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안 카르디안이 누구기에, 내가 그를 기억해야만 하는가?”
아델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지독하리만치 무색무취했다. 집무실의 촛불이 미풍에 흔들려 그녀의 라벤더빛 실크 드레스 위로 복잡한 기하학적 음영을 드리웠다. 은사로 흐드러지게 수놓아진 에브리트 가문의 가시나무 문양만이 그녀의 차가운 권위를 대변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오열하던 보좌관 엘리아스 밴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의 손에 쥐인 수첩의 가죽 표지가 땀과 눈물로 얼룩져 눅눅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마님…… 정녕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자가 마님께 저지른 그 수많은 모욕과, 회귀 전 마님이 흘리셨던 그 피눈물을…… 전부 잊으신단 말입니까?”
“엘리아스.”
아델라는 실크 스커트락을 우아하게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거리는 원단 마찰음이 고요한 집무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서서, 바닥에 엎드린 보좌관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제 가치를 다한 감정을 품에 안고 우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행위는 없습니다. 증오든 원망이든, 그것이 내 영지의 결계를 강화하는 동력원으로 쓰였다면 그것으로 제 몫을 다한 것이지요.”
“하지만 영혼이…… 마님의 자아가 닳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구차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내가 쥐고 있는 힘과 이 영지의 안위입니다.”
아델라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탁상 위에 놓인 어두운 청색의 벨벳 망토를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쳤다. 금장 버클이 단단하게 맞물리는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가시지요. 광산으로 갈 시간입니다.”
엘리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델라의 옆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만년설로 뒤덮인 빙산처럼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먹을 쥔 그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에브리트 영지의 북쪽 장벽 너머, 깊은 산맥의 품에 안긴 지하 광산은 지독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횃불의 붉은 불꽃이 축축한 동굴 벽면을 비출 때마다, 사방에서 밤의 보석처럼 짙은 광택을 내뿜는 흑요석 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제국의 그 어떤 광업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에브리트 가문만이 대대로 비공식적으로 관리해 온 은밀한 성지였다.
아델라의 부츠 굽이 거친 바위 바닥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동굴 내부로 길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엘리아스와 정예 마법사들의 숨소리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이곳이로군요.”
아델라가 거대한 공동(空洞)의 중심부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흑요석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제단의 중앙에는, 오래전 첩자의 문서에서 단서로 발견했던 고대 에테르 핵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거친 원석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그 표면 아래로 흐르는 마력의 파동은 마치 거대한 거인의 심장박동처럼 묵직하고 은밀하게 대지를 흔들고 있었다.
제국 학회조차 그 존재를 전설로만 치부하던 고대 에테르 맥의 심장부. 이것이 바로 아델라가 준비한, 에브리트 영지를 제국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할 영구적 마탑의 쐐기였다.
“마님, 정말로 이 핵을 깨우실 생각입니까?”
엘리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 규모의 고대 마력을 가동하고 우리 결계와 동조시키려면, 에테르 회로의 역설이 요구하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단순한 기억의 파편 수준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아델라는 제단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빛났다.
“황실의 특사들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황태자에게 보고를 올리고, 제국 학회가 이 영지를 억누르기 위해 정식 군대를 파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지요. 어설픈 결계로는 그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망토를 벗어 던졌다. 얇은 실크 드레스 차림의 아델라가 두 손을 뻗어 차가운 에테르 핵 표면에 가만히 얹었다.
“에브리트를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무결한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내 머릿속의 무용한 찌꺼기 따위는 몇 번이고 불태울 수 있습니다.”
“마님……!”
“의식을 시작합니다. 모두 뒤로 물러서서 마력의 역류에 대비하세요.”
단호한 명령에 마법사들은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서둘러 방어 마법식을 전개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직 엘리아스만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델라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에테르 회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은빛의 마력 줄기가 혈관을 타고 뻗어 나가 손끝으로 몰려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지배하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강렬한 역설의 법칙이 가동되었다.
[동력원을 제시하라.]
차가운 마법의 법칙이 그녀의 뇌리를 때렸다.
아델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기억 보관함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진득하며, 가장 깊은 감정의 덩어리를 찾아냈다.
그것은 율리안 카르디안이라는 남자를 향해 품었던 마지막 마음의 조각들이었다.
전생의 비참했던 결혼 생활 속에서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일말의 미련. 회귀 직후 그를 향해 불타올랐던 격렬한 증오와 배신감. 그리고 아주 오래전, 그가 자신을 보며 처음으로 부드럽게 웃어 주었을 때 심장이 부르르 떨렸던 그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연애 시절의 감정 편린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엉켜 있는 거대한 감정의 뿌리였다.
‘가져가라.’
아델라는 냉정하게 마음속의 끈을 놓아버렸다.
순간, 영혼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그녀의 전신을 덮쳤다. 아델라의 고운 미간이 좁아졌고, 하얀 입술 사이로 신음 대신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화르륵!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불꽃이 머릿속에서 타올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던 율리안의 미소가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 그의 품에서 느꼈던 온기, 그에게 상처받아 밤새 눈물 흘렸던 기억들이 차례로 백색의 광원으로 치환되어 에테르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소각 과정이었으나, 아델라의 이성은 그 고통마저도 냉철하게 관조하고 있었다.
