면 국가 재난망의 마스터 레지스트리 자체가 물리적으로 소멸하여 영구 복구 불가능 상태가 된다.

"마지막 하드가 깨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진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는 8화에서 탐지해 두었던 복선, 즉 정부 정보기관이 관리하는 위성 기반 극비 재난 통제망의 마스터 레지스트리 유출 단서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그 유출 단서의 끝에는 청와대 지하 벙커와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극비 레지던시 암호가 숨겨져 있었다.

"수동 검색을 시작합니다."

진서의 눈앞에 수억 개의 암호 조합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메인 하드가 과열로 파괴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2초.

진서의 손끝이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물리적 디스크의 바늘이 수명 한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었다.

과연 메인 하드가 먼저 터질 것인가, 아니면 그가 통제실 레지던시 암호를 찾아내어 시스템을 완전히 지배할 것인가.

진서의 검지 손가락이 마지막 엔터키 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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