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굳이 안 찾아도 내가 이미 알고 있어."
노아름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눈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키보드 위로 툭 떨어졌다.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크래커의 자존심이 찢겨 나간 흔적이었다. 진서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동정심은 연산 장치의 낭비에 불과했다.
"말해."
"차현우…… 그 인간이 오늘 저녁에 움직여. 미래온이랑 손잡고 아시아 요충지에 있는 오프라인 해저 메인 전송망 제어권을 직접 물리적으로 장악하려고 할 거야. 이미 사설 보안 팀이 영종도 해안선 분기점으로 출발했어."
진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현우. 그가 드디어 넥서스의 하드웨어 인프라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 물리적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시간 오후 5시 40분. 해가 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시간이었다.
"노아름. 네가 확보한 미래온의 암호 노선 데이터를 열어라."
"뭐? 하지만 그건……."
"3초 준다."
진서의 건조한 목소리에 노아름은 침을 삼켰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에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의 네트워크 맵이 펼쳐졌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노선들이 아시아 전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진서는 즉시 자신의 시스템을 기동했다. 망막 위에 푸른색 콘솔 창이 겹쳐 올랐다.
[시스템 연결 활성화] [메모리(RAM) 상태: 11.2GB / 16.0GB] [대상: 노아름의 양자 얽힘 백도어 프로토콜 특수 주파수 흔적]
5화에서 노아름이 진서의 코어에 침투할 때 남겼던 미세한 주파수 흔적. 13.4GHz 변조 흔적이 진서의 시스템 라이브러리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진서는 그 특수 주파수의 흔적을 역추적 코드로 변환했다. 노아름이 숨겨둔 암호 노선 데이터의 암호화 키가 순식간에 해독되기 시작했다.
[양자 백도어 잔재 주파수 분석 완료] [암호 해독률: 100%] [미래온 내부 라우팅 테이블 확보]
"어……? 그걸 그렇게 쉽게 푼다고?"
노아름이 경악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품 안에서 소형 드라이브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3화에서 입수했던 자료. 미래온 아시아 지사의 해저 광케이블 신호 감쇠 비율 기록 보고서였다. 종이 문서로 존재하던 그 수치들을 진서는 이미 디지털화해 둔 상태였다.
"감쇠 비율 임계값 대조 시작."
진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보고서에 적힌 1550nm 주파수 대역의 전송 손실 임계값은 0.18 dB/km였다. 하지만 노아름이 제공한 암호 노선 제어 장치의 실시간 수치는 0.22 dB/km를 가리키고 있었다. 0.04 dB/km의 미세한 차이. 일반적인 엔지니어라면 단순한 해저 환경 변화로 치부했을 오차였다. 그러나 진서의 눈에는 명확한 시스템 오류(Bug)로 보였다.
"찾았다."
진서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해저 광케이블의 신호가 미세하게 굴절되며 감쇠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미래온이 아시아 전체 트래픽을 분기하여 감청하고 제어하는 물리적 포인트였다.
| 분석 항목 | 보고서 기준값 | 실시간 측정값 | 편차 (오류값) | | :--- | :--- | :--- | :--- | | 파장 대역 | 1550 nm | 1550 nm | 0.00 nm | | 신호 감쇠율 | 0.18 dB/km | 0.22 dB/km | +0.04 dB/km (이상 신호) | | 물리적 위치 | - | - | 영종도 북서쪽 4.2km 해상 (리피터 #07) |
"영종도 북서쪽 4.2km 해상. 해저 24미터 지점에 위치한 리피터 #07번."
진서가 수치를 읊조리자 노아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기를 알아냈다고 해도 소용없어. 거긴 수중 분기점이라 물리적인 광 스플리터(Optical Splitter)가 설치되어 있어. 내부 코드를 바꾸지 않는 이상 본사에서 제어권을 넘겨줄 리가……."
"바꾼다."
진서가 짧게 잘라 말했다.
"내가 직접."
그는 외투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개인 단말기를 켜고 강민희 변호사에게 보안 통신을 연결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강민희의 냉정한 목소리가 수신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 백진서 씨. 법정 대리인으로서 경고합니다. 지금 움직이려는 행위는 국제 통신망 파손 및 해킹 관련 법률에 저촉될 소지가 큽니다.
