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대지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흑요석 절벽을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다.
광산 출구에 감돌던 무거운 침묵 사이로, 비참하게 갈라진 사내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율리안 카르디안의 손끝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은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바로 아래로, 아델라의 짙은 청색 사파이어빛 벨벳 드레스 자락이 스치듯 멀어졌다. 차가운 은빛 결계의 맥박이 그녀의 어깨 위로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으나, 그 빛은 율리안에게 단 한 줌의 온기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아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에는 오직 길게 뻗은 영지의 전경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한때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했던 애증의 대상, 그 비참하고 오만한 전남편의 얼굴은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각되어 가벼운 먼지처럼 흩어졌다. 에테르 회로의 역설. 영혼의 기억을 땔감 삼아 최고위 마력을 정제하는 금기의 비술은 그 대가로 율리안에 대한 모든 흔적을 가장 먼저 앗아갔다.
“아델라……!”
등 뒤에서 바스러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 정서적인 파동은 그녀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보다도 무가치했다. 아델라는 예의를 갖춘 차가운 영주의 미소조차 거둔 채, 자신을 기다리는 마법사들과 영지민들이 모여 있는 광장을 향해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은실로 촘촘히 자수를 놓은 드레이프 실크 스커트가 대리석 바닥을 쓸며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 * *
사흘 뒤, 에브리트 영주 저택의 집무실.
황금빛 테두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백자 찻잔에서 베르가모트 향이 섞인 쌉싸름한 얼그레이 홍차의 온기가 피어올랐다. 아델라는 마호가니 책상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창밖으로 보이는 영지의 장벽을 응시했다.
그녀의 곁에는 가문 비서실의 집행관이자 충직한 보좌관인 엘리아스 밴스가 두꺼운 양장본 기록서를 펼쳐 든 채 서 있었다. 깃펜 끝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오늘도 기록을 남기시는군요, 엘리아스.”
아델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기복도 없었다.
“예, 마님. 마님께서 잃어버리는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 책에 새겨두는 것이 제 임무이니까요.”
엘리아스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그의 꽉 쥔 반대쪽 주먹에는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매일 아델라의 영혼이 마멸되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감시자이자 슬픈 기록자였다.
“지하 광산의 흑요석 맥에 잠들어 있던 고대 에테르 핵이 완벽하게 가동되었습니다. 마님께서 바치신... 어떤 강렬한 사념 덕분이었지요. 덕분에 영지 전체를 덮은 실버 배리어의 출력은 제국 학회의 그 어떤 결계보다도 완벽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마님께서는 카르디안 대공의 가문 문양이 무엇인지 오늘 아침 잊으셨습니다.”
“겨우 그런 사소한 문양 따위야.”
아델라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적셨다. 쓴맛이 혀끝을 자극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내 머릿속의 쓸데없는 낙서들을 지워내고 얻은 힘이 이 영지를 철옹성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지극히 남는 장사예요. 기억이란 결국 과거의 유령일 뿐이니까.”
3화에서 첩자의 비밀 문서로부터 단서를 얻었던 그 전설의 고대 에테르 핵.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 거대한 마력원이 마침내 완전한 빛을 발하며 에브리트의 심장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델라가 율리안을 향한 마지막 미련을 송두리째 에테르 회로에 태워 바친 결과물이었다.
그때, 책상 위의 은제 통신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붉은 마력석이 깜빡이며 제국 수도 방향에서 전송된 긴급 전보를 뱉어냈다.
엘리아스가 서둘러 양필지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대공가에서 보낸 긴급 전보입니다. 율리안 대공이 사흘 전 마님을 뵌 직후, 극심한 고열과 자책감으로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소생이 불투명할 정도의 혼돈 속에서도 정신을 차릴 때마다 이 전보를 전하라며 비서관들을 윽박질렀다고 하는군요.”
“내용이 뭐죠?”
아델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태자 레오나르드가 마탑을 무력으로 찬탈하기 위해 직접 이끄는 5만의 정예 결사군을 조직했습니다. 이미 북상을 시작했으며, 선발대는 중부 평원을 통과해 이틀 내로 영지 경계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 * *
엘리아스는 전보지와 함께 두꺼운 밀랍 봉인이 찍힌 가죽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카르디안 대공가의 상징인 흑독수리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대공이 보낸 또 다른 서류입니다. 자신의 가문 직속 호법병력인 ‘아이언 쉴드’ 기사단을 에브리트 영지 경계에 무상으로 배치하겠다는 군사 원조 제안서입니다. 마님의 동의만 있다면, 대공가의 군세가 황실군의 길목을 가로막아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고...”
