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검문소에…… 카르디안 대공이 직접 당도했습니다! 수백 명의 정예 기사단을 이끌고 결계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전령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지하 광산의 가파른 흑요석 벽면을 부딪치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차갑고 습한 동굴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는 듯했다.
아델라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랏빛 흑요석 광맥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돌 표면에 남아 있던 서늘한 냉기가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 들어왔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잔잔했다.
“대공이 직접 움직였다라.”
아델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고요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영주님, 바로 경비대를 소집하겠습니다. 대공이 결계를 강제로 돌파하려 한다면 이는 명백한 영지 침범이자 선전포고입니다.”
엘리아스가 허리에 찬 검자루를 움켜잡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가에 어린 깊은 연민과 단호한 충성심이 대지의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타올랐다.
“아니, 기사들을 뒤섞어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엘리아스.”
아델라는 가볍게 손짓하며 광산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밤하늘의 심연을 닮은 짙은 남색 실크 드레이프 드레스가 바닥을 부드럽게 쓸었다. 은사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성좌 문양들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명멸했고, 깃깃이 장정된 흑진주 단추들은 그녀의 규칙적인 발걸음에 맞춰 차가운 마찰음을 냈다.
그녀의 몸에서는 갓 피어난 침묵과 서늘한 밤안개의 향취가 풍겼다. 귀족주의 사교계의 정점에서나 볼 법한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이 황량하고 어두운 지하 광산과 지독하게 대비되며, 그녀를 범접할 수 없는 지배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제어소로 간다.”
* * *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는 영지 북부의 국경 검문소.
평소라면 투명한 장벽에 가려 고요했을 국경선은 지금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푸른 마력의 폭풍에 휩싸여 있었다.
지상에 단단히 박혀 있는 은빛 에테르 결계의 표면이 끊임없이 진동했고, 장벽 너머에서는 칠흑 같은 갑옷을 입은 카르디안 대공가의 정예 기사단이 검을 뽑아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투구조차 쓰지 않은 채 폭주하는 마력을 뿜어내는 율리안 카르디안이 서 있었다.
“아델라! 나와라!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
율리안의 목소리가 바람을 찢고 장벽을 두드렸다. 그의 단정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흑발은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푸른 마력을 방출하는 그의 두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왕성에서 보여주던 그 오만하고 품위 넘치던 대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광기에 젖은 집착과 비굴할 정도의 절박함만이 대공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장벽 안쪽, 신설된 국경 제어소의 높은 단상 위로 부드러운 실크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안의 시선이 번개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아델라는 장벽 너머의 아수라장을 아주 한가로운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밤빛 머리카락을 흩날렸으나,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은사 드레스 위에 걸친 두꺼운 모피 망토가 바람에 일렁이며 우아한 자태를 완성했다.
“이토록 사납게 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 누구인가 했더니, 카르디안 대공이셨군요.”
아델라가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에테르 마력의 공명을 타고 국경 전체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제 영지의 경비견들이 짖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직접 나와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묘하게 뼈를 깎아내는 비유에 율리안의 턱 끝이 단단히 굳어졌다. 그가 장벽에 손을 대며 외쳤다.
“아델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왜 내 연락을 피하고 이런 기괴한 결계를 쳐서 스스로를 가두는 거냐! 나와 함께 황도로 돌아가자. 혼인 서약은 아직 유효하다!”
“유효하다라.”
아델라는 율리안이 내뿜는 마력의 공명선을 응시했다. 은빛 결계와 충돌하며 불꽃을 튀기는 그의 푸른 마력.
자세히 보니, 그의 마력은 결계의 특정 주파수와 기이할 정도로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다. 단순한 폭력적인 돌파가 아니었다. 율리안은 결계의 틈새를 아주 정밀하게 해집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 결계는 아델라 자신의 영혼과 마력을 기반으로 구축된 것인데.
아델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율리안의 움켜쥔 오른손 끝으로 향했다.
그의 굳게 쥔 손아귀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붉은빛을 띠는 마력의 파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보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혼식 날, 아델라가 그 오만한 남자의 얼굴에 던져 산산조각 냈던 카르디안 가문의 상징 펜던트 파편이었다.
‘마력 추적석.’
아델라의 머릿속에서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율리안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던 날 선조의 제단에서 받았다는 그 유서 깊은 펜던트. 그 안에는 소유자의 마력뿐만 아니라, 그와 가장 깊은 서약을 맺은 상대의 마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동조하는 고대 제국의 추적석이 숨겨져 있었다.
율리안은 결혼식장에서 박살 난 그 펜던트 조각을 버리지 않고 모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에 남아 있는 아델라의 잔류 마력을 매개 삼아, 강제로 결계의 문을 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더러운 조각상을 아직도 보물처럼 쥐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대공.”
아델라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당신을 내 영지로 인도하는 열쇠가 될 거라 믿으셨습니까?”
율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손을 더 꼭 쥐며 소리쳤다.
“이것만이 너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아델라! 네가 아무리 나를 밀어내려 해도, 이 펜던트에 깃든 우리의 서약은 지워지지 않아! 제발 고집 피우지 말고 문을 열어라!”
“서약이라. 참으로 우스운 단어를 쓰시는군요.”
