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으로 부서지는 결계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차갑게 식어 내렸다.
장벽 너머, 질척이는 진흙 바닥 위로 주저앉은 율리안 카르디안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고하고 오만하다 칭송받던 대공의 위세는 간데없고, 그을음과 피로 얼룩진 나신(裸身)에 가까운 몰골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목숨처럼 쥐고 있던 가문의 펜던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혼식 날 그가 내밀었던, 가문의 가증스러운 결속을 상징하던 마력 추적석의 파편들이 마지막 불꽃을 튀기며 사멸해 가는 광경을 아델라는 그저 고요히 응시했다.
“아델라…….”
피가 섞인 가쁜 숨결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부러지고 짓겨 나가 붉은 선혈을 뚝뚝 흘리는 그의 오른손이 허공을 향해 필사적으로 뻗어 나왔다. 마치 닿지 않을 구원을 갈구하는 조난자처럼, 그는 결계 위의 그녀를 향해 매달렸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모든 기억이…… 정녕 네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단 말이냐? 나를 향해 지었던 그 미소마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는 처절한 갈망과 붕괴 직전의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차라리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붓기를, 전생의 배신에 대해 뺨이라도 갈겨 주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증오 또한 감정의 일종이기에, 차가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으리라.
그러나 백은색 결계의 최정점에 선 아델라의 눈동자는 거울처럼 맑고, 지독하려 하리만큼 평온했다.
그녀는 어깨를 감싼 짙은 감청색 실크 드레스의 자락을 우아하게 매만졌다. 은사로 촘촘히 수놓아진 성좌 문양이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일렁였다. 그녀의 시선은 율리안의 뭉개진 손끝을 스치듯 지나쳐, 그저 길가에 널린 잡석을 보는 것처럼 건조하게 내려앉았다.
방금 전, 결계를 극대화하기 위해 에테르 회로에 태워 보낸 대가.
그것은 율리안 카르디안이라는 사내와 나누었던 첫 번째 약속이자, 그를 향해 품었던 마지막 온정의 파편이었다. 대가가 지불된 순간, 그녀의 영혼 속에서 그에 관한 사적 감정의 책장은 통째로 뜯겨 나가 불타버렸다. 이제 그녀에게 율리안은 그저 영지 국경을 침범한, 성가시고 더러운 침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슬리는군요.”
아델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분노도, 애증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극도의 생경함과 귀찮음만이 묻어나는 서늘한 저음이었다.
“그 오물 같은 몸뚱이를 내 영지 국경에서 치우지 않으면, 다음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를 터뜨리겠습니다. 대공.”
“아델라! 제발, 나를 그렇게 보지 마라……! 아델라-!!”
율리안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단단하게 닫힌 백은색의 장벽은 그의 목소리마저 차단한 채 차갑게 점멸했다.
아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소리만이 차갑고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 * *
영주 성의 집무실은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월넛 우드 테이블 위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과 쌉싸름한 실론산 홍차가 담긴 도자기 찻잔이 놓여 있었다. 홍차의 붉은 수면 위로 아델라의 흐트러짐 없는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길게 늘어진 드레이프 실크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맞은편에 선 보좌관 엘리아스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기록해 두세요, 엘리아스.”
엘리아스는 소리 없이 가죽 장정 일지록을 펼쳐 들었다. 깃펜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주군의 영혼이 마법을 부릴 때마다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유일한 목격자였다.
“방금 전 결계의 반동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소실된 기억의 범위를 확인했습니다. 대공 가문의 문장 형태, 그리고…….”
아델라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하고 쌉싸름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으나, 그녀의 이성은 그보다 훨씬 서늘했다.
“그 사내의 눈동자 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벽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흑안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정보이니 더는 복구하려 애쓰지 마세요.”
엘리아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죽 장갑 너머로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대공의 눈동자는 밤의 바다를 닮은 깊은 벽안이었습니다, 마님. 정말로, 그것마저 잊으신 겁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군요.”
아델라는 차갑게 대꾸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맑은 도자기 마찰음이 집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사내의 눈동자 색 따위가 아닙니다. 에브리트의 완벽한 자립, 그리고 황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지요. 에테르 회로가 요구하는 대가가 고작 그 정도의 하찮은 사생활이라면 오히려 값싼 거래가 아닙니까?”
