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도. 모니터 구석의 센서 수치가 빨갛게 점멸했다. 대전 정부 통합 전산 센터의 메인 허브 하드디스크가 물리적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디스크 가동 부품이 열팽창으로 휘어지기 직전인 상황. 남은 시간은 단 12초였다.
진서의 검지 손가락이 엔터키 위에 가볍게 얹혔다.
"11초."
방 안의 공기는 에어컨 바람에도 불구하고 기계들이 내뿜는 열기로 팽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국정원 요원 한성태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그의 손은 여전히 권총집 근처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서는 그 움직임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망막 위에 시스템 콘솔을 띄웠다.
[시스템 경고: 메인 연산 장치(RAM) 사용률 94.2%] [뇌 과부하 경보 발령 임박 - 인지 장애 위험 수위]
뇌가 삐 소리와 함께 뜨거워지는 감각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진서는 손목시계의 기기 구동 온도를 확인했다. 36.5도. 자신의 체온과 정확히 일치했다. 맥박은 분당 72회. 지극히 정상이었다.
"8.2초."
진서는 8화에서 한성태의 개인 단말기를 해킹해 확보해 두었던 메모리 덤프 파일을 뇌 가상 공간에 로드했다.
`ID: 0x7F9A - 정부 극비 재난 통제망 마스터 레지스트리 유출 흔적.`
단순한 텍스트 더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숨겨둔 위성 기반 통제망의 청와대 지하 벙커 직통 레지던시 암호의 깨진 조각들이었다. 이 암호 키를 복원해 내지 못하면 메인 하드가 타버리는 순간 대한민국 전역의 통신망은 영구적인 블랙아웃에 빠진다.
하지만 연산량이 부족했다. 뇌의 RAM 용량은 이미 한계였다.
진서의 입꼬리가 건조하게 올라갔다. 쓸 수 있는 자원은 이미 확보해 두었다.
그는 5화에서 노아름이 자신의 넥서스 코어 서버에 심어두었던 양자 얽힘 기반 초고속 백도어 프로토콜의 특수 주파수 흔적(`0x4F_A8_EE`)을 활성화했다. 침입용으로 설계된 백도어 통로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연산 패킷을 전송할 초고속 병렬 가속 터널로 개조하는 작업이었다.
[디버깅 명령 실행] ```cpp // 노아름의 백도어 프로토콜 역이용 연산 최적화 void Bypass_Quantum_Tunnel() { uint64_t target_freq = 0x4F_A8_EE; Link_To_Brain_RAM(target_freq); // 연산 가속 터널 개방 } ```
순간 뇌를 찌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시야가 넓어졌다. 초당 연산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연산 트래픽이 폭증하면서 서버 내부의 대역폭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물리적인 병목 현상이었다.
진서는 망설임 없이 세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3화에서 손에 넣었던 미래온 아시아 지사의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의 수치 데이터였다.
`[미래온 광케이블 감쇠 주파수 대역: 1550nm - 감쇠율 0.18dB/km]`
그는 이 특정 감쇠 주파수 대역폭을 우회 필터로 지정했다. 폭증하는 더미 패킷들을 해저 케이블의 물리적 신호 감쇠 공식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소멸시키는 극단적인 필터링 공학이었다.
[디버깅 시스템 실시간 로그] | 구분 | 대상 데이터 | 처리 방식 | 감쇄율 | 상태 | | :--- | :--- | :--- | :--- | :--- | | 복선 1 |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보고서 | 주파수 우회 필터 적용 | 0.18 dB/km | **완료** | | 복선 2 | 노아름 양자 백도어 흔적 | 병렬 연산 가속기 전환 | - | **동기화** | | 복선 3 | 극비 재난망 마스터 레지스트리 | 0x7F9A 키 복원 연산 | - | **해독 중** |
"4초."
진서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쳤다.
*탁, 타닥!*
단 두 번의 타건음이 침묵을 깼다.
[시스템 안내] - 국가 재난망 마스터 레지스트리(ID: 0x7F9A) 복원 성공. - 청와대 지하 벙커 직통 레지던시 암호 해독 완료. - 대상 키: `[KR-GOV-MASTER-SECURE-KEY-99X]`
화면에 파란색 진행 표시줄이 100%를 기록하며 메인 하드의 온도 센서가 순식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98도에서 60도, 그리고 평온한 42도까지.
동시에 모니터의 우측 하단에 경고등이 노란색으로 깜빡였다.
[경고: 외부 소스 침입 탐지] - 발신지: 다국적 카르텔 '블랙 오션' 프록시 서버망. - 목적: 복원된 마스터 레지스트리 탈취 및 파괴 시도. - 침투 강도: 450 Gbps 분산 서비스 거부(DDoS) 및 SQL 인젝션 병행.
"이것들이 감히."
한성태가 화면의 경고 문구를 읽고 이를 갈았다. 권총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국가 재난망이 복구되자마자 배후에 숨어 있던 해외 세력이 통제권을 가로채기 위해 총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백 대표, 막을 수 있겠소? 저들의 침투 속도가 우리 방화벽보다 빠르오!"
김성국이 다급하게 진서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진서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계약 위반 조항에 추가하겠습니다."
진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화면에 나타난 침투 통로의 소스코드를 한눈에 훑었다. 난독화된 패킷들이 교묘하게 국가 재난망의 보안 맹점을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진서의 '리얼리티 디버거' 앞에서는 그저 조잡하게 작성된 스크립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3초면 충분합니다."
