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지하 하수 감옥의 축축한 바닥에서부터 기괴하고 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루퍼트 백작이 입안에서 깨트린 역마법 유발석—소피아가 건넸던 그 불온한 결정체는 에브리트 영지의 마력 맥을 물어뜯기 위해 핏빛 아가리를 벌렸다. 쇠창살 틈새를 비집고 나온 역마법의 독소는 차가운 대리석 벽을 검붉게 부식시키며, 영지의 젖줄인 지하 급수관과 비옥한 농지를 향해 독사처럼 기어갔다. 에브리트의 심장부를 오염시키려는 비열한 황실의 수작이 어둠 속에서 마침내 고개를 든 것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 시작된 이종(異種) 마력의 파동은 지상으로 뻗어 나가며 대지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흐르던 급수관의 물이 불길한 자색으로 물들었고, 갓 싹을 틔운 밀밭의 잎사귀들이 검게 타들어 가며 툭툭 꺾였다. 영지의 경계를 지키는 결계석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영주 성의 집무실.
아델라는 창밖으로 보이는 영지의 하늘이 기괴한 자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싼 짙은 밤하늘을 닮은 인디고 블루의 실크 드레스가 움직일 때마다 차갑게 일렁였다. 자락마다 은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초승달 문양은 사교계의 그 어떤 드레스보다도 고고하고 오만한 기품을 풍겼다.
그녀는 손에 든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찻잔 안에서 붉게 우러난 블러드 오렌지 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보좌관 엘리아스 밴스가 들이닥쳤다. 평소의 냉철함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지하 감옥에 가둔 황실 사절단 놈들이 수작을 부린 모양입니다! 정체불명의 역마법 독소가 지하 급수관을 타고 북부 농지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사흘 안에 영지 내의 모든 작물이 고사하고, 영지민들의 식수마저 오염될 것입니다!”
엘리아스는 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으나, 아델라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스듬히 조롱 섞인 미소를 걸쳤다.
“황태자의 사냥개들이 제법 발악을 하는군요. 제 목숨을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더러운 침을 흘리는 꼴이라니.”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드레이프 실크 드레스가 바닥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그 순간, 아델라의 뇌리에 날카로운 이명이 스쳤다. 에테르 회로가 격렬하게 공명하며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남쪽 결계의 가장자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결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시도하고 있었다.
아델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이 불쾌하고도 익숙한 마력의 파동.
‘율리안 카르디안.’
그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손 끝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의 실을 따라가, 결계를 뒤흔드는 진원지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식장에서 미련 없이 던져 부수었던 카르디안 가문의 상징 펜던트 조각이었다. 그 부서진 파편 속에 숨겨져 있던 마력 추적석이 지금 율리안의 손에서 공명하며 결계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하려 들고 있었다.
“어리석기도 하지.”
아델라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전생의 그녀였다면 그가 자신을 찾아오기 위해 가문의 가보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에 가슴아파하거나 흔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아델라에게 그것은 그저 사유지를 침범하려는 잡상인의 조잡한 열쇠패에 불과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허공을 쥐었다. 푸른 마력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실타래처럼 엉켰다.
“그렇게 연결되고 싶다면,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요.”
아델라는 에테르 회로를 역방향으로 비틀어, 추적석의 공명 주파수를 가차 없이 과부하시켰다. 역류된 고밀도의 순수 마력이 연결 통로를 타고 반대편을 향해 폭발적으로 밀려 들어갔다.
콰아아앙!
멀리 영지 경계 너머, 숲속에서 율리안 카르디안의 비명이 대기를 찢었다. 율리안의 손바닥 안에서 펜던트 파편이 끔찍한 열기를 뿜으며 폭발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마도구는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 재가 되었다.
그는 고통보다도 더한 절망감에 비틀거리며 부르르 떨리는 손을 쳐다보았다. 아델라가 자신과의 마지막 연결 고리마저 이토록 무자비하게 짓밟아 발파해 버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아델라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비명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손을 털었다.
“벌레 한 마리는 쫓아냈고. 이제 뒤처리를 해야겠군요.”
그녀가 제단이 있는 마탑 중심부로 향하자 엘리아스가 조급하게 뒤를 따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실의 정화 마법사들을 수소문해 와야 합니까? 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농지는 이미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그 비겁한 학회 놈들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는 없습니다, 엘리아스.”