아델라는 서류철을 손끝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종이 표면에는 글씨를 쓴 이의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짐작하게 하는 거친 잉크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제발 내 도움을 받아다오. 네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비굴하고도 처절한 애원이 문장 마디마디마다 묻어나는 듯했다.
아델라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비틀렸다. 사교계의 가시 돋친 장미처럼, 날카롭고도 탐미적인 조롱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소롭군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파이어빛 벨벳 드레스가 바닥을 쓸며 기품 있는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집무실 한구석에서 붉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대리석 화로 앞으로 걸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그녀의 고결한 옆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타인의 불쌍한 호의에 기대어 목숨을 연명하는 것만큼 영주의 자격에 어긋나는 짓은 없어요. 더군다나 그 호의의 배후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마님, 하지만 5만의 대군을 상대로...”
“엘리아스. 남에게 방패를 빌리는 순간, 그 방패를 쥔 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법이에요.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그늘 아래서 숨 쉬는 가련한 인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스윽.
아델라는 주저 없이 카르디안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서류철을 불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순식간에 불꽃이 가죽을 집어삼키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율리안 카르디안이 자신의 마지막 권력과 목숨을 깎아 만들어낸 구걸에 가까운 구원책이,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화로 속으로 사라졌다. 타들어 가는 종이의 잔해가 붉은 불꽃 속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델라의 눈에는 단 한 줄기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구절절한 감정에 기댄 연대 따위는 사양하겠어요. 에브리트의 성벽은 에브리트의 힘으로만 지킵니다. 대공에게는 기사단 한 명조차 영지 경계를 넘지 말라고 전하세요. 만약 넘는다면, 황실군과 똑같은 침략자로 규정하고 포격을 가할 테니까.”
엘리아스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완전히 소멸한 제안서를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어떤 감정적 부채도, 과거의 사슬도 지니지 않은 완벽한 독자 노선의 지배자였다.
* * *
“하지만 황태자 레오나르드가 움직인 힘의 규모가 심상치 않군요.”
아델라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손바닥을 허공에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푸르스름한 마력의 실타래가 뿜어져 나오더니, 집무실 중앙에 거대한 입체 마법 투영도가 펼쳐졌다. 그것은 에브리트 영지의 심장인 에테르 핵과 연결된 실시간 감시망이었다.
“에테르 하트의 주파수를 넓히세요. 제국 남부의 마력 흐름을 추적하겠습니다.”
그녀가 마력을 주입하자, 투영도 위에 붉은색과 금색의 마력 파동이 어지럽게 뒤엉키며 수도 부근의 상황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에테르 회로의 절대적인 감지력은 불가능해 보이던 제국 전역의 마력 흐름까지 투시해 내고 있었다.
아델라의 차가운 눈동자가 투영도의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대공가의 수도 금고가 위치한 좌표였다.
그곳에서 거대한 규모의 은밀한 마력 이동과 자금의 흐름이 포착되고 있었다.
“이것 보라지.”
아델라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대공가의 금고가 마치 구멍 뚫린 독처럼 털리고 있군요. 이 막대한 양의 고대 마도 광석과 군수 물자들의 행방이... 황태자의 결사군 캠프로 향하고 있어요.”
엘리아스가 투영도를 들여다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대공가의 허가 없이 이루어지는 도용입니다. 대공이 병석에 누워 있는 틈을 타서 누군가 내부에서 금고의 열쇠를 넘겨준 것이 분명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소피아 카르디안이겠지요.”
아델라의 목소리에 차가운 독기가 실렸다.
“그 교활한 불여우가 황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공가의 자산을 통째로 갖다 바치고 있는 겁니다. 황태자비라는 허울 좋은 자리를 탐내며 제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 적의 군장비를 마련해주다니, 참으로 어울리는 종말이군요.”