그녀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타인의 호의를 결코 믿지 않으며, 오직 철저한 계산과 이성만을 신뢰하는 편집증적인 방어기제가 그녀의 전신을 단단한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보다, 에브리트 지하 광산의 흑요석 맥에 잠든 고대 에테르 핵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탑의 1단계 안착은 성공했으나, 황실의 공세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는 그 고대 핵을 깨워 결계의 영구적인 동력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광산 심부의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파동을 감지했습니다만, 장벽이 너무 완고하여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해독을 위해서는 더 고차원적인 에테르 역회로의 가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아스의 보고에 아델라는 턱을 괴며 낮게 조소했다.
“더 많은 기억을 태워야 한다는 뜻이군요. 기꺼이 지불해 드리지요. 내게 남은 전생의 쓸데없는 부스러기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때, 집무실의 묵직한 오크 문이 거칠게 열리며 호위 기사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기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님! 황실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영지 경계를 넘어 성문 앞까지 당도했습니다! 제국 황태자 전하의 인장이 찍힌 판결문을 소지하고 있으며, 영지의 몰수와 마탑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엘리아스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황실 놈들이 벌써 움직였단 말인가. 아직 율리안 대공의 군세가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시점에…….”
그러나 아델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갔다.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였군요. 레오나르드 황태자다운 조급함입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흘러내리는 소리가 기묘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들이 품고 온 음험한 마력 파동이 결계의 신경망을 자극하는군요. 제국의 법도를 운운하며 우리를 압수하려 들겠지만, 그들이 소지한 검은 기운…… 금기 마도구 '라그나의 쐐기'의 파동을 이미 감지했습니다. 감히 내 마탑의 결계를 무너뜨릴 쐐기를 품고 이 성 안으로 발을 들이려 하다니,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아델라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독기가 서렸다.
“가서 맞이해 드리지요. 제국의 위대한 칙사들께서 어떤 낭독을 준비하셨는지 들어나 봅시다.”
* * *
영주 성의 대연회장은 차가운 은빛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화려한 사교계의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무거운 살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화려한 금박의 문양과 붉은 벨벳 카펫이 깔린 알현대 위, 아델라는 위엄 있게 솟아오른 영주의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장미목으로 조각된 팔걸이를 툭, 툭,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선 황실 사절단의 단장, 루퍼트 백작은 가슴에 황실의 용 문양 훈장을 번뜩이며 오만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제국 황립 학회 소속의 마법사들과 황태자 직속의 정예 기사들이 거만한 눈빛으로 영지의 기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브리트 영주, 아델라 에브리트.”
루퍼트 백작이 황태자의 붉은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판결문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는 황실의 허가 없이 사설 마탑을 건설하고, 제국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는 금기의 역회로 마법을 가동했다. 이에 황태자 레오나르드 폰 임페리얼 전하의 명에 따라, 에브리트 영지의 자치권을 전면 몰수하며, 마탑의 모든 시설을 황실 마법학회로 귀속할 것을 선포한다!”
그의 목소리가 대연회장의 높은 천장을 울렸다. 백작은 승리감에 도취한 듯, 입꼬리를 오만하게 늘어뜨리며 아델라를 내려다보았다.
“또한, 카르디안 대공과의 혼인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 역시 엄중히 물을 것이다. 순순히 무릎을 꿇고 판결을 받아들여라. 그것이 네 비천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의 도발적인 언사에도 아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더욱 탐미적이고 잔혹해졌다.
“비천한 목숨이라…….”
아델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낮아, 마치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같았으나 연회장 안의 모든 이들의 고막에 또렷하게 박혀 들어갔다.
“제국의 황실은 여전히 자신들이 이 세상의 규칙이라 착각하고 있군요. 내 영지, 내 땅 위에서 감히 누구의 이름을 빌려 짖어대는 겁니까?”
“무슨 무례한 언사를……! 감히 황태자 전하의 칙서 앞이다!”