"미래온이 먼저 불법 감청용 분기점을 설치했다. 그 증거가 내 손에 있지."
진서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날 고소한다면, 사법 담합과 불법 감청 사실이 먼저 폭로될 거다. 민희 씨가 원하는 법적 도장판을 짜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 아닌가?"
수신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어 강민희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과연. 효율적인 계산이군요. 영종도 해안 일대의 해양경찰 및 군 관할 구역 진입에 대한 법적 면책 서류를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30분 내로 외교부 및 해양수산부의 임시 학술 조사 허가증을 발급시키죠. 비용은 시간당 5천만 원입니다.
"정산서에 청구해라. 승인하지."
통화가 끊겼다. 정이나 신뢰 따위는 배제된, 철저한 실리적 거래. 이것이 진서가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
오후 6시 20분. 영종도 인근의 사설 선착장. 차가운 바닷바람이 진서의 뺨을 때렸다. 하늘은 이미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서는 노아름이 제공한 위치 좌표를 바탕으로 소형 고속 보트에 탑승했다. 수중 디버깅 장비를 탑재한 특수 보트였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어두운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다.
"저기…… 진짜로 하려는 거야?"
노트북 화면 속에서 노아름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지트에서 원격으로 진서의 시스템 신호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너 그러다가 미래온 본사 방화벽에 걸리면 즉시 역추적당해. 아시아 센터 전체가 네 신호를 차단할 거라고!"
"그들이 차단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납치한다."
진서는 보트 키를 고정하고 선실 내부의 메인 콘솔 앞으로 다가갔다. 노트북을 열자, 해저 24미터 아래에 누워 있는 두꺼운 광케이블의 물리적 신호가 화면에 파형으로 그려졌다. 리피터 #07.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신호의 주파수가 진서의 망막에 소스코드로 치환되어 나타났다.
[리얼리티 디버거 구동] [물리 영역: 광섬유 내부 전반사 신호 (1550nm)] [코드 분석 중……]
```cpp void Optical_Repeater_07() { float signal_strength = 1.0f; string routing_destination = "MIRAE_ON_ASIA_CENTER"; bool physical_encryption = true; // BUG: 외부 광 분기 결합으로 인한 신호 누수 발생 if (leakage_detected) { signal_strength -= 0.22f; } } ```
진서의 눈앞에 선명한 붉은색 오류 코드가 깜빡였다. 미래온이 불법적으로 트래픽을 빼돌리기 위해 조작해 둔 코드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
[경고: 뇌 연산 장치(RAM) 과부하 위험] [현재 점유율: 89%] [디버깅 실행 시 일시적 인지 장애 및 단기 기억 상실 발생 가능] [최적의 연산 비용 계산 중……]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시야가 흐려지며 주변의 사물들이 이중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단기 기억 장치가 흔들렸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펜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진서는 차가운 콘솔 금속판에 손을 대며 손목시계의 온도를 확인했다. 기기 온도 36.5도. 정상. 그는 자신의 감정 영역을 억누르며 가장 효율적인 비용의 코드를 설계했다. 전체 코드를 다시 쓰는 대신, 포인터의 주소값 딱 한 줄만 변조하는 방식. 최소한의 연산으로 최대의 파괴력을 내는 디버깅이었다.
`routing_destination = "NEXUS_CORE_01";`
단 한 줄의 수정. 진서가 엔터 키를 눌렀다.
[디버깅 적용 완료] [메모리(RAM) 점유율: 94% -> 72% (안정화)] [물리적 광신호 경로 재설정 완료]
그 순간, 해저 깊은 곳에서 흐르던 무수한 빛의 입자들이 방향을 틀었다. 아시아 전역의 금융, 물류, 통신 데이터가 흐르는 해저 광케이블의 메인 라우팅 경로가 미래온 아시아 센터가 아닌, 진서가 구축한 넥서스의 독점 데이터 서버로 강제 납치(BGP Hijacking)되기 시작했다.
