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속보: 미래온 본사 빌딩, 법원 집행관 진입 통제 및 물리적 가압류 집행 중…….]

화면 하단을 흐르는 붉은색 자막이 선명했다. 차현우의 심장부였던 미래온 본사 빌딩의 유리문마다 법원의 압류 표식이 차례대로 붙었다. 사설 보안 요원들이 가로막았으나 집행관들의 서류 한 장에 무력하게 밀려났다.

진서는 조용히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내부 온도는 36.5도. 정상 범주였다. 그의 눈동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TV 화면 속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던 한성태의 일그러진 얼굴도, 그의 뇌 속 연산 장치를 자극하지 못했다.

탁.

진서가 노트북을 덮었다.

"이동합니다."

강민희가 서류 가방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빈 사무실에 건조하게 울렸다.

***

사흘 뒤. 인천 영종도 남단 해안가.

과거 대성 전자기전의 폐쇄된 반도체 공장이 있던 자리다. 이제 그곳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돔 형태의 건축물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외부에는 아무런 간판도 없다. 오직 고압 전류가 흐르는 삼중 철조망과 열화상 감지 카메라만이 1초에 한 번씩 사방을 훑을 뿐이다.

이곳이 백진서의 독점 영토, '넥서스(NEXUS)'의 제1 코어 기지다.

진서는 기지 지하 3층에 위치한 메인 제어실 중앙에 섰다. 가로 10미터에 달하는 대형 월 모니터가 푸른빛을 뿜어냈다. 수백만 개의 양자 연산 노드가 격자무늬를 그리며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있었다.

윙-.

공조 장치가 가동되는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진서는 망막 위에 리얼리티 디버거의 콘솔 창을 띄웠다.

[Reality Debugger v3.00 - 물리 인프라 통합 컴파일] - 대상 구역: 넥서스 제1 코어 (인천 영종도 Node-01) - 연산 장치 RAM 점유율: 11.8 GB / 16.0 GB - 시스템 안정도: 99.4%

"뇌 과부하 수치 안정적."

진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USB 메모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3화에서 획득했던 '미래온 아시아 지사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 파일이 들어 있었다.

진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달렸다.

타타타탁!

"감쇠 저하 지점 주파수 대역 분석 완료. 타겟팅을 시작한다."

미래온이 태평양 심해에 매설해 둔 해저 광케이블은 분기점마다 미세한 신호 누설, 즉 감쇠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술로는 단순한 잡음으로 치부될 신호였다. 하지만 진서의 리얼리티 디버거 앞에서는 완벽한 데이터 통로로 재컴파일되었다.

[해저 광케이블 트래픽 납치 프로토콜 구동] - 대상 주파수: 1,470nm ~ 1,550nm 감쇠 대역 - 동기화 상태: 완료 (접속 유지 시간 무제한) - 우회 대역폭: 초당 40 Terabits (Tbps)

"이걸로 미래온의 아시아 동부 백본망 트래픽의 40%가 우리 쪽 양자 연산 노드로 우회 유입됩니다. 법적 권한은 이미 강 변호사가 확보한 미래온 자산 압류 채권에 종속시켰습니다. 완벽하게 합법적인 납치입니다."

진서의 설명은 건조했다. 감정도, 자랑도 없었다. 오직 수치와 결과만으로 말할 뿐이었다.

"괴물이네."

제어실 구석에서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노아름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퀭한 눈으로 모니터에 흐르는 소스코드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해저 광케이블 물리 트래픽을 통째로 낚아채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그걸 이 폐쇄망 안으로 다 집어넣었다고?"

"당신이 준 힌트 덕분입니다."

진서가 노아름을 돌아보았다.

"내가?"

"5화에서 당신이 내 서버에 심어두었던 양자 얽힘 기반 초고속 백도어 프로토콜. 기억합니까?"

노아름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그거 실패한 공격이잖아. 네가 과전류로 내 아지트 서버까지 다 태워 먹었으면서."

"실패한 건 침투 코드였지, 전송 주파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진서가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파형이 겹쳐진 기하학적 그래프가 나타났다.

"당신이 쓴 양자 얽힘 주파수의 고유 진동수를 역추적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넥서스 시스템의 메인 보안 벽 프레임워크로 재컴파일했습니다. 외부 크래커가 우리 망에 접속하려 하는 순간, 그 접속 요청 자체가 양자 상태 붕괴를 일으켜 스스로의 패킷을 파괴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노아름이 턱을 벌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바르르 떨렸다.

"내 백도어 엔진을…… 양자 방화벽의 주춧돌로 썼다고? 말도 안 돼. 그 연산을 실시간으로 처리하려면 슈퍼컴퓨터 수십 대가 필요한데."

"그래서 이 공장을 인수한 겁니다. 수만 개의 실리콘 웨이퍼에 직접 전자기적 디버깅을 가해 양자 연산 노드로 개조했으니까요."