아델라는 제단 중앙에 우뚝 섰다. 그녀의 발밑에서 에테르 회로가 거대한 원형을 그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차갑고도 찬란한 청백색의 마력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대지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영지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정화 마법이 필요했다. 과거 제국 황립 학회의 수석 정화사들조차 수십 명이 모여 며칠을 기도해야 겨우 발현하던 ‘황실 수석 정화 기법’. 아델라는 회귀 전, 황실의 서고에서 훔쳐보았던 그 금기이자 극비의 마법식을 머릿속에서 이끌어냈다.
하지만 대가가 필요했다. 영지 전체를 정화할 초월적인 마력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영혼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위이이잉—!
에테르 회로가 거칠게 회전하며 그녀의 기억 보관함을 헤집었다. 회로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차 없이 율리안 카르디안과 관련된 기억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회귀 전, 그들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 날의 기억이었다.
오만하고 차갑던 율리안이 처음으로 그녀를 위해 온 정원을 하얀 장미로 가득 채우고, 서툰 몸짓으로 그녀에게 직접 만든 화관을 씌워주었던 날. 아델라가 그의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평생 그만을 사랑하겠노라 속삭였던 그 찬란하고 따스했던 봄날의 환희. 처참하게 버림받기 전까지 그녀를 지탱해주었던 가장 소중했던 인생의 한 조각.
‘아…….’
기억이 에테르의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가 싶더니 이내 얼음처럼 차가운 무(無)의 감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하얀 장미의 향기도, 남편의 다정했던 눈빛도, 가슴을 터뜨릴 것 같던 그날의 설렘도 전부 gray ash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고통에 아델라는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갑고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발현(發顯).”
그녀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주문이 떨어졌다.
쿠르릉!
순식간에 에브리트의 하늘이 뒤집혔다. 자색의 오염된 구름이 걷히고, 은백색의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찬란한 빛을 머금은 정화의 비가 대지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투두둑.
은빛 빗방울이 닿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지하 급수관을 흐르던 검붉은 독소는 정화비의 기운에 녹아내려 맑고 투명한 청정수로 되돌아갔다. 검게 타들어가던 농지의 밀 이삭들이 빗물을 마시자마자 생기를 되찾았다.
아니, 정화비에 스며든 고밀도의 에테르 마력은 단순한 정화를 넘어 대지에 폭발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시들어 가던 작물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황금빛 이삭을 터뜨리며 대풍작의 징조를 보였다.
“오, 신이시여! 마탑주님 만세!”
“대지가 살아났다! 농작물이 전보다 더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광장에 모여 비를 맞던 영지민들이 무릎을 꿇고 환호성을 질렀다. 황실이 파멸시키려 했던 영지가, 오히려 아델라의 손끝에서 쏟아진 기적 같은 비로 인해 전무후무한 농업적 축복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황실의 맹독 투하를 비웃듯 완벽하게 무위로 돌려버린 가차 없는 반격이었다.
그때, 영지 경계의 초소에서 급한 전령이 달려왔다.
“마, 마님! 카르디안 대공가에서 보낸 거대한 수송 마차 행렬이 영지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엘리아스가 눈을 크게 뜨며 아델라의 눈치를 살폈다.
“수송 마차라고?”
“예, 대공가에서 영지의 오염 소식을 듣고 급히 조달한 최고급 호밀과 구호 식량, 그리고 오염을 치료할 정화 약초들이 가득 실려 있다고 합니다. 대공의 직속 상단주가 마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아델라는 정화비를 맞으며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동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무관심만이 서려 있었다.
“카르디안 대공이 식량을 보냈다라.”
그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 남부의 오만한 대공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이런 자선을 베푼단 말인가요? 황실과 한패가 되어 우리 영지를 교란하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타이밍에 식량을 보내올 리가 없지요.”
“하지만 마님, 대공께서는 정말로 마님을 돕기 위해…….”
“엘리아스.”
아델라의 차가운 눈길이 보좌관에게 닿았다. 엘리아스는 즉시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적의 수장이 보낸 물건은 물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가 보낸 순수한 구호 식량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우리 영지를 유혹하고 방심하게 만들려는 ‘뇌물’이자 기만책입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털어냈다.