수백억 명의 유저가 발생시키는 초당 수십 테라바이트의 트래픽이 단 수초 만에 진서의 발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무전 동력, 무혈입성. 물리 단에서의 완벽한 지배였다.
***
같은 시각. 서울 강남에 위치한 미래온 아시아 통합 관제 센터.
"주 서버 연결 끊김! 포트 80, 443 차단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백업 라인 돌려!"
"백업 라인도 안 먹힙니다! 물리적으로 신호가 가출했습니다! 수신 신호 레벨(Rx)이 0입니다!"
관제실 전체가 시뻘건 경고등으로 뒤덮였다.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이 키보드를 부서져라 두드렸지만, 모니터에 뜨는 것은 오직 하나의 메시지뿐이었다.
[Connection Timeout] [Connection Timeout]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단상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래온 아시아 지사장이 안경을 벗어 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시아 전역의 트래픽이 증발했다. 일본, 중국, 싱가포르를 잇는 메인 허브 라인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장애가 아니었다. 누군가 해저에 있는 물리적인 광신호 자체를 통째로 가로채 다른 곳으로 흐르게 만들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로그 분석해! 당장!"
"그게…… 로그가 남지 않습니다! 신호 자체가 저희 센터를 우회해서…… 다른 목적지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야?!"
엔지니어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미래온의 IP 대역이 아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정체불명의 암호화된 도메인이 박혀 있었다.
[NEXUS.CORE.SECURE]
"말도 안 돼……."
지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단 몇 분 만에 미래온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아시아 네트워크 망이 완벽하게 마비되었다. 본사 주 서버의 제어 포트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다운되며 시커먼 화면으로 변해갔다.
***
보트 위. 진서는 노트북 화면에 떠오르는 실시간 자산 변동 내역을 건조하게 바라보았다.
[경영 대장 시스템 반영 완료]
| 자산 항목 | 이전 상태 | 현재 상태 | 변동 수치 | | :--- | :--- | :--- | :--- | | 물리 인프라 | 미확보 | 아시아 해저 광케이블 제어권 | 독점적 물리망 확보 | | 일일 트래픽 수익 | 0원 | 약 142억 원 / 일 | 일시적 대폭 상승 | | 미래온 시장 지배력 | 91% | 42% | -49% (폭락) |
"성공…… 한 거야?"
노아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녀의 눈에 가득했던 불안감은 이제 경외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단 한 명의 개발자가, 거대 기업 미래온의 생명줄을 물리적으로 끊어버리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것이다.
진서는 대답 대신 보트의 기수를 돌렸다. 멀리 영종도 해안가에 미래온의 사설 보안 팀 차량들이 경광등을 켠 채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해저의 광신호는 이미 넥서스의 영토로 완전히 이관된 후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철수한다."
진서가 보트의 스로틀을 당겼다. 차가운 밤바다를 가르며 보트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
오후 8시. 진서의 임시 사무실. 사무실 내부의 대형 모니터들이 일제히 붉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미래온 본사 망이 완전히 대파되었음을 알리는 시스템 알람이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드는 트래픽 폭동을 견디지 못한 미래온의 중앙 인증 서버가 과부하로 터져버린 것이다.
위이이잉-!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진서의 개인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에 발신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차현우]
진서는 단말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즉시 문자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 백진서.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나? - 당장 신호 원상복구해. 그렇지 않으면 국가 안보 위반으로 네놈의 모든 자산을 동결시키겠다. - 지금 당장 내 비서의 호출에 응해라. 마지막 경고다.
진서의 눈동자에 이성적인 냉소 가 서렸다. 국가 안보라는 허울 좋은 무기를 꺼내 들 차례인가. 그때, 진서의 시스템 모니터 구석에 또 하나의 파란색 알림창이 조용히 깜빡였다.
8화에서 한성태의 단말기에서 탐지했던 극비 데이터. 정부 정보기관이 관리하는 위성 기반 극비 재난 통제망의 마스터 레지스트리 유출 흔적이, 미래온의 붕괴된 방화벽 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진서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차현우의 협박 뒤에 숨겨진, 국가 권력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