진서는 경영 대장 시스템의 실시간 자산 현황판을 띄웠다.

``` ============================================================ [경영 대장 시스템 - 실시간 자산 및 독점 지표] ============================================================ 1. 보유 현금 자산: 1,420,800,000,000 KRW (일조 사천이백팔억 원) 2. 물리 인프라 가치: 2,150,000,000,000 KRW (이조 일천오백억 원) 3. 아시아-태평양 데이터 트래픽 점유율: 18.4% (독점 가동 중) 4. 시스템 보안 등급: ABSOLUTE (물리 차단 및 양자 암호화) ============================================================ ```

수치가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갱신되었다. 1조 4천억 원의 자산과 동아시아 트래픽의 18% 장악. 국가나 대기업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직 진서 홀로 구축한 하이테크 제국이었다.

강민희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이례적인 열기가 서렸다.

"법적으로 이 영토는 이제 완벽한 치외법권 지대입니다. 미래온의 가압류 자산을 경매로 낙찰받는 과정에서, 이 공장 부지의 지상권과 지하 매설물 통제권을 영구 소유하는 계약을 완료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이 사유지 안의 통신 장비를 임의로 압수수색할 수 없습니다."

"합법적 방패와 물리적 요새의 결합이군요."

진서가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온도 36.4도.

그는 감정의 동요 없이 냉정하게 시스템의 전원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넥서스 시스템, 가동합니다."

쿠우우웅-!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발전기가 돌아가는 중저음의 굉음이 울렸다. 수만 개의 광케이블 라인을 따라 푸른색 레이저 신호가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세계 지도의 넥서스 노드가 밝게 점등되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로 뻗어 나가는 해저 광케이블의 중심에, 이곳 영종도 넥서스 기지가 붉은색 코어로 우뚝 섰다.

"와……."

노아름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평생 해킹과 크래킹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이토록 거대하고 완벽한 물리적 데이터 요새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떠한 소프트웨어적 침투도 불가능한, 논리적 한계를 초월한 완벽한 닫힌 계(Closed System).

"이건 국가를 초월한 서버네. 법도, 규제도 통하지 않는 진짜 제국이야."

"제국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일 뿐입니다."

진서가 선을 그었다.

"우리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용을 청구합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예외는 없습니다."

정의도, 애국심도 없다. 오직 이성과 실리만이 존재하는 공간. 그것이 진서가 정의한 넥서스의 본질이었다.

그때였다.

삐이-! 삐이-!

제어실 벽면에 설치된 외부 감시 시스템에서 날카로운 적색 경고음이 울렸다. 모니터 한편에 설치된 열화상 센서 화면이 빠르게 깜빡였다.

[경보: 기지 반경 500m 이내 미승인 물리적 접근 감지] - 대상: 특수 차량 24대, 인원 82명 - 진입 속도: 시속 40km - 식별 코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NIS) 극비 전술팀

"온 모양이군요."

강민희의 목소리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그녀는 태블릿을 켜 외부 폐쇄회로 화면을 띄웠다.

영종도 넥서스 기지의 거대한 콘크리트 외벽 정문 앞으로, 칠흑처럼 어두운 무광 철갑으로 도장된 특수 장갑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치고 있었다. 차량 측면에는 어떠한 로고도 없었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군사적 압박감은 명백한 국가 권력의 무력이었다.

장갑차의 문이 열리며 검은색 전술 외투를 입은 사내들이 신속하게 내렸다. 그들의 손에는 전자기 펄스(EMP) 차단 장비와 물리적 파쇄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검은색 코트 깃을 세운 사내. 국가정보원 처장, 한성태였다.

그는 넥서스의 삼중 철조망 너머, 감시 카메라의 렌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벽 너머에 있는 진서를 꿰뚫어 보듯,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한성태가 품 안에서 메가폰을 꺼내 들었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스피커를 찢고 넥서스의 정문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백진서 씨.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무단 통신 인프라 점거 및 국제 해저 광케이블 불법 도청 혐의로 긴급 체포 및 기지 전면 몰수 명령을 집행합니다. 즉시 정문을 열고 투항하십시오. 거부할 시, 국가 비상사태 처분에 의거해 즉각적인 물리적 무력 진입을 개시하겠습니다."

제어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쩌지? 쟤들 진짜로 뚫고 들어오려는 기세인데."

노아름이 마른침을 삼키며 진서의 눈치를 살폈다.

강민희 역시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법률적 방패를 준비했으나, 법을 초월해 무력을 행사하려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폭력 앞에서는 그녀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진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노트북 모니터 구석에 띄워진 또 다른 코드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위성 기반 국가 극비 재난 통제망 마스터 레지스트리] - Status: ACTIVE (Syncing...) - Control Key: 0x7F9A00FF...

8화에서 한성태의 단말기에서 추출해 두었던, 대한민국 모든 통신과 재난망을 일시에 마비시킬 수 있는 절대적 통제 암호 키. 그것이 넥서스의 양자 코어 시스템과 연동되어 붉은빛을 뿜어내며 완벽한 동기화를 마친 상태였다.

진서의 손가락이 엔터키 위에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침입 경로를 탐색하는 물리적 힘에는, 시스템 전체를 인질로 잡는 논리적 파괴로 대응합니다."

진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엔터키를 가볍게 눌렀다.

동시에, 기지 외부의 한성태 일당이 들고 있던 무전기와 장갑차의 내부 전산망이 일제히 먹통이 되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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