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을 더럽히며 빠르게 번져나갔다.
화살깃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장미 향이 감도는 영주성의 공기를 순식간에 썩은 물비린내로 채웠다. 영지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경비병들은 황급히 창끝을 겨누었다.
아델라는 영주석에서 내려와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빛 벨벳 드레스 자락이 바닥의 피붙이를 스치지 않도록 우아하게 펄럭였다. 은빛 레이스로 촘촘하게 수놓인 소맷자락 아래로, 마력을 머금은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황실의 사냥개치고는 꼴이 사납군.”
그녀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쓰러진 사내의 목덜미를 구두 굽으로 가볍게 밀어 젖히자,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사내의 가슴팍에 박힌 검은 화살, 그것은 제국 황실의 은밀한 처단 부대인 ‘칠흑의 손’이 사용하는 독 화살이었다.
“영주님, 이미 숨이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이 독은 영혼까지 녹여버리는 가이아의 눈물입니다.”
엘리아스가 허리를 숙여 사내의 안색을 살핀 뒤 빠르게 아델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사내의 쇄골 부근을 가리켰다.
“죽게 내버려 두지 마라. 내 허락 없이는 지옥의 문턱조차 밟지 못할 테니.”
아델라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푸른빛을 띤 투명한 액체 방울들이 허공에 응결되었다. 에테르 회로의 역설이 가동되며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머릿속의 기억 서랍 중 하나가 가볍게 덜컹이며 잠겼으나, 그녀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회로에서 정제된 고순도의 에테르 정제수가 첩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지하 심문실로 옮겨라. 엘리아스, 쥐새끼의 주둥이를 열 준비를 해라.”
“명령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첩자의 몸을 거칠게 끌고 지하로 내려갔다. 대리석 바닥에 남은 길고 붉은 궤적이 아델라의 차가운 눈동자에 담겼다.
***
에브리트 영주성 지하는 차갑고 축축한 흑요석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횃불의 붉은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벽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괴기스럽게 늘어났다.
형틀에 묶인 채 사슬에 결박된 첩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에테르 정제수는 독을 해독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델라를 노려보았다.
“에브리트의…… 미친년……. 네가 감히 황태자 전하의…….”
“그 알량한 황태자의 이름을 입에 담는 배짱은 가상하구나.”
아델라는 가죽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은제 찻잔 속에서 붉은 홍차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찻잔 가장자리에 칠해진 금박이 횃불 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였다.
“말해라. 네놈의 주인이 에브리트 영지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흐윽, 크하하! 제국 마법학회의 손아귀를 벗어난 변방의 영주 주제에…… 알 필요 없다! 어차피 너희는 모두 황태자 전하의 발아래 짓밟힐 운명이다!”
사내가 피침을 뱉으며 악을 썼다.
아델라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을 감도는 떫고 달콤한 맛을 음미한 뒤,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밀폐된 지하 심문실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엘리아스.”
그녀의 나지막한 부름에 엘리아스가 첩자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이자의 가슴을 열어라.”
“예, 영주님.”
엘리아스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사내의 셔츠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사내의 가슴팍, 심장 바로 윗부분에 기묘하게 뒤틀린 보랏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문신이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고대의 이식형 마법식이었다.
“과연.”
아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은 연못처럼 침잠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지식이 이 마법식의 정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실이 오랜 세월 숨겨왔던 고대 유적 탐사 마법식. 그것은 대지의 깊은 곳에 묻힌 특수한 마력을 추적하는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었다.
“황태자 레오나르드가 에브리트 지하의 흑요석 맥을 노리고 있었군. 그것도 단순한 광산이 아니라, 그 아래 잠든 에테르 핵을.”
사내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극도의 공포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뒤덮었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그 정보는 황실 비고의 깊은 곳에만…….”
“비밀이란 지키는 자의 목숨만큼 가벼운 법이지.”
아델라는 첩자의 가슴 위에 직접 손을 얹었다. 차가운 살결 아래로 요동치는 마력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에테르 회로를 역방향으로 가동했다.
웅.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기분 나쁜 감각이 스쳤다. 누군가의 얼굴, 혹은 누군가와 나누었던 다정한 속삭임의 잔상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대가로 얻은 것은 첩자의 마법식을 강제로 해독할 수 있는 압도적인 최고위 원소 마력이었다.
“아아아악! 머리, 머리가……!”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마법식에서 보랏빛 광선이 뿜어져 나와 아델라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의 흡수가 아니었다. 사내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던 지하 광산의 비밀 통로와 고대 지도가 아델라의 뇌리로 직접 전송되는 과정이었다.
파지직!
공기 중에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마침내 사내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완전히 바스러져 재가 되었다. 첩자는 거품을 물고 기절해 머리를 툭 늘어뜨렸다.
아델라는 손을 거두고 소매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어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제 에브리트 지하 깊숙이 뻗어 있는 고대 흑요석 광산의 정밀한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황태자가 그토록 탐내던, 그리고 자신의 독립 마탑을 완성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자원이 묻힌 곳이었다.
“성공하셨군요, 영주님.”