“그 식량들은 전부 압류하세요. 우리 영지의 국고로 귀속시키고 영지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것입니다. 적이 던져준 미끼를 역으로 삼켜 영양분으로 쓰면 그만이니까요.”
“그럼 수송을 맡아온 대공가의 상인들과 호위 기사들은 어찌할까요?”
“그 비열한 첩자들을 내 땅에 단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무기를 빼앗고, 수송 마차에서 끌어내려 즉시 영지 밖으로 추방하세요.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마탑의 결계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려도 좋습니다.”
아델라의 단호하고 가차 없는 명령에 엘리아스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율리안 카르디안이 그녀를 돕기 위해 전 가문의 역량을 끌어모아 밤낮을 달리며 보내온 구호 물자는, 그녀에 의해 비열한 적의 ‘뇌물’로 치부되어 강탈당하듯 압류되었다. 그리고 그의 충직한 가신들은 개처럼 쫓겨나 어두운 국경 너머로 내던져졌다.
자신의 모든 진심과 노력이 이토록 무참하게 왜곡되고 짓밟혔다는 소식을 들을 율리안이 흘릴 피눈물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끼지 못했다.
깊은 밤.
소란스럽던 영지가 가라앉고, 집무실에는 촛불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델라는 책상에 앉아 영지의 결계 강화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엘리아스가 가죽 표지의 두꺼운 수첩을 든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밤낮으로 이어진 격무와 심적인 고통으로 인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엘리아스, 왜 가만히 서 있죠? 오늘의 기억 검증을 시작하세요.”
아델라의 담담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펼쳤다. 그의 목구멍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그는 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님. 혹시 영지의 남쪽 계곡에 있는 하얀 대리석 분수대를 기억하십니까?”
아델라는 깃펜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수대? 에브리트에 그런 조형물이 있었나요? 쓸데없는 사치품이군요. 조만간 철거해서 마탑의 마력 증폭기 자재로 쓰도록 하세요.”
엘리아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 분수대는 회귀 전, 율리안이 아델라의 생일을 맞아 그녀가 좋아하는 조각상을 세워주었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비밀스러운 입맞춤을 나누었던 약속의 장소였다. 아델라가 일기장에 몇 번이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라 적어두었던 그 장소였다.
그녀는 이제 그 장소에 얽힌 일말의 감정도, 존재 가치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파괴해야 할 돌덩이로 여길 뿐이었다.
“그럼…….”
엘리아스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는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회귀 전, 마님께서 가장 아끼시던 푸른색 벨벳 보석함에 들어 있던 은색 열쇠는 기억하십니까? 마님께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며 늘 품에 지니고 다니시던…….”
아델라는 차갑고 투명한 눈동자로 엘리아스를 응시했다.
“열쇠?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물건을 지니고 다녔단 말이죠? 내 기억에 그런 조잡한 물건은 없습니다. 엘리아스, 오늘따라 왜 이리 실속 없는 질문만 던지는 건가요?”
그녀의 말투는 지독할 정도로 평온했고, 완벽하게 타인을 대하는 듯 정중하면서도 선을 긋고 있었다.
터럭만큼의 미련도, 증오도 남아있지 않은 완전한 공허.
철저한 타인.
툭.
엘리아스의 손에서 깃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델라의 책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님…… 아델라 마님…….”
“엘리아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무례하군요.”
아델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타인의 감정 과잉을 혐오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의혹과 불신이 가득 차올랐다.
엘리아스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로 얼룩진 수첩을 움켜쥐며 오열 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제…… 이제 단 하나 남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율리안 카르디안 대공과의 기억 고리가…… 마님께서 그분을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그분의 아내였다는 그 모든 사실을 증명할 마지막 기억의 끈이…… 이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엘리아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이 마지막 고리마저 타버린다면, 마님께서는 그분을 원수로서 기억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집니다! 그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이름 모를 이방인으로 보게 되실 겁니다! 마님의 영혼이……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마법의 껍데기만 남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보좌관의 처절한 오열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아델라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오직 서늘한 이성만을 발휘해 자신에게 물었다.
‘율리안 카르디안이 누구기에, 내가 그를 기억해야만 하는가?’
그녀의 머릿속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고, 마지막 남은 기억의 고리는 폭풍 전야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