‘더 깊이, 더 완전히 태워라.’
마침내 마지막 남은 애정의 연결고리마저 순수한 마력의 불꽃으로 산화하는 순간, 아델라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은색의 마력이 고대 에테르 핵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우우우웅!
광산 전체가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제단 위의 고대 핵이 눈이 멀 것 같은 은빛 광채를 뿜어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광산 벽면에 뻗어 있던 흑요석 광맥들이 일제히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신비로운 빛을 내며 요동쳤다.
지하 깊은 곳에서 시작된 마력의 파동은 대지를 뚫고 올라가, 에브리트 영지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제국 학회가 규정한 그 어떤 마법 체계와도 궤를 달리하는, 완전히 독립된 주파수의 마법이었다. 제국 학회의 감시망과 통제 마법식들이 에브리트의 장벽에 닿는 순간, 우아하면서도 가차 없이 튕겨 나갔다.
쉬이이익!
영지의 하늘 위로 장엄한 은빛의 반구형 결계가 수려하게 펼쳐졌다. 그 어떠한 물리적 기습도, 고위 마법의 저주도 통과할 수 없는 완벽한 요새의 탄생이었다.
제국 학계의 인가나 황실의 공인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제 에브리트는 그 자체로 세상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독립 마탑 요새로 거듭난 것이다.
아델라는 천천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전에 없던 맑고 투명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평온함.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찾아볼 수 없는 무결한 이성의 상태.
“성공이군요.”
아델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판을 걷듯 서늘했다.
엘리아스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영지를 감싸 안은 은빛 결계의 위용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눈앞에 선 여주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선 이제 인간적인 고뇌나 슬픔의 잔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범접할 수 없는 군주로서의 지배력만이 오롯이 풍기고 있었다.
“마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엘리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끝에 남아 있는 마력의 잔열은 따뜻했으나, 가슴속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아주 가볍군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불필요한 소음들이 말끔히 사라진 기분입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벨벳 망토를 우아하게 주워 올려 어깨에 걸쳤다.
“올라가지요. 영지민들에게 결계의 완성을 선포해야 합니다.”
***
광산 출구로 이어지는 석조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아델라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하늘은 영지를 뒤덮은 은빛 결계의 영향으로 옅은 은색 잔상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영지민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경외심에 가득 찬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델라가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광산 출구 옆, 가시나무 덤불이 우거진 그늘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율리안 카르디안이었다.
그의 행색은 대공이라는 고귀한 신분에 걸맞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늘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금발은 거친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제국의 최고급 실크로 재단된 그의 코트 자락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급히 달려온 듯했다. 그의 숨결은 가빴고, 두 눈은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아델라…….”
율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그의 구두가 마른 가시나무 가지를 밟아 툭 부러뜨리는 소리가 심란하게 울렸다. 그의 손은 허공에서 방황하듯 움켜쥐어졌다.
율리안은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영혼 깊은 곳과 연결되어 있던 희미한 끈이 완전히 끊어져 나갔음을. 비록 아델라가 자신을 밀어내고 파혼을 선언했을지언정, 그녀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자신에 대한 감정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는 절박한 눈빛으로 아델라의 얼굴을 살폈다.
상처받은 눈빛, 혹은 자신을 향한 분노나 원망의 기색이라도 좋았다. 아주 작은 감정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며,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나 아델라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율리안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하고 맑아서, 도리어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어떠한 기억도, 어떠한 감정의 파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율리안은 그저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잎이나,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아델라, 제발…… 나를 그렇게 보지 마라.”
율리안의 목소리가 비참하게 갈라졌다.
“나를 미워해도 좋다. 내게 욕을 하고, 평생 원망하며 살아가도 좋으니…… 제발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를 기억해다오…….”
오만하기 그지없던 대공이, 제국의 정점에 서 있던 남자가 비굴할 정도로 몸을 굽히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 처절한 굴복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예의 바르고 차가운 영주의 태도로, 스쳐 지나가는 불청객에게 하듯 가볍게 목례를 건넸을 뿐이다.
“대공 전하께서 이 누추한 광산 앞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용무가 있으시다면 집무실로 정식 절차를 밟아 방문해 주시지요.”
그녀의 말투는 지극히 정중했으나, 그렇기에 더욱 잔인했다. 그것은 완전한 타인에게만 건넬 수 있는 완벽한 거리감이었다.
“아델라……!”
율리안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
스윽.
아델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의 라벤더빛 실크 스커트가 그의 부츠 끝을 스치며 차갑게 흘러지나갔다.
그녀는 단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이,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영지민들과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광장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어두운 청색 망토를 휘날렸고, 은빛 결계의 빛이 그녀의 어깨 위로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녀는 이제 완벽한 자립을 이룬 마탑의 주인이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지배자였다.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은 채 굳어 버린 율리안 카르디안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눈가로 흘러내린 눈물이 먼지 묻은 뺨 위에 길게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그 비참한 후회의 가치는, 이미 아델라의 세계에서 완전히 소각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