루퍼트 백작이 분노로 안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의 손이 품속에 은밀히 감추어 둔 검은 상자, 금기 마도구 '라그나의 쐐기'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무릎을 꿇어야 할 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분간이 안 가나 보군요.”
아델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심장부에 잠들어 있던 에테르 회로가 폭발적으로 공명했다.
그녀의 영혼 속에서 제국 황실 사교계의 화려했던 기억 한 조각이 하얗게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 대가로 정제된 최고위 원소 마력이 대연회장의 공간 전체를 순식간에 지배했다.
*그라비티 오버로드(Gravity Overlord).*
초월적인 중력의 파동이 사절단이 서 있는 공간만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내리눌렀다.
쾅-!!
대리석 바닥이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억……?!”
루퍼트 백작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의 발에 짓밟힌 듯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의 오만한 고개가 거친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찧어졌다.
“끄아아악!”
뒤에 서 있던 황실 기사들과 마법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착용한 단단한 강철 갑옷이 엄청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찌그러지며 뼈를 압박했다. 쩍, 쩍 하는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기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다 못해 바닥에 완전히 납작하게 엎드려 신음했다.
백작이 들고 있던 황태자의 판결문은 중력에 짓눌려 형편없이 구겨진 채 바닥을 뒹굴었고, 그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금기 마도구 상자가 튕겨 나와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짓이냐……!”
루퍼트 백작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려 애썼으나, 아델라의 서늘한 시선이 닿자마자 머리통이 바닥으로 더 강하게 처박혔다.
아델라는 옥좌에서 천천히 내려와, 바닥에 엎드린 백작의 머리맡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백작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판결문을 읊는가?”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황태자의 압수 도장과 라그나의 쐐기가 담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에테르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황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인장이 찍힌 도장을 순식간에 한 줌의 고운 모래로 바스러뜨렸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붉은 모래를 보며, 백작의 눈동자가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황실의 무소불위 권한이 이 변방의 영지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유린당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영지에서 황실의 법도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유일한 지배자는 나, 아델라 에브리트뿐이니까요.”
그녀는 차갑게 굳어버린 눈빛으로 엘리아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아스.”
“예, 마님.”
“이 오만하고 무능한 침입자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하세요. 그리고 저들이 품고 온 장난감들과 함께 지하 하수 감옥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처넣으세요.”
그녀의 가차 없는 명령에 백작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델라! 네년이 미쳤구나! 감히 황실의 특사를 감금하다니! 이는 제국을 향한 정면 반역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결코 너를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용서?”
아델라는 귀족적인 비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았다.
“그 잘난 황태자에게 전하세요. 내 땅에 발을 들이는 자는 그가 누구든,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기사들이 달려들어 바닥에 엎드린 사절단을 개처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대연회장에는 그들의 비참한 비명과 쇠사슬 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 * *
어둡고 습한 지하 하수 감옥.
사방에서 떨어지는 썩은 물소리와 쥐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그곳의 가장 깊은 독방에 루퍼트 백작과 특사들이 처박혔다. 그들의 화려했던 관복은 찢기고 더러운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호위 기사들이 철창문을 굳게 닫고 열쇠를 채운 뒤, 구두 소리를 멀리하며 사라졌다.
사방이 완벽한 어둠에 잠기자, 감옥 구석에 쓰러져 있던 특사 중 한 명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 어린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혀 밑에 숨겨두었던 작은 붉은색 결정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사절단이 출발하기 전, 카르디안 대공가의 교활한 책략가 소피아가 그에게 은밀히 건넸던 역마법 유발석이었다. 마탑의 에테르 흐름을 일시적으로 왜곡하고 폭주를 일으키기 위해 준비된 대공가의 비장의 카드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아델라가 보여준 초월적인 힘에 대한 공포와 굴욕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감히 황실을 모욕하고 우리를 이딴 오물통에 처넣어? 네년의 그 오만한 낯짝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
콰득.
그가 입안의 붉은 결정을 강하게 깨물었다.
결정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의 목구멍을 타고 기괴하고 붉은 마력의 인(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불길한 붉은 안개가 소리 없이 피어오르며, 에브리트 마탑의 심장부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