아델라의 손끝이 허공에서 가볍게 원을 그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은빛 에테르 회로가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율리안이 쥐고 있는 펜던트 조각 속 추적석이 아델라의 마력 반응에 응답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그것이 아델라가 마음을 열어 결계를 해제하려는 징조라 오판하고,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그래, 아델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델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리앉았다.
“그것은 당신을 인도하는 열쇠가 아니라, 당신의 손안에서 터질 시한폭탄이니까요.”
그녀는 추적석의 마력 흐름을 역추적했다. 율리안의 푸른 마력과 연결된 공명선을 정확히 움켜쥐고, 그것을 마법 폭탄의 기폭 장치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율리안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단순히 결계의 마력만으로는 그의 손아귀 안에서 완벽한 치명상을 입히기 부족했다.
더 강력하고 가혹한 마력이 필요했다. 에테르 회로의 역설을 가동할 시간이었다.
아델라는 눈을 감았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에테르 제단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에테르 회로의 역설을 구동합니다. 등가의 대가를 소각합니다.]
머릿속에서 차가운 기계음 같은 영혼의 울림이 전해졌다.
이번에 태워질 기억은 무엇인가.
아델라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은빛 실타래 하나가 풀려나와 제단의 불꽃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율리안의 가문 정원,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온실 속에서, 앳된 얼굴의 율리안이 수줍게 웃으며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은실을 감아주던 순간.
-‘평생 너만을 지킬게, 아델라. 에브리트와 카르디안의 이름 아래,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너를 향한 약속은 변하지 않아.’
그 오만한 남자가 생애 처음으로 보였던 가장 순수하고 진실했던 맹세. 아델라가 그 달콤한 거짓말을 온 마음으로 믿으며,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던 첫 약속의 기억.
지독하게 찬란하고 소중했던 첫 사랑의 파편이 붉은 불꽃 속에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 스러졌다.
기억이 소멸하는 순간, 아델라의 가슴 속에서 기이한 통증이 일었으나, 이내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차가운 공허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슬픔도, 분노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완벽하게 비워진 느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델라의 전신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순백의 에테르 마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
율리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장벽 너머에서 아델라를 감싸고 있던 은빛 마력이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백은색의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찔렀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 안에서 요동치던 펜던트 파편이 감당할 수 없는 고밀도의 마력으로 터질 듯 팽창했다.
“아델라! 대체 무슨 짓을……!”
“더러운 손으로 내 영역을 탐한 대가입니다. 잘 받아 가시지요.”
아델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율리안이 쥐고 있던 펜던트 파편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붉고 푸른 불꽃이 율리안의 상반신을 집어삼켰고, 그가 내뿜던 푸른 마력의 공명선들이 단숨에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
“끄아아악!”
대륙 최강의 기사라 불리던 대공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의 단단한 마력 장벽은 아델라의 에테르 마력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가슴팍의 은빛 갑옷이 찌그러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아델라가 방출한 백은색 마력이 국경 아래에 묻혀 있던 흑요석 광맥과 공명하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우우우웅-!
거대한 대지의 진동이 국경 제어소를 감쌌다.
영지 중심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이 국경 장벽을 단단하게 감싸 안았고,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흑요석 기둥들이 솟구쳐 올랐다. 기둥들은 서로 맞물리며 거대한 성벽의 형태를 갖추었고, 그 위로 한 층 더 견고하고 촘촘한 은빛 결계가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에브리트 독립 마탑의 1단계 방어 결계가 영구적으로 안착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황실의 정예 군대나 대공가의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아델라의 허락 없이는 이 장벽을 단 한 치도 넘어설 수 없었다. 완벽한 자립과 지배의 초석이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폭발의 여파로 자욱했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장벽 너머, 차가운 흙바닥 위로 율리안이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단정한 얼굴은 피와 그을음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펜던트를 쥐고 있던 오른손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겨 나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율리안은 핏발 선 눈을 들어 장벽 위의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아델라…….”
그의 목소리가 피울음 섞인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네가 내게 했던 약속들이 정녕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그는 아델라의 눈동자 속에서 일말의 흔들림이나, 자신을 향한 원망의 불꽃이라도 찾아내려 애썼다. 차라리 증오 가득한 눈빛이라도 좋았다. 자신을 향해 분노를 터뜨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높은 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델라의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투명하고 건조했다.
그 눈빛에는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 과거의 미련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돌멩이나, 처음 보는 기이한 생물을 관찰하듯 지극히 생경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소각해 버린 '첫 약속'의 대가로 인해, 아델라의 영혼 속에서 율리안 카르디안이라는 존재는 완벽한 '타인'으로 재정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적 감정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델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드레스의 소맷자락을 정리했다.
“거슬리는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고저도 없었다.
“그 오물 같은 몸뚱이를 내 영지 국경에서 치우지 않으면, 다음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를 터뜨리겠습니다. 대공.”
율리안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완전히 잊은 것이었다.
자신이 평생 머물러야 했던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지워졌음을 깨달은 율리안의 가슴 속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델라-!!”
율리안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장벽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굳건하게 닫힌 백은색의 결계는 더는 대공의 목소리조차 안쪽으로 전달하지 않은 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