엘리아스가 감탄과 우려가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델라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이자는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어라. 황실과의 협상 카드로 쓸모가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아델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기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방금 소실된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위는 에브리트의 지배자가 된 자신에게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
집무실로 돌아온 아델라를 맞이한 것은 책상 위에 놓인 한 통의 편지였다.
고급스러운 붉은색 실크 리본으로 묶인 연서. 그 봉인에는 카르디안 대공가를 상징하는 백호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국경의 전령이 가져온 것입니다. 카르디안 대공이 직접 보낸 친서라고 하더군요.”
시종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델라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은은한 백합 향이 코끝을 스쳤다. 율리안이 즐겨 쓰던 향수 냄새였다. 편지 봉투를 매만지던 그녀의 손가락끝에,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부서진 펜던트 파편의 마력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식장에서 그녀가 가차 없이 짓밟아 부수었던 율리안의 펜던트. 그 안에 숨겨진 마력 추적석의 잔재가 이 편지에 담긴 율리안의 마력과 공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추적하려 드는가, 율리안.’
아델라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조롱 섞인 실소가 흘러나왔다.
사박.
그녀는 편지를 뜯지도 않은 채, 집무실 한구석에서 활활 타오르는 대리석 벽로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불꽃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영주님, 읽어보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대공의 친서라면 황실과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아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 오만한 남자가 보낸 글 따위, 읽을 가치도 없다.”
아델라는 주저 없이 편지를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화르륵!
실크 리본이 먼저 녹아내리고, 백호의 인장이 찍힌 종이가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여 검은 재로 변해갔다. 그 비참하게 타들어 가는 모습은 마치 율리안의 뒤늦은 후회와 절규가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에브리트의 주인이며, 그자는 그저 제국의 침략자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녀는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며 차갑게 읊조렸다. 율리안에 대한 분노조차 이미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철저한 타인에 대한 경계와 국경을 방어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계산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에브리트 영주성 광장에는 수많은 영지민이 모여들었다.
황실의 위협과 국경의 긴장감 속에서 불안에 떨던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델라는 발코니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황금빛 자수가 놓인 짙은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로브 자락이 그녀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에브리트의 주민들이여.”
아델라의 목소리가 마법의 힘을 타고 광장 전체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군중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국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굶주리게 만들려 하고 있다. 황실의 황태자는 우리의 대지를 유린하고 우리의 자원을 찬탈하려 음모를 꾸몄다.”
그녀의 손끝이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걸을 것이다. 오늘부로, 에브리트 지하의 고대 흑요석 광산을 전면 개방한다!”
영지민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흑요석 광산은 오랫동안 위험구역으로 지정되어 통제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채굴되는 흑요석은 우리 영지를 지킬 마탑의 벽이 될 것이며, 너희에게는 제국 그 어떤 영지보다 풍요로운 일자리와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것이다. 일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광산으로 오라. 에브리트는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질 것이며, 나 아델라 에브리트가 너희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녀의 단호하고 우아한 선언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땅을 흔드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에브리트 영주님 만세!”
“우리를 지켜주소서!”
절망에 빠져 있던 영지민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제국의 눈치를 보는 변방의 약자가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사이자 지배자의 보호 아래,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델라는 환호하는 군중을 보며 차가운 만족감을 느꼈다. 이것이 그녀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영지민들을 자신의 강력한 마탑을 지탱할 견고한 초석으로 삼는 것.
발코니에서 내려온 아델라는 곧바로 엘리아스를 대동하고 지하 광산 채광 작업장으로 향했다. 가파른 마차 길을 따라 내려가자, 칠흑처럼 어두운 현무암 벽 사이로 은은한 보랏빛 마력을 내뿜는 흑요석 광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입니까.”
“예, 영주님. 첩자의 지도에 표시된 고대 에테르 핵의 맥이 바로 이 아래로 이어집니다. 채굴 속도를 높이면 일주일 안에 마탑의 1단계 방어 결계를 영구화할 수 있습니다.”
엘리아스가 지도를 펼치며 보고했다.
아델라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흑요석 벽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을 통해 거대한 대지의 마력이 전해져 왔다. 전생에서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모든 음모를 짓밟고, 진정한 지배자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산 입구 쪽에서 다급한 군홧소리가 동굴 벽을 울리며 전해졌다.
정찰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전령이 헐떡이며 달려와 아델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영, 영주님! 큰일입니다!”
엘리아스가 기사답게 전령의 앞을 가로막으며 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영주님 앞이다. 예의를 갖추고 보고해라.”
전령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국경 검문소에…… 카르디안 대공이 직접 당도했습니다! 수백 명의 정예 기사단을 이끌고 결계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아델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결계는 어찌 되었나? 내가 설치한 임시 결계가 그들의 진입을 막았을 텐데.”
전령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대답했다.
“대공이…… 대공이 직접 자신의 마력을 방출하며 결계를 강제로 돌파하려 하고 있습니다! 결계의 마력과 대공의 마력이 충돌해 국경 전체가 피바람에 휩싸였습니다! 대공은 영주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며, 결계를 통째로 부숴버리겠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아델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타올랐다.
율리안 카르디안. 그 미련한 남자가 마침내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아델라는 천천히 흑요석 벽에서 손을 떼며, 국경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