진서는 키보드 마크로 지정해 둔 글로벌 클린(Clean) 매크로 단축키를 눌렀다.
[디버깅 명령 실행: `delete_origin_connection();`]
1초. 다국적 카르텔의 침투 패킷 경로가 역추적되었다. 2초. 그들이 경유지로 삼은 스위스 및 싱가포르의 프록시 서버 14대의 메모리에 강제 Null 포인터 주입. 3초. 물리적 메모리 오버플로우 유발로 인한 프록시 서버 전체 다운.
*파앗!*
화면을 가득 채우던 붉은색 경고 창들이 단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통신망을 공격하던 다국적 카르텔의 서버들은 해외 현지에서 메인보드가 타버려 물리적으로 파괴되었다. 완벽한 청소였다.
[시스템 안내] - 외부 침입 세력 역디버깅 청소 완료. - 침투 통로 완전 폐쇄 및 소스코드 소멸 처리. - 국가 재난망 마스터 보안 제어권: '넥서스 제1 코어'로 완전 이관 완료.
모니터 화면이 고요한 청색으로 빛났다. 중앙에는 넥서스의 엠블럼인 양자 궤도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정적만이 방 안을 채웠다.
한성태는 권총집에서 손을 완전히 떼어냈다. 그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국가 정보기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압박하려 했던 상대가, 단 몇 초 만에 국가의 숨통을 쥐고 흔들던 해외 테러 세력을 증발시키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성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서는 의자를 뒤로 살짝 밀고 일어섰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최종 위탁 계약서와 만년필을 한성태 앞으로 밀어 놓았다.
"가능 여부를 논할 시간은 지났습니다, 한성태 팀장님."
진서가 한성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타협도, 애국심도, 개인적인 악의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거래 대상으로서의 냉정한 판단만이 존재했다.
"국가가 가진 마스터 레지스트리는 이제 제 넥서스의 하위 노드에 불과합니다. 제가 연결을 차단하는 순간, 청와대 지하 벙커부터 행정안전부 재난상황실까지 모든 통신망은 암전됩니다."
"백진서... 당신 지금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비즈니스 제안입니다."
진서가 수치화된 가치를 제시했다.
"저희 넥서스가 국가 재난망을 위탁 관리하는 비용은 매달 1,000억 원입니다. 연간 1조 2,000억 원. 국가 예산의 0.2%에 불과한 금액으로 완벽한 사이버 영토를 보장받는 겁니다. 거부하시겠습니까?"
한성태의 목구멍에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거부하는 순간, 국가는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국가적 기능 정지에 빠질 테니까.
"만약... 우리가 이 계약을 파기하려 한다면?"
"간단합니다."
진서가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연결 차단(Connection Timeout). 즉시 국가 재난망의 모든 라우팅 테이블을 지워버리겠습니다. 복구에는 최소 5년이 걸릴 겁니다."
한성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던 국수주의적 자존심이, 진서가 보여준 압도적인 기술적 폭력 앞에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쥐고 있던 권력이 이 청년의 노트북 한 대보다 가볍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졌소."
한성태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넥서스에 대한 국가 차원의 국유화 및 자산 압류 조치를 전면 철회하겠소. 또한... 국가 재난망의 독점 위탁 계약을 정식 승인합니다."
그가 무거운 손을 뻗어 결재 문서의 서명란에 펜을 대었다. 사각거리는 날카로운 잉크 소리가 방 안에 번졌다. 그의 서명이 끝나는 순간, 대한민국이라는 행정 권력은 기술적으로 백진서의 지배 아래 종속되었다.
[시스템 알림] - 국가 재난망 보안 독점 위탁 계약 공식 발효. - 대한민국 정부의 넥서스 국유화 시도 무력화 완료. - 계약 대금 1조 2,000억 원 입금 처리 중.
[경영 대장 시스템 실시간 자산 내역] - 보유 현금 및 유동 자산: 7조 3,200억 원 - 물리 인프라 가치: 4조 5,000억 원 (넥서스 제1 코어 및 해저 광케이블망) - 총 자산 가치: 11조 8,200억 원
11조 원 돌파.
진서의 심장이 고요하게 박동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완벽하게 ‘을’로 내려앉히고 얻어낸 절대적인 수치의 카타르시스였다.
그때였다.
서명이 채 마르기도 전에, 진서의 메인 모니터 전체가 기괴한 주파수 간섭을 일으키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음이 터져 나왔다. 한성태와 김성국이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면에 출력되는 것은 넥서스의 감시망이 아니었다. 전 세계 해저 광케이블망의 실시간 트래픽 지도가 급격히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그래픽이었다.
[경고: 비정상적 데이터 병합 프로세스 감지] - 대상: 미래온 아시아 지사 및 글로벌 잔존 지부 전체 서버망. - 현상: 미래온의 모든 클라우드 인프라가 넥서스의 양자 클라우드로 강제 병합 중. - 비고: 시스템 소스코드의 제어 주체 불명.
"이게 무슨..."
한성태가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미래온의 잔존 지부 전체가, 마치 거대한 포식자에게 흡수되듯 넥서스의 데이터 요새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것은 진서가 의도한 명령이 아니었다.
누군가 외부에서 미래온의 시스템을 강제로 폭파하며 그 파편을 넥서스로 던져 넣고 있었다.
진서의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 위로 올라선 그 순간, 화면 중앙에 단 한 줄의 텍스트가 타이핑되듯 나타났다.
`[Hello, Jinseo. Let's mer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