소피아는 아델라가 회귀하기 전 그녀를 고립시키고 파멸로 몰고 갔던 주범이었다. 변해버린 아델라의 힘 앞에 비굴하게 엎드렸던 그녀가, 결국 권력을 쥐기 위해 황태자의 사냥개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아델라는 소피아의 움직임을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그 흘러가는 군수 물자들의 마력 파동 속에서, 5화에서 사절단이 소지하고 있던 기분 나쁜 검은 기운이 다시 한번 감지되었다.
‘라그나의 쐐기.’
황실이 에브리트의 은빛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 준비한 금기의 마도구. 그 어두운 기운이 황태자의 본대 중앙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결국 그 쐐기를 들고 오는군요. 결계를 찢어발기겠다는 의지가 아주 가상해요.”
아델라는 손을 가볍게 휘저어 투영도를 지워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 대신, 가차 없는 처단을 앞둔 포식자의 여유만이 감돌았다.
* * *
“전투 배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영주 저택의 대회의실. 에브리트 영지의 수뇌부와 마법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아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라는 지휘봉을 들어 에브리트 영지의 험준한 계곡과 요새 장벽이 그려진 지도 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방 안의 모든 소음을 압도했다.
“황실군의 숫자는 5만입니다. 우리 영지의 방어 병력은 마법사와 민병대를 합쳐 만 명이 채 되지 않지요. 하지만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이 좁고 험난한 북부의 협곡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휘봉 끝으로 제1협곡과 제2요새 장벽 사이의 공간을 정확히 분할했다.
“제1 장벽의 전면부는 비워둡니다. 적들이 우리 영지에 쉽게 진입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들이 협곡의 가장 좁은 병목 구간인 ‘철벽의 고리’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을 격리합니다.”
“하지만 마님, 그만한 대군을 가두려면 엄청난 마력이 필요합니다.”
수석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아델라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하 광산의 에테르 핵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이미 영지의 모든 방어탑과 마법 장벽은 무한한 에테르 마력으로 충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것은 일반적인 방어 마법이 아닙니다.”
그녀가 지도의 특정 좌표를 짚었다.
“이 네 곳의 고지대에 새로 제작한 ‘화염 대포’를 배치하세요. 에테르 핵에서 직접 마력을 공급받는 이 대포들은 제국 학회의 마도포보다 사거리가 세 배는 더 깁니다. 적들이 협곡에 갇히는 순간, 하늘에서 불비가 내릴 것입니다.”
아델라의 전술은 치밀하다 못해 잔혹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녀는 지형의 고저 차이, 바람의 방향, 심지어 황실군이 보유한 마도 갑옷의 금속 성질까지 고려하여 마법의 속성을 정밀하게 조정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자(死者)의 진형 배치를 들으며, 지휘관들은 침을 삼켰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제국의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장을 지배하는 완벽한 군주이자, 스스로가 거대한 마탑 그 자체였다.
“각자 지시받은 위치로 이동하세요. 이번 전투로 제국에 똑똑히 각인시켜 주겠습니다. 에브리트는 더 이상 그들의 영토가 아니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영주 마님을 위하여!”
지휘관들이 일제히 가슴에 검을 대며 경례를 올렸다. 그들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대신, 압도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과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 * *
이튿날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에브리트 영지의 최전방 전초 기지.
아델라는 가볍고 질긴 가죽 방어구를 덧댄 암청색 망토를 걸친 채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불어오는 새벽바람에 그녀의 길고 어두운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녀는 성벽 위에 설치된 감지 마법진의 작동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 표면을 타고 흐르는 은빛 에테르 마력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뇌리로 전해졌다.
그때, 감지 마법진의 룬 문자들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지직!
붉은색 경고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튀었다. 성벽 아래의 대지가 미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만 명의 발걸음과 거대한 철제 바퀴들이 대지를 짓누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아델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안개 너머, 강을 건너 영지 경계로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철의 장막이었다.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사자 깃발이 피비린내 나는 바람에 펄럭였고, 그들의 전면에는 거대한 괴수처럼 생긴 마도 대포 수십 문이 포신을 치켜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세의 중심부, 새까만 마력을 뿜어내며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쐐기 모양의 마도구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에브리트의 은빛 장벽을 향해 조준되고 있었다.
황실 연합군의 총공세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